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_時事_여행_컴

1968년 박 대통령과 2010년 이 대통령

전동키호테 2010. 5. 25. 09:37

 

남북 대결 국면에서 1968년은 중요한 변곡점(變曲点)이 되는 해이다. 그해 김일성은 새해 벽두부터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는다. 1월 21일 '김신조 일당' 31명을 내려보내 청와대를 습격한다. 김일성은 이틀 뒤(1월 23일) 동해상에서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이후 한반도는 전쟁 국면에 들어간다. "즉각 보복"의 비등한 여론에 미국은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7함대 구축함 2척을 동해에 급파해 일전불사로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10개월의 협상 끝에 12월 23일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를 판문점을 통해 넘겨받고 종결된 결말에 실망했다. 김일성은 이 와중에 11월 2일 울진·삼척지구에 100여명의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광적(狂的)인 '남한 흔들기'를 거듭했다. 당시 56세의 김일성은 "환갑잔치는 서울에서"를 외치며 전쟁 준비에 광분했다.

이런 고립무원 상태에서 박 대통령은 생각을 바꾼다. '자주국방' 기치 아래 김일성을 확실히 제압하기 위한 종합전술을 구사, 이후 남한의 완벽한 승리로 이끈다. 박 대통령은 먼저 그해 2월 7일 "온 국민이 경제건설과 국토방위를 병행, 논두렁에 총을 두고 농사를 짓는 태세를 갖춰야 한다"면서, '250만 재향군의 무장방침'을 밝힌다. 두 달도 안 된 4월 1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167만 예비군 창설식이 열렸다. 김일성이 자랑하는 100만 노농적위대를 숫자로 압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곧 다른 카드도 꺼냈다. 그해 3월 울산석유화학단지 착공식을 가졌다. 또 예비군을 창설한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을 창립한다. 중화학공업 육성의 깃발을 든 것이다. 당시 중공업, 특히 병기(兵器)산업은 북에 완전히 눌려 있었다. 북한은 그때 우리의 10배가 넘는 연산 210만t의 철강으로 군함·잠수함을 만들고 있었다. 우린 소총 한 자루 만들지 못할 때다. 박 대통령은 "무기의 소재인 중화학공업을 육성해야 방위산업을 키울 수 있다", "중화학공업을 압도해야 북의 도발을 원천봉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재원이었다. 포철만 해도 투자금 1억달러를 빌려줄 나라가 없었다. 박 대통령의 분신 박태준씨가 1년간 일본을 전방위로 설득, 대일청구권 자금 9000만달러를 투입할 수 있게 됐다.

이해 씨앗이 뿌려져 오늘날 세계 6대 철강대국의 교두보가 된 포항 제철기지와 울산 석유단지에 이어 여천의 제2종합화학공업기지, 온산의 비철금속기지, 창원의 종합기계공업기지, 거제도의 조선기지, 구미의 전자기지 등 7대 중화학공업기지가 70년대에 차례로 건설된다. 100억달러가 투입되는 대역사였다. 68년 수출액이 5억달러임을 감안하면 천문학적인 투자였다. 이들 기지는 대외 수출품(80%)과 각종 방산무기(20%)를 함께 생산하는 시스템이었다. 방위산업과 연결된 박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은 김일성과의 싸움에서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을 겨냥해 짜낸 지혜의 산물이었다. 이 카드들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이로 인해 1970년대 후반 국방력도 앞서고, 중화학공업은 오늘날 한국 경제를 일으켜 세운 견인차가 되었다.

김정일이 일으킨 천안함 사태에 대한 대북 후속 조치는 앞으로 한반도와 나라의 운명을 가르게 될 것이다. 북한핵과 김정일의 건강, 파탄상태에 빠진 경제로 인한 북의 급변사태 변수마저 끼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42년 전 박 대통령이 했던 것처럼 "탁월한 선택"을 구사하지 못하면 우리의 운명은 또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