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_연예_詩_만화

美국립보건원 박차고 온 김성진 박사

전동키호테 2008. 5. 10. 15:12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美국립보건원 박차고 온 세계적인 암 권위자 김성진 박사

 

이길여(李吉女) 가천길재단 회장은 의학계의 대모(代母)다. 2004년 이 회장이 방사선물리학의 권위자인 조장희 미 UC어바인대 교수를 뇌(腦)과학연구소장으로 영입할 때 세상이 그 배포에 놀랐다. 당시 68세 노(老)교수에게'연봉 3억6000만원, 임기 15년 보장'이란 조건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가 이번에는 1000억을 들여 암·당뇨연구소를 만들었다. 9일 인천 송도에서 개원한'이길여 암·당뇨연구소'다. 전희숙(시카고 프랭클린의대) 김영범(하버드의대) 최철수(예일의대) 같은 석학 22명에 100여 연구원이 포진한 이 연구소의 목표는 암과 당뇨의 완치다.

암·당뇨연구소장으로 영입된 사람은 김성진(金聖鎭·54) 박사다. 김 박사는 일본 쓰쿠바(筑波)대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 국립보건원(NIH)에서는 암 유전자 조절연구실장을 지냈다. 그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이 회장은 백지(白地)수표까지 내밀었다고 한다.
미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에 있는 NIH는 1887년 설립됐다. 27개 연구소가 분야별 연구를 진행하며 미국 내 의대, 병원, 각종 연구소도 지원한다. 직원 1만8600명에게 배정된 예산이 300억 달러다.

이런 곳에서 인정받은 '과학두뇌'는 창백한 천재(天才)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김 박사는 농촌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고학생이었다. 고교 성적은 전교 200등 언저리였다. 대학 때도 공부보다 고아, 불우청소년 돕기에 푹 빠져 지냈다. 청소년기와 지금 모습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 9일 개원한‘이길여 암·당뇨연구소’의 김성진 소장은 미 국립보건원(NIH) 종신 수석연구원이었지만 조국에서 암과 당뇨의 완치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집무실은 김 소장 본인이 디자인한 것이며 김 소장의 오른쪽 뒤편에는 밤샘 연구를 할 때 가끔 눈을 붙이는 작은 방이 있다.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요즘 국민들은 과학자를 믿지 못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황우석 박사 사건이나 KAIST 교수의 가짜 불로약(不老藥) 사건 때문이겠죠.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한번쯤은 한국이 거쳐야 할 사건이었죠. 그 때문에 바이오 벤처 쪽이 침체된 것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암과 당뇨 치료 신약(新藥)을 만들겠다면 세상이 믿을까요.
"제 예상대로라면 4~5년 내에는 질환을 억제시킬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쩌다 우리 과학계의 신뢰가 이 지경이 됐을까요.
"바이오, 벤처 광풍이 불던 김대중 전(前) 대통령 시절 제가 한 신문에 기고했어요. 한국에 벤처기업가는 있는데 벤처 정신은 없다는 글이었어요. 벤처는 기술, 자본, 매니지먼트를 갖춰야 합니다. 한국은 매니지먼트도 없고 기술 평가 시스템도 없었어요. 벤처 정신은 없고 벤처 펀드만 있었죠."

―그런 위험을 알면서도 한국에 온 것 역시 벤처 정신입니까.
" 미국에서 고생할 때와 같은 마인드만 있으면 남이 못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이 나이에, 아이들도 다 키웠겠다 미국에서 교수 생활 편히 할 수도 있는데 왜 왔겠습니까. 두 가지 이유예요."

―그게 뭡니까.
"돈 있는 사람이나 대학도 이런 연구소를 한번 만들어 봐라,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야 한국 두뇌들이 외국에 가지 않고 한국에서 연구할 수 있잖아요. 두 번째는 이런 풍토에서 만들어보니 세계적인 약이 나오더라 하는 것도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야 다른 제약회사들도 기초연구를 중히 여길 것 아니겠습니까."

김 박사는 강원도의 명문(名門) 춘천고 출신이다. 홍천에서 태어났지만 춘성중에 진학하면서부터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자취는 고교, 대학에서 끝날 듯하다 일본과 미국 유학까지 이어졌다. 10대 중반에 시작된 그의 외출은 지난해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40년 만에 끝났다.

―어린 시절 수재였나요?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그랬죠. 고교 진학 후 사정이 바뀌었어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갑작스레 그런 일이 생기니 자격지심 같은 게 생겼어요. 중간성적(정원 480명)으로 졸업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수록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공부만 안 했다뿐이지 다른 건 열심히 했죠. YMCA 활동이라든가 남을 돕는 일에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김 박사는 강원대 농화학과에 진학했다. 학과는 친구 권유에 따라 결정했다고 했다. 대학에서도 그가 공부에 흥미를 붙이지 못하자 보다 못한 선배가 "영어만 잘하면 성공한다"고 했다. 인간의 운명은 이런 말 한마디에 종종 방향을 튼다.

―영어 공부를 어떻게 했습니까.
"그 시절에는 미국 평화봉사단이 각국에 파견됐잖아요. 옛 교육회관이 서울 광화문 근처였는데 한국어 강사로 1년 반을 일했죠. 저는 한글 가르치고 그들에게서 영어를 배웠습니다."

―1년 반 만에 영어가 확 늘었나요?
"그 정도는 아니고 심취(心醉)했다고 할까요. 그때 은인(恩人)이 나타났어요. 군의관 부인으로 춘천에 있었던 다이애나 태퍼라는 분이었죠. 1대1 교습도 해주고 제가 만든 영어회화 클럽도 지도해주셨죠. 나중에 세인트루이스대 교수를 지낸 분인데, 한 3년 열심히 하니 자신이 생겼어요."

―그렇게 영어를 잘했는데 왜 미국 대신 일본 쓰쿠바대로 갔습니까.
"두 가지 사정이 있었죠. 춘천 성심(聖心)여대 초빙교수였던 히로세 에이코라는 일본 수녀가 계셨는데 저를 쭉 지켜보셨대요. 제가 고아원 야학교사도 했고 경찰서에서 만든 소년범 야학교사도 했거든요. 그분께 미국 유학 이야기를 꺼내니 '남을 돕는 네 모습에 감명받았다. 내가 학비랑 생활비랑 다 준비해놨으니 일본으로 가자'는 겁니다."

―수녀가 무슨 돈이 있었을까요.
"일본 성심여대가 굉장한 귀족(貴族)학교입니다. 수녀님이 여대 동창회보에 제 이야기를 썼대요. 그 글을 읽고 대학총장, 유명 정치가 부인들까지 '김성진군을 일본으로 데려오라'며 거액을 쾌척했다는 겁니다. 쓰쿠바대, 도쿄대, 규슈대에서는 입학허가까지 내줬죠."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했을 텐데요.
"수녀님 말을 듣고부터 공부했어요. 제가 뭘 배울 때는 낯을 가리지 않습니다. 1주일에 두 번 성심여대 수위실에서 기다리면 수녀님이 저를 안으로 데리고 가 일어를 가르쳐줬죠."

―일본 성심여대는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아사코가 다닌 학교잖아요.
"그렇습니까?"

―두번째 이유는 뭡니까.
"제가 YMCA 활동할 때 일본YMCA대표단 25명이 한국에 왔어요. 도쿄대 불문과 여학생과 3주간 짝이 됐죠. 그 뒤로도 펜팔을 했는데 어느 날 그녀가 프러포즈를 해왔어요."

―기분이 좋았겠군요.
"군 입대 중일 때여서 결혼 생각은 못했고요. 3학년에 복학한 후 수녀님께 상담했죠. 그분은 상의해보라며 당시 춘천도립병원 피부과 과장 부부를 소개해줬습니다. 그 커플도 한국인 남편, 일본인 아내였거든요."

―그분이 일본 여학생과 인연을 이어가는 데 도움을 줬나요.
"웬걸요. 그 부인이 일본 가서 제 여자친구를 만나 한국에서 사는 것이 안 좋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여학생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죠."

―아주 고약한 사람이군요.
"그 의사 부부도 아이 낳은 뒤 한국에서 왕따를 당했대요. 이해할 만하죠. 나중에 그분들은 미국 하와이대에서 공부하러 떠났죠. 그분들이 누구인 줄 아세요? 2006년 작고한 이종욱 전(前)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입니다." 
 

―부인(유영원·50)이 임상심리를 전공하셨다는데 일본 여학생과의 로맨스를 묻지는 않던가요.
"다 아는 것 같은데 제게 직접 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차별받지는 않았나요.
"영어 덕을 일본에서도 봤어요. 입학시험에서 1등한 것도 전공보다는 영어에서 월등한 점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5년10개월 만에 혈압을 조절하는 '레닌(Renin)'이라는 물질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때 한국에 돌아올 생각은 없었나요.
"쓰쿠바대 졸업 후 한국 대학 2곳에서 교수 자리를 제의했어요. 돌아오려 했었죠. 그런데 욕심이 생기는 겁니다. 박사라지만 학문의 본산인 미국에서도 평가 받고 싶어서 2년 계획으로 미국 NIH행을 결정하게 된 겁니다."

김성진 박사는 일본에서 차별보다는 우대를 받았다. 히로세 수녀가 모금한 돈은 몇백만 엔 수준이었다. 낯모르는 사람이 어느 날 불러내 "공부에 쓰라"며 10만 엔을 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히로세 수녀는 그에게 '어머니'나 다름없었다. 사망 직전 히로세 수녀는 김 박사 부부를 불러 유언(遺言)을 남겼다. 수녀는 "자네 부부가 딸만 하나 뒀는데 미국 가면 아이 하나 더 낳으라"고 했다. 세상에 달랑 아이 하나 남겨놓는 것은 나쁘다는 말에 김 박사 부부는 미국에서 둘째 딸을 가졌다.

수녀는 이런 말도 했다."한국도 잘 알고 일본서도 공부했으니 미국이 좋다고 눌러앉지 말고 꼭 조국에 돌아와 한일관계를 좋게 만드는 가교(架橋) 역할을 하라." 훗날 만난 이길여 회장이 수녀와 비슷한 말을 했을 때 김 박사는 "운명이란 걸 느꼈다"고 했다.

―99년에 미국 NIH를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규모나 시설이 부러울 정도였습니다. 세계 최고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NIH에서 스승은 누구였나요.
"마이클 스폰과 애니타 로버츠였습니다. 스폰 박사는 유대인이었는데 암 예방 분야의 권위자로 지금 다트머스대 석좌교수입니다. 애니타 로버츠는 몇 년 전 암으로 돌아가셨죠."

―미국 생활은 일본과 또 달랐겠죠.
"미국 가서 첫 3년 동안 굉장히 고생했습니다. 연구원들이 대부분 하버드 예일 출신이고, 저를 보면서 '저 친구 제대로 할까'하고 의심하는 것 같더라고요. 저로서는 한정된 몇 년 안에 제 능력을 입증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요."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그 친구들과 경쟁하려면 제가 1.5배에서 2배는 일을 더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년간 하루 4시간 이상 잔 적이 없어요. 일요일도 연구실에서 보냈습니다. 1년 동안은 거의 쓸 만한 데이터가 안 나왔는데 그 뒤 결과가 쏟아졌습니다. 비로소 스승이 "조교수 자리를 줄 테니 미국에 남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더군요. 미국에 87년에 가서 94년에 종신 수석 연구원이 됐습니다."

▲ 김성진 소장이 연구소 내 동물 실험실로 안내하며“예정대로라면 4~5년 내에는 암과 당뇨 질환을 억제시킬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최순호 기자
―승승장구하니 동료들이 인정을 해주던가요?
"말하기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냉장고에 보관된 시료(試料)를 훔쳐간 뒤 제가 했다고 투서하고, 스폰 박사가 자기가 해고하라고 지시한 연구원을 제가 실제로 해고하려 하자 입장을 바꾼 적도 있어요. 그때 난생처음 언성 높여 싸우기도 했습니다."

―혼자 이겨내기 힘든 싸움이었을 것 같은데요.
"애니타가 많이 도와줬어요. 투서(投書)에 대해서는 직접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위원회라는 완충장치를 만들어 저를 보호했어요. 연구원 해고 건도 사실 그 연구원이 스폰 박사를 만나 눈물로 하소연하자 생긴 일인데 애니타가 제 편을 들어주더군요. 스폰 박사가 다혈질에 독재하는 스타일인데 하급자에게 뜻을 굽힌 건 그때가 처음이라더군요."

―그렇게 받은 스트레스는 어떻게 풉니까.
"스트레스를 그다지 받는 성격은 아닙니다. 제가 담배는 안 하고 술은 위스키를 물에 타 3분의 1잔 정도 마십니다. 대신 지구력을 요하는 스포츠는 다 좋아합니다. 수영도 좋아하고 마라톤은 다리 다치기 전까지 3시간 초반까지 기록해봤습니다."

여동생부터 영어를 가르쳐준 미군 군의관 아내, 일본 수녀, 미국 NIH의 과학자는 김성진의 인생 고비마다 나타났다. 기자는 이 순간부터 그의 얼굴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조용하지만 집요한 성격인 과학자의 어디에 그런 여복(女福)이 숨어있는가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김 박사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SCI)만 192편입니다. 암 성장을 억제한다는 TGF-β라는 게 뭡니까.
"우리 몸의 세포가 증식하거나 염증을 만드는 데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성장조절인자이기도 하죠. 1983년에 처음 TGF-β의 존재를 밝혀낸 건 제 스승인 스폰 박사입니다."

―김 박사는 TGF-β의 어떤 부분을 밝혀낸 겁니까.
"저는 TGF-β 수용체의 양(量)이 줄어들면 암과 각종 염증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걸 입증했습니다. TGF-β의 신호전달과정이 잘못되면 암세포의 증식을 억제할 수 없게 됩니다."

― TGF-β의 수용체를 마음대로 조작하는 물질을 개발하면 암이나 각종 염증성 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뜻입니다. 제가 연구하는 것이라 이런 말 하기가 그렇지만 요즘 의학계의 화두는 '모든 길은 TGF-β로 통한다'는 겁니다. 세포를 성장시키는 물질은 많은데 억제시키는 물질은 희소하거든요. TGF-β가 그런 물질입니다."

―농화학에서 응용생화학으로 학위를 했고 암 연구를 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놀라운 발견이군요. 작년 3월에도 중요한 발견을 했죠?
"'Smad7'이라는 단백질이 류머티즘, 아토피, 알레르기, 천식 같은 면역성 질환의 염증신호를 차단하는 중요한 열쇠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현재 세계의 당뇨 환자는 2억4600만 명이다. 2025년에는 3억8000만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여기에 암 환자를 합치면 전 세계 인구의 10%이다. 그렇다면 이 50대가 그들의 구세주란 말인가?

이길여 회장이 암·당뇨 연구소장 자리를 제의하며 진짜로 백지수표를 내민 겁니까? 당시 얼마를 적어냈나요. 
"진짜 수표가 아니고 A4용지에 원하는 걸 적어낸 겁니다. 원하는 대로 사람 모으고 연구 테마도 원하는 걸로 시작해 세계 최고의 연구소 한번 만들어보라고 했거든요. 이 회장은 2005년 10월 시카고에서 처음 만났어요. 시카고 공항 내 호텔에서 하루 종일 이야기하며 열정을 느꼈습니다."

―과거에도 그런 약속 받고 한국에 왔다 실망해 되돌아간 분이 있죠.
"있었죠. 저도 귀국할 때 '조심하라'는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며칠 만에 결심을 한 겁니까.
"결정하는 순간이 길지는 않았어요. 제 NIH 연구실에 많은 한국 분들도 다녀갔고 수녀님이 남긴 말씀도 생각났고, 그래서 완벽한 시간표구나 하고 결심했습니다. 이 회장이 '조국을 위해, 조국의 과학발전을 위해'라고 할 때 마음을 굳혔어요."

―암과 당뇨를 전부 맡게 됐는데 자신 있나요.
"저는 암, 당뇨는 시카고대 당뇨연구소장을 지내고 조선대에 와있었던 윤지원 박사가 맡기로 했었죠. 윤 박사와 제가 2006년부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연구소 만들 구상을 했는데 그만 그해 4월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이번에 1형 당뇨를 연구할 전희숙 박사가 윤 박사의 수제자입니다. 전 박사는 '고국으로 돌아오라'는 윤 박사의 유언에 따라 함께 일하게 된 겁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김 박사는 연구소를 안내했다. 다 훌륭했지만 가장 눈에 띈 것은 그의 집무실 뒤 편에 붙은 작은 방이었다. 밤샘 연구를 하다 지치면 침대 한칸에 옷걸이 하나, 작은 냉장고 하나 덜렁 놓인 방에 그는 몸을 누인다고 했다.

사족(蛇足)-김 박사를 신주쿠에서 8시간 바람맞힌 도쿄대생은 얼마 뒤 한 달에 한 번씩 나타나 "아버지로부터 함께 미국에 가면 결혼을 승낙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고 졸랐다. 그러나 앞으로 공부만 하겠다는 김 박사의 '신주쿠 결심'은 그 뒤 한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문갑식 gsmoon@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