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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에 밀려나는 추억의 피맛골·청진동 길

전동키호테 2008. 6. 10. 17:17

조선시대 서민들이 고관대작이 타고 다니는 말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서울 종로구 피맛골과 추억의 해장국 거리 청진동길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낡고 허름한 건물을 헐고 빌딩촌으로 만드는 도시환경정비구역 재개발사업이 한창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옛 음식점 터가 고층 빌딩촌으로
서울시와 종로구에 따르면 청진구역으로 이름 붙여진 이곳은 총 19개 지구로 구성됐다. 재개발사업은 4∼5개 구역으로 나눠 진행 중이다. 속도가 가장 빠른 곳은 종로구청 맞은편인 5지구. 금호건설이 시공사로 참여하고 있다. 이미 인허가 단계를 끝냈고 올해 안으로 기존 건물 철거, 신축 건물 공사에 들어간다. 이곳에는 총면적 3만7350㎡(1만1300평) 규모 빌딩이 들어서게 된다. 2·3지구와 12∼16지구에도 오피스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교보빌딩 뒤편에 위치한 청진동 2·3지구에는 대림산업이 시공사로 참여하며 대지면적 7000㎡(2100평), 총면적 10만2500㎡(3만1000평), 지하 6층∼지상 23층 규모 오피스 건물 2개동이 만들어진다. 12∼16지구는 대지면적 약 1만㎡(약 3000평), 연면적 15만8600㎡(4만8000평)로 청진동 개발 사업지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지엘에이엠씨사와 GS건설이 각각 시행과 시공을 맡는다.

현재 사업이 가장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5지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구역은 내년부터 본격적인 철거와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다. 업계 관계자는 “3∼4년 뒤면 최소 12개 이상 건물들이 현재 청진동 골목 식당 터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라며 “새로운 거대 오피스 타운이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폐업시점 달라 재개발 착수 시점 미정
개발업자들은 최소한 3개 지역 토지작업이 90% 이상 끝났다고 홍보하고 있다. 실제 요즘 청진동 일대에서는 이사를 했거나 이전 준비를 위해 문을 닫은 식당이나 점포를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70년 전통의 ‘한일관’은 지난달 문을 닫았다. 가게 앞에는 11월께 성수대교 남단에 강남점을 낸다는 공지가 붙어있다. 1937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해장국집 ‘청진옥’은 7월 말까지 영업할 예정이다. 아직 이전할 곳은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병천유황오리’도 7월 말까지만 영업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로타리소곱창’ 등 몇몇 가게는 이달까지만 영업을 하기로 합의했다.

한 식당 관계자는 “가게마다 문 닫기로 한 합의 시점이 다른 걸로 알고 있다”며 “합의를 아직 못 본 곳도 있다”고 귀띔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대로라면 공사 시기가 연기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마땅한 보존대책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서울호텔 부지인 16지구의 경우에는 개발업자가 12·13·14·15지구와 묶어 쌍둥이 빌딩 건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서울시가 보류시킨 바 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서민 터전
피맛골은 서울 종로 1∼6가에 걸쳐 종로에서 18m 북쪽으로 나 있는 폭 2∼3m 정도의 작은 골목길을 말한다. ‘피맛골’이란 명칭은 ‘조선시대 서민들이 높은 양반들의 말을 피하기 위해 만든 길’이라는 ‘피마로(避馬路)’에서 유래했다.

양반과 평민의 계급구별이 엄했던 조선시대, 서민들은 양반이 탄 말이 지나갈 때마다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종로를 다닐 때마다 매번 그렇게 머리를 조아려 시간을 허비해야 했던 서민들은 결국 큰길 옆에 말 한 마리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을 만들어 그 길을 이용했다.

서민들이 주로 다니다보니 저렴한 가격의 주점이나 국밥집이 많이 생겼다. 술국이 인기를 얻으면서 이 공간은 ‘해장국 골목’으로 유명해졌다.


과거에는 광화문에서부터 동대문이 있는 종로5가까지 연결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개념이 희미해져 현재 피맛골은 광화문에서 청진동, 인사동까지 남아 있는 상태다. 최근까지도 이곳은 가벼운 주머니로 한 끼를 때우고 싶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서민들의 거리’로 사랑받고 있다

▲“참 싸고 맛있는 곳 많았는데…”손님도 식당주인도 서운·씁쓸
4일 오후 3시30분, 비가 내리는 청진동 거리는 ‘한산’ 그 자체였다.
과거 비 오는 날이면 빈대떡 부치는 냄새가 코를 찌르던 풍경과는 달리 음식도, 음식을 파는 사람들도, 심지어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가게들은 ‘재개발 때문에 가게를 폐쇄합니다’라는 내용의 종이 한 장을 대문 앞에 붙인 채 자물쇠를 걸어놓았다. 문을 연 가게에도 이사하거나 폐쇄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는 곳이 많았다. 현재 문을 연 곳도 늦어도 7월에는 문을 닫는다.

“회사가 종로라 청진동 골목으로 식사를 하러 자주 왔다”는 A씨는 “참 싸고 맛있는 곳이 많았는데 서운하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친구들과 함께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대학생 B씨는 “이곳만큼 싸고 맛있는 음식 골목이 없다”며 “이제 어디 가서 친구들과 술을 먹을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한정식으로 유명한 H식당이 단골이었다”는 C씨는 “빈 건물과 폐쇄 공문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며 “종종 이곳을 지나다닐 때마다 문 닫은 걸 모르는 사람들이 헛걸음하는 걸 보고 내 일처럼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거기 식당들이 들어선다 해도 예전 분위기가 날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새건물 들어서면 옛 분위기 안날 것”
아쉬운 건 식당주인들도 마찬가지다. 최소 몇 년에서 최대 몇십 년까지 청진동·피맛골에서 식당업을 해 온 사람들은 서운함과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7년간 유황오리를 판매해왔다”는 D씨는 “7월 말에 가게를 빼기로 했는데 사실 속이 편하진 않다”며 “어딜 가든 이곳만 하진 않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6일 가게를 폐쇄한다”는 소곱창 집 주인은 “단골손님도 참 많은데 너무 아쉽다”며 “하지만 전부 다 폐쇄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게 문을 닫는다”고 말했다.

“몇십 년 동안 이 골목에서 해장국 장사를 해왔다”는 E씨는 “아직 새로 오픈할 가게를 못 구한 상태”라며 “대대로 해온 해장국 집인데 왠지 문을 닫는 기분이 들어 서운하다”고 말했다.
한편 아직 합의가 안 된 가게들도 있었다. 한 갈빗집 관계자는 “우린 합의가 되지 않았다”며 계속 장사를 할 뜻을 밝히면서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www.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