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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가 곧 운영자 '생활공동체' 생협의 철학

전동키호테 2005. 10. 27. 16:02
원가 100% 공개하는 '가게'

[소비하지 않아도 잘살 수 있다]소비자가 곧 운영자 '생활공동체' 생협의 철학

미디어다음 / 심규진 기자


소비하지 않고도 잘살 수 있다






“면생리대, 친환경 농산물, 천연 화장품을 쓰라고요? 백화점이나 인터넷 쇼핑몰에서 고가에 팔리는 이른바 ‘웰빙’ 상품들이잖아요. 돈 없으면 몸도 환경도 못 지키는 세상이에요.”
도시근로자들은 면생리대와 천연화장품 얘기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출퇴근에만 몇 시간씩 걸리는 교통지옥, 촌각을 다투는 일터에서의 경쟁, 빠듯한 생활비 지출 목록 속에서 도시인들은 생필품을 직접 만들어 쓸 시간도, 값비싼 유기농산물을 사 먹을 여유도 찾지 못한다. 이들에게 ‘웰빙’이나 참살이는 여유 있는 사람들의 사치스러운 관념일 뿐이다. 과연 참살이 열풍은 ‘녹색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시장에 종속될 뿐, 우리 삶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실천적인 철학이 되기는 힘든 것일까.
그러나 ‘참살이’ 열풍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결코 고소득자거나 시간이 많은 주부들 만이 아니다. 각자의 일터에서 바쁜 맞벌이 부부들도, 가계 소득이 넉넉지 않은 저소득 가정의 주부들도 노동에 투자할 수 있는 여유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노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친환경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친환경 농산물인데도 비싸지 않은 이유. 비영리조직, 마진공개, 생산자 직거래 때문”


주부 구경희씨는 집근처 생협매장에서 거의 모든 생활재들을 공급받는다.

여성민우회생협의 조합원인 구경자씨(35. 교사)는 지역 생협 매장에서 친환경상품을 공급받는다.
“유기농산물이나 친환경 농산물을 먹는다고 하면 주위에서 ‘너 돈 많나 보다’ 그래요. 하지만 생협 물건들은 시중가와 별로 차이가 없고, 오히려 더 쌀 때도 있어요.”
천연화장품, 면생리대, 친환경 농산물 등은 백화점이나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하면 몇 배나 비싼 값을 치러야 하지만 생협의 물건들은 시장보다 그리 비싸지 않다. 면생리대나 천연 화장품의 가격은 인터넷 쇼핑몰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재료 가격이 비싼 것은 물론 사람의 노동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물건에 비해 2~3배 이상 비싼 천연제품들. 생협에서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투명하게 생산과정을 공개하라

여성민우회생협 허경희 과장은 “시장에서는 여러 단계씩 유통망을 거치는데다 외부적인 요인에 따라 가격 탄력성이 크지만, 생협은 직거래인 계약 재배나 계약 생산을 통해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으며, 생산단가와 마진이 투명해 특정 개인에게 큰 이익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성민우회생협이 생산자를 고르는 제1의 기준은 바로 ‘생산과정을 조합원들에게 투명하게 밝힐 수 있느냐’이다.
“저희는 생산자를 선정할 때 가격 경쟁력보다도 ‘얼마나 투명하게 생산 과정이나 제품 단가 등을 공개할 수 있느냐’를 고려합니다. 생활재를 담당하는 대의원들이 직접 산지를 방문해서 제조 과정을 꼼꼼히 살핍니다. 생산자가 농약을 친다면 왜 쳐야 하는 건지, 음식에 첨가물을 넣는다면 불가피한 이유가 있는 건지 밝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조합에 물건을 공급할 수 없지요. 그 후 생산자가 제시한 가격이 타당하다면 받아들이고 대의원들이 판단하기에 가격에 문제가 있다면 협의에 들어갑니다.”
조합원들은 단순히 수동적 소비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생산과정에 참여하고 품질이나 맛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시한다.
두레생협연합회(구 생협수도권연합회)의 경우 처음 장애인복지단체에서 운영하는 한 과자 공장을 생산자로 선택했을 때, 물건의 질이나 맛이 모두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두레생협연합회 김창근 부장은 “처음엔 생산자가 식품 첨가물도 많이 사용했었는데, 조합원들이 첨가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했고, 생산자가 이를 받아들여 이제는 첨가물이 거의 없는 과자를 공급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대기업들은 애초부터 생협에 물품을 공급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대기업에게 제조방법은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노하우’이기 때문에 외부에 철저히 감춰야 할 것들이다. 어떻게든 제조 방법과 단가를 숨겨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자본의 논리와 투명성을 중요시하는 생협의 철학은 처음부터 정반대 지점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비영리단체로 운영, 마진율도 총회에서 결정
많이 팔린다고 특정인이 부자 되지 않아



생협은 생산자와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믿을 수 있는 생산재를 조합원들에게 공급한다.[사진제공=두레생협연합회]

‘남는 것 하나 없는 밑지는 장삽니다.’
장사꾼의 이 말은 거짓말 중에서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진율을 100% 공개하는 가게는 불가능하지 않다. 만약 소비자가 직접 중간 거래상이 된다면 말이다.
생협이 생산 과정과 품질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면서도 가격 경쟁력을 잃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비영리단체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판매자의 이윤이 일정하게 보장돼야만 거래가 이뤄지고 여러 단계의 중간 유통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산지 가격보다 몇 배의 가격이 더해질 수밖에 없다.
많이 팔릴수록 판매자의 이익이 많아지는 시장과 달리, 조합원들이 출자해 비영리로 운영되는 생협에서는 물건이 많이 팔린다고 해서 특정한 개인이 부자가 되지 않는다. 생협은 조합원들의 소액 출자로 운영되며, 잉여이익이 발생할 경우 출자액에 따라 이익금이 배당된다.
따라서 운영자이면서 소비자이기도 한 조합원들의 관심은 ‘많이 파는 것’보다는 ‘제대로 중계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조합의 운영비 조달을 위한 판매 마진율은 조합원 총회를 통해 결정된다.
여성민우회생협은 물건가격의 21%, 두레생협연합회의 경우 23%의 마진율로 조합원들에게 생활재를 공급한다.

생산자와의 유기적인 신뢰 관계, 판로와 가격 모두 안정시켜


산지견학을 하며 자신이 먹을 농산물의 생산 과정을 학습하는 조합원들 [사진제공=여성민우회생협]

생산자와 조합원의 유기적인 관계 또한 가격을 낮추는 데 일조한다. 생협은 생산자와 직거래를 하고, 수요를 정확히 예측해 계약 재배를 하기 때문에 가격이 투명하고 안정적이다.
생산자들 입장에서는 일반적인 시장에 물품을 공급하는 것과 조합에 공급하는 것에 큰 가격 차이는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장에서는 다른 물건들과의 ‘경쟁’을 통해 물건을 팔지만 생협에 물건을 공급할 때는 계약 재배와 생산을 통해 안정된 가격과 판매량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생산자에게나 조합원들에게나 모두 이득이 되는 ‘윈-윈 모델’이다. 예를 들어 최근 김치 파동으로 시장에서는 배추값이 폭등했지만 조합원들은 이미 계약을 맺은 농가를 통해 안전한 배추를 미리 협의한 가격에 공급받을 수 있다. 시장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생산자와 조합원의 유기적인 관계 맺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생산자와 수요자가 조합원들의 수요를 미리 예측해 공급량을 결정하기 때문에 조합이나 생산자나 물건을 팔지 못해 손해를 보는 일이 없지요. 또 홍수나 가뭄으로 생산량에 큰 변동이 있을 때는 생산자와 대의원들이 가격 협의를 해서 가격을 조정하기도 합니다.”(여성민우회생협 허경희 과장)
생협을 통해 맺은 관계 속에서 생산자는 안정적인 판로를, 소비자들은 안전한 생활재를 얻게 된다. 이렇게 신뢰관계가 구축되면 생산자들은 가격경쟁력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좋은 물건을 소신껏 생산할 수있다.
여성민우회생협에 친환경 농작물을 공급하는 풀무생협의 단재용씨는 “농약을 치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농작물의 상품성이 떨어지게 된다. 상품성이 떨어지면 경매 시장에 나가 좋은 값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제값을 받으려면 농약을 많이 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산지 견학을 통해 농약을 쓰지 않는 제품이 생산되는 과정을 확인하고, 우리 물건을 신뢰해 준다. 그래서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 없이 환경에 좋은 농작물을 생산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두레생협연합회에 친환경 고구마를 공급하고 있는 신대교씨는 “4년전만 해도 많은 농약을 치며 고구마를 생산했지만 조합원들이 점차적으로 농약을 줄여줄 것을 요구했고 드디어 2년 전부터는 무농약 재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가 땅의 체질을 바꾸기 위해 고구마 농사를 쉬고 땅콩을 재배했을 때, 조합원들은 기꺼이 땅콩을 구매해주어 김씨의 친환경영농을 물밑 지원했다.

더 작게, 투명하게…생협의 철학

거대자본이 운영하는 유통산업은 전국 각지에 지점을 내고 '몸집’을 최대한으로 불려 ‘규모의 경제’를 추구한다. 반대로 생협은 가능한 한 ‘작은 것’을 추구한다. 두레생협연합회의 연간 매출은 생산지 출고 기준 연간 매출 200억, 여성민우회생협은 전국 7개 지부의 연간 매출이 60억원 정도로 일개 대형마트의 월 매출에 비견될 만큼 규모가 크지 않다.
그럼에도 민우회생협 중 가장 활동이 활발한 동북여성민우회생협 등은 내달 중 중앙조직에서 독립해 단독법인으로 분가할 예정이다. 생협의 단위가 작을수록 조합원들의 참여와 관심이 높아지게 되고, 조직의 의사결정이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생협의 철학은 더 많은 이윤이 아닌 더 많은 참여와 자치입니다. 때문에 중앙 조직이 곳곳에 지점을 내서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몸집을 불리는 것이 아니라, 운영 초기 시행착오가 끝나고 생협 운영이 활성화되면 분가를 시키는 것이지요. 생협의 운영은 지역사회와 함께 맞물려야 하고, 지역사회의 구성원들이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가져야하기 때문이죠.”(동북여성민우회 심화란 간사)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이 고용도 창출
자본경쟁력 없는 소규모제조업체, 가내수공업, 민중교역까지 활성화



두레생협연합회는 민중교역의 일환으로 필리핀 네그로스 지역과 재래식 설탕을 교류하고 있다.[사진제공=두레생협연합회]

기업은 고용창출을 함으로써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 더 많은 부를 창출하겠다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구가 소비를 발생시키고, 잉여 자본은 고용을 창출함으로써 사회 발전의 선순환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영리 조직으로 운영되는 단위 생협들은 생산자와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생산자에게 안정적인 판로를 공급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한편, 고용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근로취약계층의 고용을 돕는 복지적인 기능까지 담당하기도 한다.
면생리대쓰기 운동을 보급했던 여성주의자들의 모임 ‘피자매연대’는 자활을 꿈꾸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면생리대 생산을 맡겨 이들의 고용과 자활을 도왔다. 느림씨는 “대규모 생산업체에서 면생리대 생산을 맡겨달라고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판매수익금은 사회단체에 기부하고 있다”고 말한다.
동북여성민우회 심화란 간사는 “면생리대를 소규모 공장에 맞겨서 위탁 생산하고 있는데, 큰 자본을 투자해 기업적으로 운영되는 곳은 아니다”고 말했다. 여성단체나 지역 생협들이 하고 있는 만들어쓰기 운동은 주부나 장애인들이 큰 자본이 없이 할 수 있는 가내수공업을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수도권 지역 생협들은 또 장애인복지시설에서 운영하는 과자 공장에 생산을 의뢰하고 있기도 하다.
두레생협연합회의 경우, 필리핀 네그로스 지역과 민중교역(people to people trade)을 하기도 한다. 유통업자에 의해 좌우되는 국제 무역 질서를 거부하고 직접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맞대는 거래를 통해 필리핀의 재래식 설탕인 마스코바도 설탕을 교류하기로 한 것이다. 이 같은 민중교역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제 3세계 노동자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고, 자본의 파괴행위로부터 천연자연을 보호하는 지역생명운동이기도 하다.
박경진 두레생협연합회 간사는 “생협은 단순히 가격경쟁력이나 품질의 우수성만을 따져 생산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의 고용창출을 돕고 전 지구의 환경을 위한다는 생협의 가치를 조합원들의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실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도현/사랑했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