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영성 vs. 켈틱 영성
기독교의 영성은 지역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지중해 영성(Mediterranean spirituality), 켈틱 영성(Celtic spirituality), 그리고 동방 교회의 영성(Eastern Orthodox spirituality)이 그것이다. 지중해 영성이란 말이 익숙하진 않지만 기독교가 본래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전체로 확산되었고 이것이 북미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영성은 지중해 영성의 한 지류라고 볼 수 있다. 로마 멸망기 유럽의 전화(戰禍)를 피해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자라난 켈틱 영성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고, 서로마와 갈라선 이후 독자적인 길을 걸어온 동방 교회의 영성은 그 유명한 '예수기도'를 빼놓으면 여전히 생소하기만 하다.
실제로 지중해 영성의 본질을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향과 고스란히 포개진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죄사함으로 알고 있듯이 지중해 영성은 인간의 죄성에 대한 뼈저린 자각과 그리스도의 가이없는 속죄를 쉼 없이 고백한다. 인간의 죄악과 세상의 타락에 방점을 놓고 있는 지중해 영성이 영과 물질을 분리시키는 경향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때문에 한국교회는 20년이 넘는 기독교 세계관의 세례가 무색하게도 뿌리 깊은 이원론의 악습을 좀처럼 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중해 영성과는 달리 켈틱 영성은 그리스도의 속죄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의 선함(goodness of God's creation)에 방점을 찍는다. 죄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흐릿하게 하고 창조세계를 비릿하게 했지만 본래의 빛깔과 향기를 다 지우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들은 세상에 깃든 선함과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세상은 그분 때문에 여전히 살만한 곳이며, 이 땅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이기보다는 그분의 은총이 가득 찬 세상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구속 영성(redemption spirituality)에 목을 매는 반면 창조 영성(creation spirituality)에 대해서는 지나치는 수준으로 언급하는 것과는 달리 이들의 신앙은 앞엣것보다 뒤엣것에 더 깊이 닻을 내리고 있다. 지중해 영성의 지배를 받은 서구문명이 영과 물질을 구분하는 고질병에 걸려 오늘날의 생태적 위기를 야기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창조의 선함을 즐기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찾는 켈틱 영성이 서구사회를 지배했었더라면 오늘날의 물질문명은 조금은 다른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켈틱 영성에 젖은 이들이라고 해서 인간의 죄성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속죄를 찬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가 하듯이 그렇게 집요하게 반복하지는 않는 것 같다. 대신 이들은 한국교회 교인들이 놓치고 있는 일상 생활의 선함과 기쁨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생활의 소소한 것에서도 하나님의 선함을 즐기는 그네들의 모습은 실로 부럽기까지 하다.
식사 기도의 영성
두 영성에 대한 신학적 고찰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가 늘 하는 식사 기도를 가만히 살펴 보면 양자 간의 차이점이 자연스레 도드라진다. 우리의 식사기도는 음식 자체에 대한 언급보다는 음식을 먹고 더 힘을 내서 주께 헌신하게 해달라든지, 이후에 이어질 사역에 기름을 부어달라든지 하는 기도가 대부분이다. 이런 기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이러한 식사 기도야말로 창조 세계의 선함을 노래하기보다 영적인 충만함에 대한 간구를 중시하고, 일상 속의 소박한 기쁨보다는 종교적 헌신을 더 중시하는 우리의 영성을 고스란히 내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켈틱 식사 기도는 어떨까? A Contemporary Celtic Prayer Book에 소개된 점심 기도문 한 편을 읽어보자.
Monday Lunch Blessing
Bless my Monday quests.
Bless the fruit of the earth.
Bless the hands of farmers.
Bless the hands of workers.
Bless the texture and colors of my food.
Bless those who gather.
(Refrain)
Bless the breaking of bread.
Blessed Be! Blessed Be! Blessed Be!
Christ at every table,
Christ beside me,
Christ behind me,
Christ around me,
In the breaking of the bread.
이 얼마나 식사 자체에 충실한 기도인가! 이 평범한 식기도 한 자락이 일상 속에서 꽃피어난 생활 신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여기에 소개되지 않은 다른 기도문까지 함께 보면 음식의 맛과 향, 질감을 노래하고, 음식이 이 자리에 있기까지 수고한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고, 심지어 서빙하는 이와 설거지하는 이까지 생각하는 켈틱 기도는 음식에 나타난 창조 세계의 선함을 만끽하느라 이 밥 먹고 힘내서 교회에 더 충성, 봉사하게 해달라는 식의 '도구성 기도'를 할 겨를이 없다. 실은 식사만이 아니다. 우리가 영적인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그릇된 위계질서(hierarchy)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학업도, 결혼도, 식사도, 교제도, 놀이도 영적인 것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가 되고 만다.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삶을 가멸게 하는 본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이원론적 환원(dualistic reduction)만이 남게 된다.
서로 보충하여 온전케 하려 함이라
내가 켈틱 영성의 장점을 약간 치켜세운다고 해서 지중해 영성의 고갱이인 구속의 신학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뿌리 깊은 죄성은 더할 나위 없이 강조되어야 하고 그만큼 속죄의 은혜도 깊이 각인되어야 한다. 바울이 말년에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the worst of sinners)라고 한 것처럼 실제로 주님을 알아 가면 갈수록 우리가 얼마나 죄 많은 사람인지 깨닫게 되질 않던가. 하지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만을 편중되게 강조하다보면 반드시 불균형으로 인한 문제가 생긴다. 서두에 내가 언급한 지속적인 억눌림으로 인한 자유함의 상실이라든지, 영적 소진과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결과이다.
물론 속죄의 은혜가 깊을수록 자유함과 영적 충만함도 깊어진다. 하지만 왜 같은 정도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과 창조세계의 선함과 신비를 강조하지 않는가? 나의 죄인 됨과 이에 따른 예수님의 구속을 날로 깊이 체험하면서도 내 안에 보존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희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세상의 타락을 절감하고 또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으면서도 그 분이 계시기에 인생은 여전히 아름답고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곳임을 노래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내가 보수 신앙을 고백하며, 복음주의 교회에 속해 있고,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해 온 사실로 인해 늘 주께 감사드린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우리가 속한 우물에서 꾸준히 물을 길어먹으면서도 우리에게 부족한 자양분을 다른 전통에 속한 자매형제의 우물에서 보충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켈틱 영성에게 창조의 선함과 일상의 아름다움을 배웠듯이 전쟁과 정복에만 익숙한 우리는 메노나이트 교회를 통해 평화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복음의 사회정치적 에너지를 상실한 우리들은 해방신학에 투신한 형제에게서 억압받는 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려는 거룩한 도전을 받게 되고, 오순절 교회의 자매들로부터는 우리가 평소 제한하는 성령의 폭발적 능력을 문자적으로 체험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자본주의와 소비문화가 성경적이라고 믿는 우리들은 폴 리꾀르와 같은 유럽의 사회주의 기독교인들로부터 우리와 다른 사회정치적 관점도 성경적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Generous Orthodox라는 책 제목이 보여주듯 정통(이라고 믿는바)을 견지하되 다른 전통에 대해서도 관대하고 겸허한 자세로 배우기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 각양 다른 선물을 받은 지체들이 서로 연합하여 전체를 이롭게 한다는 말씀(고전 12장)은 개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교회에, 나아가 우주적 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다. 어떤 교단이나 교파도 진리와 선물을 독점한 듯이 오만하지 않게 하시고 대신 겸손하게 허리를 동이고 서로 배우게 하신 아버지의 깊은 속뜻을 이 가을에 내밀히 묵상해보도록 하자.
2008년 10월호 큐티진
복음주의와 켈틱 영성이 입맞출 때까지 - 박총 전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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