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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에서 순천만으로 이어진 남도여행

전동키호테 2010. 12. 1. 13:02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에서 순천만으로 이어진 남도여행

 


2010년 11월27일 토요일 오전 9시41분
겨울을 코 앞에 둔 가을의 끝자락에 시작된 남도여행의 첫발을 내디딘 곳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학동리 578-4 가 행정구역상 지번인
메타세콰이어가로수길에 들어섰다.

이곳 담양의 경우 1972년 전국적인 가로수 조성사업시
내무부의 시범지역으로 선정된 때문에 3~4년생 묘목을 가져다 심게되었고,
좋은 토양과 알맞은 기후 아래 매년 1m씩 자라나서
불과 30 여년 후 오늘과 같은 즐거움을 우리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1940년대까지는 화석으로만 존재하던 메타세콰이어 나무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 1945년 중국 사천성 양자강 유역 마도계(磨刀溪)에서였다.

가로수길의 총 길이는 약 8.5km로 옛 24번 국도 바로 옆으로 새롭게 국도가 뚫리면서
이 길은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도로가 되었다.
산림청과 생명의숲가꾸기운동본부 등에서 주관한 ‘2002 아름다운 거리숲’ 대상을 수상했고,
2006년 건설교통부 선정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의 최우수상을 수상한 길이다.

2주 전인 11월13일 늦은 오후에 이곳에 들렀을 때는
수많은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이곳.
1년에 몇차례씩 들리는 곳이지만
오전 시간의 한적함이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다.
연인끼리 자전거를 타거나 가족 단위로 여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지금 내가 같이하는 이 아름다운 곳에 겨울철 흰눈이 내려 앉으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며,
40여년 전 중학생 시절 쓰던 흑백 필름의 무채색의 추억을 떠올리며 흑백으로 셧터를 눌러 본다.
아마 겨울철에도 느낌은 좀 다를지언정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리라는 확신을 안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한다.

오전 11시22분
전남 순천시 승주읍(昇州邑) 죽학리 조계산(曹溪山) 동쪽 기슭에 자리한
선암사를 향해 가는 길
길 옆으로 흐르는 선암사골의 물줄기가 무척이나 깨끗해 보인다.
빗방울이 간간히 뿌리는 날씨이지만 빗방울이 먼지를 씻어주어서인지 공기는 더 맑고 깨끗한듯하다.

지난 주 일요일인 11월21일 이곳 조계산 서쪽에 자리한 송광사에서 시작하여 이곳 선암사쪽으로 이어진 산행시 다음 행선지로 향할 시간 제약으로 인해 선암사 경내를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오늘은 시간 여유를 가지고 선암사 경내를 둘러볼 예정이다. 2시간 반의 여유가 있으니 느림의 미학을 즐겨볼 수도 있으리라.

오전 11시26분
이곳 선암사 입구에서부터 조계산 을 가로질러 서쪽의 송광사로 이어지는 길은
'순천 남도 삼백리길 천년불심길'이라 명명되어 있다.
선암사로 향하던 길에서 벗어나 '순천전통야생차체험관'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담장보다 두배는 높이 솟은 솟을대문 앞뜰에 솟대가 세워져 있다.

'솟대'란 민간신앙의 목적 또는 경사시 축하의 뜻으로 세우는 긴 대를 말한다.
삼한(三韓)시대에 신을 모시던 장소인 소도(蘇塗)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소도에 세우는 솟대[立木]가 그것이며,
소도라는 발음 자체도 솟대의 음이 변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곳에서는 각종 야생차에 대한 다례체험을 할 수 있으며
하루를 묵으며 야생차와 함께 피로를 풀 수도 있다.
다례체험은 1인 2,000원.
숙박의 경우 가족실 50,000원부터 단체실 150,000원까지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규칙적인 세끼 식사,숙면,쾌변의 3가지를 건강의 지표로 삼는 나는
하루 세끼 식사 및 커피 외에는 일체의 간식은 않기에 다례체험은 건너 뛴다.

오전 11시38분
지난 11월21일에 사진을 찍었던 그 장소에서 다시 셔터를 누른다.
승선교 아래 계곡물에 비친 강선루의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드는 곳이다.
보물 제400호인 이 승선교(昇仙橋)는 화강암으로 된 한 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승선교의 치석(治石)과 홍예의 결구(結構)가 벌교 홍교의 것보다 고식(古式)을 띠고 있으며,
그 구조도 웅장한 점으로 보아 영조(英祖) 때 조성하였다는 벌교 홍교보다 조성연대가 앞선다고들 한다.

강선루(降仙樓)는 선암사의 문루(門樓) 역할을 하는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이다.
대부분의 사찰은 누문을 일주문 안쪽에 두는 데 반해
선암사의 경우 누문을 일주문 밖에 두어 계곡과 어울리도록 한 것이 이채롭다.

오전 11시43분
전라남도기념물 제46호인 '선암사 삼인당[仙巖寺三印塘]'앞을 지난다.
862년(신라 제48대 경문왕 2년) 도선(道詵:827~898)이 축조한 장타원형의 연못인데,
이 안에 섬이 조성되어 있다.

연못 안에 있는 섬은 ‘자이이타(自利利他)’, 즉 남을 이롭게 하면 자신이 잘 된다.
밖의 장타원형은 ‘자각각타(自覺覺他)’,즉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한다.
이는 불교의 대의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연못의 명칭에서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精印)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사상을 나타낸다.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연못 양식으로,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한다.

오전 11시51분
조계산 서쪽의 송광사 일주문의 이름과 같은 '조계문'으로도 불리는
선암사 일주문 앞이다.
단층 맞배지붕으로 외 4출목으로 된 다포식 양식이다.
마치 대갓집의 솟을대문 처럼 양쪽으로 담장이 연결된 것이 특이하다.
경내로 들어가야 보이는 일주문 뒷편에는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선암사 및 조계산의 옛 이름을 알려 준다.

대웅전 앞 뜰에는 동탑,서탑 두개의 삼층석탑이 있다.
그런데, 그 앞에서는 한창 무슨 행사가 진행중이다.
말 그대로 '야단법석'이다.
혹자는 내가 지금 '야단법석'이라 표현한 것에 대해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야단법석[野壇法席]"은 불교대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이란 뜻이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다.
즉,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뜻이다.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하게 된다.
이처럼 경황이 없고 시끌벅적한 상태를 가리켜 비유적으로 쓰이던 말이
일반화되어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게 되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다포식의 팔작지붕 구조이다.
내부의 주불은 석가모니불을 모셨고 후불탱화에는 영산회상도를 모셨다.
정유재란 이전에는 이 자리에 2층의 미륵전이 있었다 한다.
여러차례의 중건 등을 거치며 한 때는 폐사되기도 했던 이곳 선암사.
지금 이 대웅전 건물은 1824년(순조 24년) 해붕(海鵬)이 다시 중창하였다 한다.

낮 12시3분
대웅전과 좀 거리를 둔 원통전 뒷편의 천연기념물 제488호인
'순천 선암사 선암매(順天 仙岩寺 仙巖梅)'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이 백매화와 각황전 담길의 홍매화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이라 한다.
수령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약 600여년 전 천불전 앞의 와송과 함께 심어졌다고 전해 진다.

낮 12시9분
이곳 선암사의 산내 암자는 대각암,운수암,대승암 등 여러곳이 있다.
그 중 운수암으로 향하는 숲길을 잠시 거닐어 본다.
낮게 구름이 드리운 흐린 날씨이어서인지 사방이 적막강산이다.
아늑하다.

사철 푸른 대나무,소나무의 빛깔이 길가에 떨어져 쌓인 낙엽과 대비되어
그 푸르름이 빛나는 숲길.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쓸린 은행잎이 가장자리로 몰린 곳
아직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고 붉은 빛을 뽐내는 저 단풍나무는
아마도 장성 백양사와 순창 강천사에서 본 애기단풍과 같은 종류인듯 하다.

선암사 뒷편 야트막한 언덕에서 선암사쪽을 내려다 본다.
무척 아늑한 곳에 자리 잡았다.
조계산의 동쪽에 자리한 태고총림(太古叢林)인 선암사(仙巖寺).
선암사는 542년(진흥왕 3년) 아도(阿道)가 비로암(毘盧庵)으로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875년(헌강왕 5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라고 이름 붙였다고도 한다.
선종(禪宗)·교종(敎宗) 양파의 대표적 가람으로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송광사(松廣寺)와 쌍벽을 이루었던 수련도량(修鍊道場)으로 유명하다.

낮 12시25분
선암사 경내를 벗어나기 전 잠깐 들린 선암사 경내의 화장실 모습이다.
이곳은 내가 정호승 시인의 시를 통해 처음 접했던 곳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낮 12시52분
일주문 바깥 길가에 외로이 서 있는 고목나무 한 그루
500년이 넘은 나무라는데
내 키의 두배는 됨직한 고목나무의 빈틈마다 동전이 촘촘이 박혀있다.

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 본다.
주로 100원짜리인 동전이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저 동전들을 꽂거나 혹은 올려 놓은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소원이
좀 더 많이 이루어졌으면 싶다.

오후 2시3분
세번째 행선지인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남내리의
'낙안읍성민속마을'로 들어가기 위해
성곽 동쪽에 위치한 문루인 낙풍루(樂豊樓)로 들어선다.
1834년(순조4년) 성균관 진사 김호언이 사비 1,400량을 들여
중건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졌으나 낙안읍성 복원 사업이 추진되면서 1987년에 복원하였다.

지난 1983년 사적302호로 지정된 이곳 낙안읍성은
넓은 평야지대에 쌓은 총길이 1,420m, 높이 4m, 너비 3~4m의 네모형 석성으로
1~2m 크기의 정사각형 자연석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아 끊어진 곳이 없이 웅장하다.
1397년(태조 6년) 일본군이 침입하자 김빈길이 의병을 일으켜 처음 토성을 쌓았고,
1626년(인조 4년) 임경업이 낙안군수로 부임했을 때 현재의 석성으로 중수하였다 한다.
동내, 서내, 남내 등 3개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전남기념물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총 15주의 노거수(老巨樹)중 하나의 모습이다.
낙안성내에는 팽나무,푸조나무,개서어나무,느티나무,은행나무 등 15주의 노거수가 자라고 있는데
수령은 대략 100~400년으로 추정되며 방풍,또는 차폐 목적으로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후 2시19분
사무당(使無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동헌 앞뜰에서 잠시 멈춘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지방관청으로 감사,병사,수사,수령 등이 지방행정과 송사를 다루던 곳이다.
송사,죄인 문초 장면 등을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볼기를 맞는 죄인의 형상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곳.
이 장소는 방문객들이 추억남기기를 하는 명소인지라 사람을 피해 사진 찍기가 무척 힘들다.
순간적으로 사람을 피해 200mm 망원렌즈로 겨우 셧터를 누르고 자리를 뜬다.

동헌 앞 길가에 서 있는 낙민루(樂民樓)쪽의 풍경이 아름답다.
겨울철 눈이 하얗게 쌓였을 때의 풍경이 기대되는 곳이다.
낙민루는 조선 헌종때 군수 민중헌(閔重憲 1845∼1846)이 중건하였으며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 알려졌으나 6.25때 소실된 후 그 자리에 1986년 다시 지은 것이다.

서문쪽에서 성벽 위로 올라 남문쪽으로는 성벽 위로 걸음을 이어간다.
한쪽으로는 대나무숲이 우거진 흙길을 밟고 지나는
기분 좋은 길이다.

오후 2시30분
성곽 위 남서쪽 모퉁이에서 낙아읍성 내를 내려다 본다.
마을은 옛 모습 그대로를 지키고 있는 전통마을로 108세대가 실제로 생활하고 있어

남부지방 특유의 주거양식을 볼 수 있으며 부엌, 토방, 툇마루 등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번식기에는 깊은 산속에서만 볼 수 있는 우리나라 텃새인 딱새가 눈에 띈다.
곤충 이외에 식물의 씨앗이나 열매도 먹는 이 딱새가 인가 근처에서 보이는 것을 보니

겨울이 가까이 오기는 했나보다.

감나무 가지에는 이미 홍시가 다 된 감들이
간혹 한방울씩 내리는 빗방을을 잔뜩 머금고 예쁜척 한다.
감나무의 감을 다 따지 않고 조금 남겨둠으로써 먹이가 귀한 겨울철
야생 조류들의 먹이를 제공하는 조상들의 따뜻한 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오후 2시43분
성곽 위에서 내려와 마을을 가로 지른다.
그냥 눈으로 보기에도 무척 견고해 보이는 담장 저 멀리로는
오래된 초가지붕의 짚단을 새것으로 바꾸느라 분주한 주민들의 모습도 여러곳에서 눈에 띈다.

초가지붕을 둘러싼 낮은 돌담의 담쟁이 덩굴.
감나무에 빨갛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평화로운 이 모습
주말마다 여행이나 산행을 떠나며 기대하는 풍경이 바로 이런 것이다.

유난히 가족단위 행락객이 많은 이곳 낙안읍성의 모습이다.
정든 고향집을 떠나 인천시내의 찜질방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연평도 주민들이 하루빨리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가 가족들과 더불어 편안한 삶을 이어가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이곳 낙안읍성 내 어느곳에서나 북서쪽의 금전산(金錢山)이 뚜렷이 보인다.
호남정맥 남쪽에서 특히 우뚝한 산봉인 조계산에서 뻗어나온 한 지맥이
남쪽으로 흘러내리며 고동산을 거쳐 일으킨 바위 산이다.
이 금전산의 옛이름은 쇠산이었으나 100여 년 전 금전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자의 뜻을 그대로 번역하면 금으로 된 돈 산이다.
그러나 실은 불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부처의 뛰어난 제자들인 오백비구(혹은 오백나한)중
금전비구에서 산 이름을 따왔다"고 불가에서는 얘기한다.

그 금전산이 바라보이는 노거수 아래 자그마한 밭에
목화 열매가 터지고 그 안에서 하얀 솜털이 완연히 드러났다.

목화를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 본다.
목화는 무궁화과에 속하는 열대성작물이다.
열대지방에서는 방치하면 다년생목본이 되나 온대지방에서는 한해살이풀이 된다.
10월에 열매가 익는데 열매인 삭과는 포로 싸여 있으며 그 열매가 5갈래로 터지면서

그 안에서 씨앗과 씨앗을 싸고있는 흰 솜털이 드러난다.

오후 3시53분
오늘 여행의 마지막 여정인 전남 순천시 대대동의 '순천만자연생태공원'에 도착해
갈대숲 속으로 뛰어든다. 불과 6일 전인 11월21일 늦은 오후에 잠시 들렀던 곳이건만 매일 찾아도 싫증이 나지 않을듯한 정경이다. 자연생태관을 지나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 이름을 딴 '무진교'를 건너 갈대밭으로 향하는 인파가 줄을 잇는다.

1964년 발표된 소설가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 " 을 통해
처음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순천만,
소설속의 무대인 대대포구가 바로 이곳이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
작가는 소설속에서 이곳의 안개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 이후로 대대포구의 아침안개는 유명해졌고,
더불어 순천만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면서 갯벌과 갈대밭,
포구를 모두 만날 수 있는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곳 약 30만평의 갈대군락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고,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오후 4시2분
갈대밭 가장자리의 농주마을 부근에서 출렁다리를 지나 용산전망대로 향한다.
지난 번 방문시에는 시간 제약으로 인해 용산전망대에 들리지 못했지만
오늘은 용산전망대에서 순천만 갯벌의 장관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자연생태관에서 용산전망대까지 거리는 2.6km이다.

오후 4시12분
야트막한 야산을 숨가쁘게 오르니 북쪽으로 시야가 트인다.
눈 아래 드넓은 갈대밭이 펼쳐지고 멀리 30분 전 출발한  자연생태관 주변 모습도 한 눈에 들어 온다.

무진교를 건너 대대포구를 가로 질러 갈대밭으로 오는 인피가 끝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산전망대에 오르지 못하고
총 길이 1.2km 남짓되는 갈대데크를 따라 갈대밭을 누비는 관광으로 만족한다.

오후 4시17분
3년 전인 2007년 12월에는 없던 예쁜 전망대가 마련된 곳에서 잠시 멈춘다.
용산전망대까지 440m 정도 남겨 둔 지점이다.
보조전망대라 이름 붙은 목재 아치형의 아름다운 구조물이다.

눈 아래로 장관이 연출된다.
'여자만 장어'라는 상호를 잉태한 장본인인 '여자만'
그리고, 퇴적된 넓은 갯벌로 이루어진 순천만이 한 눈에 보인다.
갈대 군락은 적조를 막는 정화 기능이 뛰어나
순천만의 천연 하수 종말 처리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홍수조절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한다.
또한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주고 안정감을 주어, 물고기들의 보금자리가 되며,
다시 이들을 먹이로 하는 수서 조류들이 찾아오게 된다.
순천만이 희귀 조류의 서식지가 된데에는 바로 갈대군락의 역할이 매우 크다고 한다.

오후 4시36분
3년 전인 2007년 12월 전국 10대 낙조절경지 중 한 곳이라는
이곳 순천만의 S라인 수로를 배경으로 한 일몰을 보기 위해
몇시간을 기다렸던 배경 좋은 장소에 잠시 주저 앉는다.
그러나 간간히 빗방울까지 한두방울씩 떨어지는 흐린 날씨가 야속하기만 하다.

300mm망원렌즈로 좀 더 자세히 살피니 수많은 철새들이 모여 있다.
순천만일대의 철새는 양보다 질적으로 중요하다.
특히 염습지 식물의 일종이며 새들의 먹이가 되는 칠면초가 군락을 이루고 있기에
국제보호조인 흑두루미, 검은머리갈매기가 세계 전개체의 약 1%이상이
서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재두루미가 발견되고 있다.
그 외에도 저어새, 황새의 발견기록이 있으며 혹부리오리가 세계 전개체의
약 18%가 서식하고 있으며 민물도요는 세계 전개체의 약 7%가 서식하고 있다 한다.

오후 4시46분
짙은 구름 속에 가려 있던 태양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잠깐동안 윤곽만 보여 주던 태양은
다시 짙은 구름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춘다.

오후 5시5분
일몰 시각인 오후 5시20분이 되어도
구름 속의 태양은 그 모습을 보일 것 같지 않아
용산전망대를 둘러본 후 자연생태관 입구의 주차장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용산전망대에 들러 본다.
예상했던대로 3개층으로 이루어진 순천만으로 향한 전망대에는
순천만의 장관을 보기위한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맑은 날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햇빛이 엷게 비치면
간조로 이루어진 갯벌의 S라인이 환상적인 자태를 드러내는 이곳.
흐린 날씨가 아쉽기는 하지만
좌측 끝에서부터 우측으로 고개를 돌려가며 멋진 풍경을 눈 속에 담는다.

한 눈으로 다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는 중
중앙부의 모습이다.
순천만은 그 역사가 자그마치 8000년이나 된다.
지질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지구상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의 높이가 160m쯤 높아지면서 우리나라의 서해가 육지에서 바다로 변하고
한반도의 모양이 지금의 형태로 변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우측으로 눈을 돌려 잠시 후 돌아가야 할
자연생태관이 있는 곳으로 눈길을 준다.
드넓은 갈대밭 너머로 짙은 안개가 끼면 더 멋질 것 같은 대대포구와
자연생태관쪽이 어렴풋이 보인다.

오후 5시9분
순천만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람사습지협약"에 가입된 곳이다.
그 넓이만 해도 800만평에 이르고
세계적 희귀조인 흑두루미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서식하는 곳이다.

오후 7시10분인 간조시각이 가까워지며 갯벌이 점차 많이 드러난다.
수많은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도 선착장으로 귀가를 서두른다.
나 또한 행복했던 주말 하루 남도여행을 끝내고 귀가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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