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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에 미친 父子

전동키호테 2009. 5. 16. 17:13

도라지에 미쳐 52년, 代이어 미쳐 12년 '장생 도라지' 이성호·영춘 父子

35년 전 지리산(智異山) 자락에 괴상한 소문이 돌았다. 가재·개구리 잡아먹고 칡뿌리·솔잎으로 연명하는 백발의 사내를 보고 사람들은 갑론을박했다. "산신령이다" "아니다. 세상을 등진 정신병자다!" 정체가 불분명한 이 남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도라지 타령'을 불렀다.

그가 이성호(李聖鎬·78) ㈜장생도라지 창업주다. 무학(無學)에 나이 오십까지 실패만 거듭했던 그를 사람들은 '도라지 또라이'라 불렀다. 그랬던 그가 1999년 2월 '신(新)지식인'으로 선정되고 고교 한국지리 교과서에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쇠락하는 한국농업의 새 모델이 된 것이다.

아내 고생시키고 자식 가르치지 않은 것도 모자라 평생 빚더미에 앉아있던 그는 어쩌다 찾아온 대운(大運)마저 걷어찼다. 딱 한번 생도라지가 불티나게 팔렸을 때 만족했다면 팔자(八字)가 평탄했을 것이다. 그는 앞뒤 재지 않고 공장을 세웠다. 결과는 역시 실패였다.

장남 이영춘(李榮春·52·㈜장생도라지 사장)은 1997년 추석 때 거의 미칠 뻔했다. 아버지가 거덜난 공장을 떠넘긴 것이다. 빚만 28억원이었다. 신문 배달하며 진주기계공고를 마친 그는 당시 삼성항공 수석 인사과장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시밭길을 강요했다.

6개월 만에 사표가 수리되자 그도 도라지에 미쳤다. 부자(父子)에게는 도라지만 보면 미치는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11년 만인 지난해, 엉망진창이던 회사는 일본에만 도라지를 500만달러 어치 수출하고 연간 매출액이 100억원 가까운 알짜가 됐다. 아들 역시 2006년 '신지식인'이 됐다.

대(代)를 이어 도라지에 미친 아버지와 아들은 경남 진주 외곽에 살고 있었다. 그들을 찾은 지난 11일, 섭씨 30도를 넘는 땡볕 속에서 대형 트럭이 뭔가를 잔뜩 싣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마실 도라지 액(液)이었다. 국내보다 세배 높은 가격으로, 인삼보다 비싸다고 했다.

도라지에 미쳐 평생을 보낸 아버지가 아들마저 도라지 재배에 끌어들였다. 부자(父子)가 들고 있는 21년생 도라지 세 뿌리의 굵기만큼이나 많은 사연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이 환한 미소를 짓기까지 그들은 가난과 빚에 시달려야 했다. ㈜장생도라지 건물 1층에는 이 회사가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모형이 전시돼있다. 도 라지를 키우겠다며 길을 나서는 아버지를 아내가 말리고 있다. 왼쪽 평상에 앉은 아들이 지금의 회사를 이끌어가는 이영춘 사장이다.(아래 사진) ☞ 동영상 chosun.com /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아버지
빈농(貧農)의 집에서 5남2녀의 둘째로 태어난 이성호와 도라지의 첫 만남은 남의 집 머슴을 살던 14세 때 시작됐다. 산으로 함께 나무를 하러 간 폐병쟁이 아저씨가 어디선가 큼직한 도라지를 캐 씹어먹더니 잠이 들었다. 소년은 그를 두고 산에서 내려왔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며칠 동안 그 아저씨가 마을에서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사흘 만에 다시 찾은 산에서 아저씨는 "참, 한숨 잘 잤다"며 기지개를 켰다. '한숨은 뭐가 한숨이냐, 사흘 반나절을 자놓고…'라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네, 몸이 개운하고 날아갈 것 같아."

이씨가 진짜 도라지와 인연을 맺는 데는 12년이 더 필요했다. 6·25전쟁 때 인민군에게 붙잡혀가다 탈출한 뒤 4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찾아간 그 아저씨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백발이 흑발 되고 아내를 맞았다. 마당에 아이까지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선생과 도라지가 인연을 맺게 된 게 왜 그 아저씨 때문입니까.
"그분은 해소 천식에 폐병을 앓고 있었어요. 나이가 50이 넘었습니다. 당시로는 할아버지뻘이었지요. 제가 그의 바뀐 모습을 보고 깨달았어요. '이 양반이 먹은 도라지가 몇 년 묵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잘 재배만 하면 도라지로 남을 구제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거지요."

―그분은 장수했나요.
"당시로서는 장수했습니다. 팔십까지 살았으니, 오래 살았지요."

―혹시 도라지를 불로초(不老草)라고 생각합니까.
"옛날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어요. '몇십 년 묵은 도라지는 산삼(山蔘)보다 낫다'는 거지요. 제가 도라지에서 추출해 받은 특허만 네 가지입니다."

―도라지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나지요.
"식용(食用)으로 쓰는 곳은 우리와 중국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북부보다 중부, 중부보다 남부에서 나는 도라지를 더 쳐줍니다." 

 

―천연 도라지를 제외하면 그때까지 도라지를 재배한 사람이 없었지요?
"제대한 스물여섯 살 때부터 밭을 얻어 도라지를 심었지요. 저는 농사를 한번 하면 광작(廣作)을 합니다. 5000평에 심었는데 망했습니다. 3년이 지나면 하나같이 밑동이 썩어버리는 겁니다. 왜 도라지가 3년 만에 썩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원래 집안이 가난했다면서 밭 5000평을 무슨 돈으로 마련했습니까.
"제가 남의 돈을 잘 꿔요. 이쪽에서 빚 얻어 저쪽 돈 갚고 다시 돈 얻어 다른 쪽 돈 갚는 식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카드 돌려막기지요."

―몇년을 그렇게 실패만 맛봤나요.
"41세 때까지 15년 동안 그랬지요."

―당시 결혼은 했습니까?
"도라지 밭을 일구기 직전 결혼을 했지요. 자식은 4남1녀를 낳았고요."

―가족 보기가 민망하지 않았나요.
"실망도 되고 포기하고도 싶었지요. 하지만 다 내던지면 그간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는 거지요. 지나온 세월이 아까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이혼당할 일인데.
"제 또래는 아내가 남편 사업 실패했다고 군말하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빚을 떼일 처지에 놓인 동네사람들은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이성호를 '몹쓸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성호가 다시는 도라지를 못 심게 모두가 나서 말리자는 의견도 모았다. 300가구 남짓한 대촌(大村)에는 한참 동안 "그만큼 실패했으면 됐지…"라며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씨는 지리산으로 갔다. 솥단지 하나와 소금 한 자루, 다 자란 도라지를 맨 채 하루를 걸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도라지를 키워보자는 심산이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가재·개구리 잡고 나무껍질·칡뿌리·솔잎 먹으며 도라지 씨앗을 곳곳에 심었다.

도라지에 미쳐 어느덧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앉은 그를 보고 마을사람들이 수군댔다. 밤이면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외로움과 사람들의 억측,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성호는 '도라지 타령'을 수천 번 부르며 달랬다.

―3년 만에 죽는 도라지의 생명을 연장시킬 비법을 찾았습니까.
"찾긴 찾았지요, 산속에서 5년을 더 보낸 뒤에야…."

―어떻게 찾았나요.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겁니다. 척박하기 이를 데 없어 도라지는커녕 잡초도 자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뻘건 황토에 옮겨 심은 3년 된 도라지가 2년이 지난 뒤에도 새순을 돋아낸 겁니다."

―황토가 비법이었나요.
"첫째가 옮겨심기, 둘째가 황토였습니다. 도라지는 땅의 기운을 먹고 사는 식물입니다. 거름을 먹는 식물이 아닙니다. 도라지 뿌리가 썩지 않도록 거름기 없는 땅에 심고 3년쯤 지나 지력(地力)이 다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 심어야 합니다."

―스물여섯에 도라지를 재배하기 시작해 마흔여섯에 성공했습니다. 어땠습니까, 그때 기분이.
"엉엉 울었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고함도 질렀고요. 노벨상을 타더라도 그때만큼 기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비밀을 푼 뒤 곧바로 돈을 벌었나요?
"웬걸요, 재배에는 성공했지만 오래된 도라지가 왜 몸에 좋은 것인지를 과학적으로 성분 분석할 능력이 제겐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공부를 했는데 역시 돈이 문제였어요. 1981년에만 빚이 1억7000만원이었습니다. 진주 시내에서 방이 다섯 개 딸린 집 스무 채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약효를 입증하는 데 다시 몇 년이 걸렸습니까.
"6년이 더 소요됐지만 그전에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열린 겁니다. 한 지방지 기자가 '25년생 도라지를 키운 농사꾼이 있다'는 기사를 썼어요. 그걸 보고 전국에서 손님들이 몰려왔지요. 그때는 가공하지 않은 생도라지를 팔았습니다."

―선생이 쓴 책을 보면 도라지는 1~20년생까지는 별 차이가 없는데 21년생부터 도라지의 효능이 확 늘어난다고 나와있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경상대 등 각 대학과 연구원에 의뢰해보니 도라지에도 인삼과 똑같은 사포닌 성분이 있습니다. 20년까지는 사포닌 성분이 비슷한데 21년째부터 확 늘어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왜 하필 21년일까요.
"우리 삶에 21년과 연관된 이야기가 많잖아요. 계란이 부화하는 데 21일이 걸리고 단군신화에 곰이 사람이 되려고 21일 동안 마늘을 먹었다, 사람도 아이를 낳은 뒤 삼칠일 동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그 예지요. 21이라는 숫자를 '완성(完成)숫자'라고도 합니다."

―말이 그렇지 도라지를 21년 동안 관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실제로 21년을 관리합니까.
"우리 회사가 지리산에 밭이 17만평이 있습니다. 250여 농가가 그 밭을 관리합니다. 제가 옛날에 뿌려 놓은 게 많고 지금은 3년생 도라지를 심으니 18년만 관리하면 되는 거지요."

―도라지를 훔쳐가는 사람은 없나요?
"있지요. 하지만 농사짓는 사람은 100을 다 가지려면 안 됩니다. 30만 내 것이라고 생각해야지요. 남들이 뽑아가도 다 우리나라 사람 먹고사는 것이려니 해야 합니다."

교과서에 실린 이성호씨 이야기 고교 한국지리 교과서에 이성호씨의 스토리가 등장했다. 교과서는 이씨를 '세계를 제패한 한국 도라지를 재배한 인물'이라 소개하고 있다.

◆아들
나이 육십 되던 해 이씨는 자기 이름을 딴 '성호장생도라지' 상표를 등록했다. 내친김에 '성호장생도라지 영농조합법인'(1995년)도 설립했다. 2년 뒤에는 현대식 가공공장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공장은 제대로 가동 한번 하지 못했다. 주먹구구식 경영과 때맞춰 찾아온 IMF 때문이었다.

어렵게 잡은 성공이 다시 품 안에서 날아가는 듯했다. 다급해진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와서 공장을 살리라"는 것이었다. '뻔뻔한 아버지'는 "네가 안 들어오나 보자"며 협박까지 했다. 한참을 고민한 후 아들 이영춘은 삶을 바꾸기로 했다.

―아버지 말을 잘 듣는 효자였나요.
"우리 5남매는 학교는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어렵게 살았습니다. 저도 고교 진학은 꿈도 못 꾸다 고학(苦學)해서 공고에 갔습니다. 처음에 삼성중공업에 다니다 삼성항공으로 옮겼는데 당시 월급이 12만3000원이었습니다. 공무원 급여의 3배나 되는 많은 액수였지요. 그걸 아버지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어떻게 빼앗아가던가요.
"월급날만 되면 찾아와 가져가는 거지요. 다 아버지가 진 빚 이자로 나갔습니다. 돈 모으는 재미가 샐러리맨의 유일한 낙이잖아요. 제 심정이 오죽했겠어요. 어머니와 제가 궁리했습니다. '결혼하면 돈을 안 가져갈 것 아니냐'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신혼여행이랍시고 하루 처가 집에서 자고 돌아와보니 아버지가 축의금 380만원까지 가지고 사라진 겁니다. 어머니가 대성통곡했습니다."

―나중에 생도라지가 불티나듯 팔릴 때는 돈을 제법 모으지 않았나요.
"저도 아버지께 물어봤어요. '그 돈 다 어디 있느냐고'요. 빚을 잘못 관리해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저희 가족은 당시 '도라지'라는 소리만 들으면 확 돌아버릴 지경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만든 회사가 가보니 어떻던가요.
"한마디로 생산할 준비가 안돼 있었어요. 도라지 가공공장인데 기계가 작동도 안 되고 가공한 도라지를 담을 박스도 없었습니다. 원가관리 개념도 없었고 직원들도 출·퇴근이 엉망이었어요."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는 걸 반대하지 않던가요.
"당시 아버지 회사의 빚 28억원을 분석해봤어요. 은행대출이 17억원, 사채(私債)가 11억원이었습니다. 사채를 얻어도 너무 엉성하게 얻었더군요. 한 교사에게 1억원을 빌리면서 4년 후 4억원으로 갚겠다는 식이었습니다. 집 사람이 난리를 피웠어요. '같이 죽을 거냐'면서요. (이런 사정을 모르는 지 아버지는 '내가 참 마음씨 좋은 며느리를 얻었다'며 몇 번을 자랑했다.)

―그런 회사를 어떻게 살렸습니까.
"저 혼자 감당할 수 없어 삼성항공의 후배 몇 명을 데려왔지요. 아침에는 20분이고 1시간이고 직원 인성교육, 직장 에티켓, 전화 예절을 가르쳤습니다. 출근을 1분이라도 늦게 하면 차라리 쉬라고 했어요. 항상 열려있는 구내식당도 배식(配食)시간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가 표준화와 매뉴얼입니다. 중소기업이 흑자(黑字) 도산하는 이유가 시스템의 차이입니다. 제가 10만원 이하는 과장, 1000만원 이하는 이사가 처리하도록 전결(專決)규정도 만들었어요. 시스템이 갖춰지면 크로스체크가 되거든요."

―관리 시스템만 바꾼다고 회사가 회생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기본적으로 생산업인데.
"도라지 가공 프로세스도 바꿨지요. 도라지를 구해온 뒤 세척, 절단, 건조, 분쇄, 추출, 포장, 운송하는 식으로요. 처음에는 직원들이 여기저기로 들고 다니는 식이었습니다."

―고교 때 기계설계를 공부했고 이후에는 인사업무를 맡았는데 그런 건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저도 공부를 했지요. 회사를 맡은 뒤 진주 산업대 식품가공학과에 편입해 2년을 배웠고 욕심이 생겨 경상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도 했습니다. 지금은 식품 쪽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러니 회사가 살아나던가요.
"1997년 연 매출액이 2400만원이었습니다. 98년에 매출액이 10억1200만원이 됐고 99년에는 20억원을 돌파했습니다. 작년 매출액은 94억원입니다."

―형제가 4남1녀라는데 다 같이 회사에서 일합니까?
"회사가 족벌(族閥)체제로 운영돼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식구가 모여있으면 문제가 생기지요. 직원 채용은 무조건 공채(公採)로 합니다."

식품으로 양생(養生)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상상을 초월한다. 몸에 좋다면 바퀴벌레라도 잡아먹는 게 인간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신문이나 잡지에는 온갖 식품이 다 만병통치약 같은 효능을 발휘한다는 광고가 넘치고 있다.

그러나 이영춘은 '도라지=만병통치'라는 식으로 평가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만병통치는 있을 수 없고 어떤 식품이 가진 효능은 과학에 의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도라지를 신약(神藥)처럼 믿는 눈치였지만 아들의 생각은 달랐다.

―만병통치약처럼 인식되면 매출에는 좋은 것 아닌가요.
"회사의 매출을 분석해보면 특징이 있어요. 매스컴을 타면 갑자기 매출이 올라가다 계속 내려가는 겁니다. 그건 아니지요."

―회사에 연구인력이 있나요?
"자체 고용한 박사가 2명, 석사가 3명을 포함해 20명입니다. 그것으로는 모자라 경상대, 조선대, 국제대 등 3개 대학과 한국화학연구원, 생명공학연구원, 경남농업기술원 등 연구기관과 협동 연구를 하고 있지요."

―도라지가 관심을 받으니 유혹도 많았겠지요.
"저희는 액, 분말, 환(丸)과 캔디, 진주(珍酒)라는 술과 화장품을 개발했습니다. 캔디는 세계에서 가장 비쌀 겁니다. 한 알에 300원가량 하니까요. 주변에서 도라지 라면을 만들자, 도라지 국수를 만들자는 제의가 있었습니다만 다 응했다면 회사가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홈쇼핑업체에서 제의가 왔지만 거절했습니다. 저희는 대리점도 몇 개 안돼요."

―인삼과 비교하면 가격이 어느 정도인가요.
"인삼은 6년 근이 보통 5만~6만원 합니다. 21년 된 도라지 한 뿌리가 50만원입니다. 한 뿌리의 무게게 1~1.5㎏쯤 되지요."

―도라지를 알리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아무리 설명해도 다 듣고 나서 '아! 이 인삼은…'하는 식의 반응이 나올 때 참 허탈했지요. 외국인들에 대한 '고려인삼'의 브랜드 인지도가 그만큼 높았습니다."

―수출은 몇 개국에 합니까.
"일본과 중국, 미국에 하는 데 아무래도 일본의 비중이 높습니다. 일본은 시장 진입의 벽이 높지요. 그래서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10년 넘게 각종 박람회에 참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미쓰이(三井)물산이 관심을 보여 300만달러어치를 수출했고 작년에는 고양사(高陽社)와 500만달러 수출계약을 체결했지요."

―최근 한국 농업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많아지면서 ㈜장생도라지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농산물의 활로에 대한 하나의 모델이 됐다고 봅니다. 250 농가의 할 일이 생겼고 고용 창출도 했습니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관광상품화도 됐고요. 우리 회사를 찾은 역대 농림부장관이 4명입니다."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 아버지가 있는 회사 3층으로 올라가면서 아들은 "제가 했던 말을 아버지에게 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때 기자가 '아직도 회사 그만둔 걸 후회하느냐'고 묻자 그는 "남아 있었으면 언제 잘릴지 모르는데…, 지금은 후회하지 않지요"라고 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묵직한 도라지를 들고 1시간 동안 이런저런 자세를 취했다. 바람이 날려 아들의 머리카락이 휘날리자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매만지기도 했다. 이 특이한 부자를 보며 21년 된 도라지가 그 정(情)을 먹고 자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문갑식 기자 @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