추석 애창곡 1위 '나훈아의 고향역'에 숨은 사연
원곡은 1970년 임종수 작곡 ‘차창에 어린 모습’
- ▲ 작곡가 임종수
추석 명절 때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오는 가요가 있다. 매년 10월 31일만 되면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집중적으로 방송을 타는 것처럼.
돌발 퀴즈. 고향을 주제로 한 노래 중 애창곡 1위는? 가요 레퍼토리를 줄줄 꿰고 있는 사람들은 금방 답이 나올 것이다. 만일 가물가물하다면 결정적인 힌트 한 개. 나훈아의 히트곡 중 한국 성인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1위. 답은 ‘고향역’이다. 임종수 작사·작곡의 ‘고향역’. 이곡은 처음에는 ‘고향역’이 아니었다. 나훈아는 1970년 3월, 앨범을 내면서 당시 무명 작사·작곡가이던 임종수로부터 두 곡을 받아 불렀다.
‘차창에 어린 모습’과 ‘그 사람을 버린 죄로’.
하지만 두 곡은 방송도 한번 타지 못한 채 묻히고 만다. 2년 뒤 나훈아는 ‘차창에 어린 모습’을 제목과 가사는 물론 리듬까지 바꿔 다시 취입한다. 그게 우리가 부르고 있는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으로 시작하는 ‘고향역’이다. 국민애창곡 ‘고향역’이 탄생하는 과정은 1970년대의 사회·문화상을 고스란히 응축하고 있다.
- ▲ 왼쪽이 임종수, 오른쪽이 나훈아
노래 취입 후 가수 포기… 작곡가 도전
1970년대 한국 음반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회사는 오아시스레코드사와 지구레코드사.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나훈아는 오아시스레코드사 전속이었다. 오아시스레코드사는 서울 청계천 8가, 평화시장 건너편의 건물 3층에 있었다.
1970년 1월 어느 날 아침, 오아시스레코드사에 행색이 초라한 젊은 남자가 찾아왔다. 여직원은 손으로 볼펜을 돌리며 이 남자의 입성을 훑어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남자는 여직원의 태도에 몹시 불쾌했지만 꾹 참고 ‘어떻게 왔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남자는 자신을 작곡가라고 소개하고 사장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직원은 “사장님이 안 계시다”며 거절한다. 다음날부터 남자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출근한다. 남자는 무명작곡가 임종수(林鍾壽·당시 28세).
“중학교 다닐 때부터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고향 순창에 계신 어머니께서 막둥이가 가수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시겠다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정한수 떠놓고 빌고 있습니다. 황 선생님, 제발 가수가 되게 지도해 주십시오.”
황문평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 자리에서 명함 두 장을 꺼내 뒷면에 간단한 메모를 한다. 명함 한 장은 작곡가 계수남 음악학원장에게, 다른 한 장은 수도육군병원장에게 각각 전하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수도육군병원장에게 보내는 메모에는 ‘임종수 이등병이 근무 후 노래를 배울 수 있게 배려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숭인동 동대문실내스케이트장 옆에 있던 계수남음악학원을 찾아갔다. 계수남은 그의 노래를 들어보고는 “군인이 무슨 돈이 있느냐”며 “장학생으로 와서 음악공부를 하라”고 말한다.
그때가 1965년 11월. 서울에 거처가 없던 그는 계수남음악학원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밤이면 철제 책상 두 개를 나란히 붙여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잤고 밥은 학원 옥상에서 석유풍로로 끓여먹었다. 임종수는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예명도 지었다. 임시원.
신인가수 임시원은 남상규, 오기택 등 함께 시민회관 무대에 서기도 했다. 1967년 그는 마침내 작곡가 나화랑 선생에게서 노래를 받아 취입한다. ‘호반의 등불’이었다. 꿈만 같은 가수 데뷔였다. 일주일 동안 그는 자신의 노래를 수십 번 반복해서 들었다. 그리곤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때까지는 몰랐는데 내 노래를 취입해서 듣고 보니 음색에 개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는 팝송이 물밀듯이 들어올 때라 내 창법이 시대의 흐름에 맞지도 않았습니다. 돈도 없으니 이 바닥에서 버틸 방법도 없었고 또 내 얼굴이 TV에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가수를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그는 나화랑 선생을 찾아가 ‘가수를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나화랑 선생은 그에게 “정말 현명한 판단을 했다”면서 “노래를 잘하는 것으로 하면 너는 가수가 되고도 남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화랑 선생은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한다.
“너 오늘부터 작곡을 해라. 니가 생각하고 있는 멜로디를 악보에 적을 수 있느냐?”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화랑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1주일 뒤에 노래를 써가지고 와봐라”.
작곡법을 배워본 일이 없던 그는 혼자서 머리를 쥐어짜며 곡을 썼다. ‘돌아가주마’라는 제목이었다. 나화랑 선생은 ‘돌아가주마’를 피아노로 쳐보고는 임종수에게 말했다.
“처음 작곡해본 사람이 이런 곡을 쓸 수가 없다. 너는 반드시 작곡으로 성공한다.”
68번째 곡 ‘차창에 어린 모습’ 들고 무작정 레코드사로
‘가수 임시원’에서 ‘작곡가 임종수’로 태어나는 순간. 그는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곡을 썼다. 그러나 성공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는 1970년 초 68번째 곡을 썼다. ‘차창에 어린 모습’. 노랫말은 서울에 올라와 무진 고생을 하는 자신의 처량한 삶을 빗대어 지었다. ‘떠돌다 머무는 낯선 타향에/ 단 한번 정을 준 그 사람을 홀로 두고서/ 혼자만 몸을 실은 열차는 외로워/눈감아도 떠오르는 차장에 어린 모습….’
무명작곡가가 이름을 날리는 길은 단 한 가지. 유명 가수에게 곡을 줘 히트시키는 것이다. 당시 남자 인기가수는 남진·나훈아·박일남·남상규·안다성·오기택·최희준 등이었다. 임종수는 이들 중에서 ‘나훈아가 부르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훈아가 전속해 있는 오아시스레코드사를 무작정 찾아온 것이다.
그는 2주일 동안 계속 같은 시간에 사무실을 찾아가 결국 손진석 사장을 만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는 “나훈아에게 주고 싶은 곡이 두 개 있으니 나훈아를 만나게 해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손사장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나훈아가 언제 오는지 우리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3개월 ‘뻗치기’… 나훈아 만나자 “딱 5분만…”
그는 또다시 뻗치기 작전에 들어갈 수밖에. 그는 오아시스레코드사 직원처럼 오전 9시쯤에 출근해 오후 4~5시까지 사무실을 지켰다. 그러기를 두 달여. 오전 11시쯤이었다. 사무실이 갑자기 왁자해졌다. 나훈아의 등장. 손 사장은 사장실 문을 열고 나와 “훈아 왔노”라며 반갑게 맞았다. 나훈아는 막 영화촬영을 끝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모자부터 부츠까지 전부 가죽제품을 걸치고 짙은 선글라스를 쓴, 톱스타의 모습이었다. 나훈아를 실물로 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사장 방에 들어간 나훈아가 나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11시40분, 나훈아가 사장실을 나와 레코드사 현관문을 밀고 나가려는 찰나. 그는 가슴이 떨렸다. 이 기회를 놓치면…. 그는 벌떡 일어나 뒤에서 나훈아의 어깨를 잡았다.
“와예?”
나훈아의 첫 반응이었다. 그는 준비한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부었다.
“저는 무명 작곡가 임종수라고 하는데, 나훈아님을 만나려고 3개월 동안 기다렸습니다. 나훈아님께 주고 싶은 곡이 있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2절까지 부르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두 곡을 1절씩만 부르겠습니다. 그러면 5분이면 충분합니다. 딱 5분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딱 5분만’이라는 말에 나훈아는 마음이 흔들렸다. 나훈아는 그를 따라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먼저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떠돌다 머무는 낯선 타향에~”. 등 뒤에 서있던 나훈아가 앞으로 와 그의 얼굴을 쓱 쳐다보았다.
“임 선생님, 지보다 더 노래를 잘하시네예. 한 번만 더 해주이소.”
임종수는 다시 1절을 불렀다. 그러자 나훈아는 “한 번만 더 해주이소”라고 말했다. 노래를 세 번 듣고 난 나훈아는 “제가 한번 따라해 보겠심더”라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임종수는 전율을 느꼈다. ‘세 번 듣고 어떻게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 나훈아는 그 자리에서 악보에 사인을 했다. 취입하겠다는 뜻이었다. ‘그 사람을 버린 죄로’ 역시 나훈아의 낙점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 나훈아 취입… “불건전하다” 방송불가
1970년 3월 9일 나훈아가 노래를 취입했다. 그 다음날 레코드사를 찾아가니 ‘차장에 어린 모습’이 타이틀곡으로 편집되었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동료 작곡가와 사무실 직원들이 축하한다며 손을 내밀었다. 임종수의 인생에도 마침내 해 뜰 날이 있구나, 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5월 초 나훈아 음반이 나왔을 때는 ‘차창에 어린 모습’은 타이틀 곡이 아닌 세 번째 곡으로 밀려나 있었다. 기성작곡가들의 반발, 전속금 문제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레코드사 측이 취한 조치였다. 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새 앨범의 경우 타이틀곡만 방송을 타는 경향이 있을 때였지만 나훈아가 불렀으니 세 번째 곡도 주목을 받겠지 하고 초초하게 기다렸다.
그런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가사가 건전하지 못해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노랫말이 정부의 국민의식개혁 운동과 배치된다는 설명이었다. 당시만 해도 모든 앨범에 마지막 곡으로 이른바 건전가요가 하나씩 들어가던 때였다. 권력이 장발과 미니스커트까지 단속하던 시대 분위기였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차창에 어린 모습’은 방송 한번 못 탄 채 사라지는 비운(悲運)의 신세가 되었다.
2년 만에 가사 고쳐 ‘고향역’으로 재취입 대히트임종수는 여전히 무명작곡가로 남아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1971년 12월 말 그는 오아시스레코드사에 들렀다가 나훈아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나훈아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선생님, ‘차창에 어린 모습’이 너무 아깝심니더. 어차피 방송도 안 되었으니 슬픈 가사를 띠고(‘떼고’의 사투리) 건전하게 고쳐주이소. 리듬도 트로트에서 고고로 바꿔 주시고예. 고고로 바꾸면 경쾌하게 들리지 않겠어예.”
임종수는 제목, 가사, 리듬을 바꾸는 문제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건전한 내용’을 놓고 여러 날을 고민했다. 불현듯 중학교 2학년 때 황등역에서 이리역까지 통학하던 일이 생각났다.
“익산군 삼기면 형님 집에서 산길을 넘어 황등역으로 가 통학 열차를 타곤 했어요. 아침밥을 해먹고 이십리 산길을 넘어 열차 시간에 맞춰 가는 게 고통의 연속이었죠. 뛰다시피 해서 겨우 열차에 타면 발판에 걸터앉아 이리역에 도착할 때까지 숨을 몰아쉬곤 했어요. 그때 기찻길 옆에 핀 코스모스를 보면서 고향의 어머니가 생각나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일단 주제를 ‘고향역’으로 하자 가사는 술술 풀려나갔죠.”
1972년 2월 8일, 나훈아는 ‘고향역’을 취입했는데, 이번에도 ‘고향역’은 타이틀곡이 아니었다. ‘고향역’은 또다시 주목 받지 못했다. 행운의 여신은 끝까지 임종수에게 손짓을 하지 않나 싶던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나훈아가 전격적으로 지구레코드사로 전속사를 옮겨버린 것이다. 지구레코드사는 나훈아의 ‘녹슬은 기찻길’을 내놓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오아시스레코드 측은 맞불을 놓기 위해 묘수를 짜냈다. 전국 방송국 PD들에게 긴급 설문을 돌렸다. 나훈아의 앨범 중 타이틀곡을 제외한 알려지지 않은 곡 중 ‘베스트 10’을 골라달라는 내용이었다. 베스트 10 중 1위가 ‘고향역’이었다. 레코드사 측은 ‘고향역’을 타이틀 곡으로 다시 앨범을 내놓았고 9월이 되자 전국은 ‘고향역’으로 뒤덮여버렸다.
산업화로 도시로의 인구이동이 심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고향을 떠난 이들의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임종수 시대’도 코스모스와 함께 활짝 피었다. 1972년 이후 코스모스 피는 계절이 오면 전국에서 ‘고향역’이 흘러나온다.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22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조성관 편집위원 mapl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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