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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_인명진목사_쇠고기 시위는 국민감정

전동키호테 2008. 5. 21. 16:50

인명진은 누구인가?
70년대 재야 노동계 대표인물…80년대 중반 환경운동 이끌어

인명진 목사는 1946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대전고와 한신대를 졸업한 뒤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

70년대 초 28세 때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도산·개인 구원보다는 사회 구원이라는 진보적 해방신학에 이론적 기초를 둔 그리스도교 선교단체) 총무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이때 김근태, 김문수 등 ‘도산’을 거친 사람들이 후에 재야와 노동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했다. 긴급조치 1호·4호·9호 위반, YH사건, 김대중내란예비음모 사건으로 4차례 투옥됐다.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대변인을 맡았다.

80년대 중반 누구보다도 먼저 환경 문제에 주목, 한국교회환경연구소 소장,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상임공동대표로 환경운동에 앞장섰다.  전교조 태동시 출범식 장소를 제공했다. 경실련 창립 주역의 한 사람으로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장을 맡았고, 바른언론을 위한 시민연합 공동대표, 감사원 부정방지대책위원, KBS 이사 등 사회참여 활동을 활발히 해왔다.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맡은 것은 2006년 10월이다. 당내외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수해 골프’와 ‘음주 추태’ 등 악재에 시달리던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이미지 쇄신을 위해 진보계 인사로 알려진 그를 삼고초려 끝에 영입했다. 김용갑 의원의 ‘광주해방구’ 발언 등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단호하게 징계에 나서 의원들을 떨게 했다. 한나라당을 향해 쓴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내다 지난 6일 “소임을 다했다”며 사임했다.

인명진(印 名 鎭) 목사. 1970~80년대 박정희 정권에 맞서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었던 인물, 그 과정에서 허다한 노동운동가를 길러내고 YH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결국 네 차례 투옥됐던 사람. 그래서 민주노총과 전교조의 후견인이라고 보수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은 그였다. 그런 그가 2006년 10월 느닷없이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으로 영입됐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인 목사는 정의의 화신”이라고 치켜세웠다.

인명진 목사는 “한나라당은 내가 하는 말을 막지도 않았지만 듣지도 않았다”면서 “그렇지만 나는 경청하지 않는 교인들에게 단련이 되어서 그런 일에 대응하는 데는 프로”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서울 구로동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는 갈릴리교회 화단의 대나무와 썩 어울리는 푸른 웃음이었다. |강윤중기자


“예수는 죄인들에게 갔다. 가난한 사람들, 간음한 여인들에게 갔다. 예수는 그들을 칭찬하지 않았다. 한나라당이 수구보수에 차떼기 당이니까 거기로 가야 한다. 거기서 해야 할 소금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예수가 간음한 여자에게 동조하지 않은 것처럼 나도 한나라당 갔다고 그들을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인 목사는 이런 말로 자신의 ‘변신’을 설명했다. 실제 그런 역할을 하려고 했고, 또 일부 성공했다고 평가받는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엉뚱한 소리를 할 때마다 나서서 준엄하게 징계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한 치의 유예도 없었다. 지난 18대 총선 공천 때도 “사람을 공천해야지 왜 철새들을 공천하느냐”고 쓴소리를 했다.  지난 대선 때 그는 당내에서 후보검증을 하자고 해서 관철했다. 그 결론은 ‘이명박 후보의 BBK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였다. 이 후보의 당선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친박근혜 인사들로부터 ‘친이명박’이라고 비판받았다. 

그가 쇠고기 협상 파동이 한창인 지난 6일 사퇴했다. 역할이 끝났으니 교회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부분적 성공’으로 평가한 바 있지만, 자신의 역할에 한계를 느낀 듯한 뉘앙스였다. 서울 구로동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갈릴리교회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질문할 틈도 없이 시원시원하게 대답에 나섰다.

-일찍 그만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빨리 나왔다고 하지만 내가 최장수 윤리위원장입니다. 그게 오래 있을 자리가 아닙니다.”

-윤리위원장으로서 한 일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개인의 윤리 문제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성과를 거뒀습니다. ‘윤리위원장에게 걸리면 망신이다, 잘못하다간 정치 생명도 끊어질지 모른다’는 게 소문이 났어요. 깨끗해졌고, 다들 조심합니다. 다만 한나라당은 제가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면 누구를 공천할 것인가 하는 문제. 제가 보기엔 그게 더 중요한 윤리적 문제입니다. 한나라당이 윤리적으로 거듭나려면 공천을 윤리적으로 해야 해요. 제도적인 부분은 제가 역부족이었죠. 당규를 위반한 사람들을 공천심사 과정 중에 데려다 징계를 했어야 하는데 시간이 짧아서 못했지요.”

-그런데 사퇴하시면서 정부의 쇠고기 협상을 비판하셨습니다.
“시기가 잘못 됐어요.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별장에 간다고 하면 국민들은 ‘틀림없이 퍼주고 올 거다, 미국이 괜히 저러지 않을 거다’ 한다는 말이지요. 지금 ‘숙박료’ 얘기가 나오잖아요. 정상적으로 쇠고기 협상을 했다 해도 이런 오해를 벗어날 수 없는 시점에 타결을 한 겁니다. 이 대통령은 국민 감정을 읽었어야 해요. 참모들이 잘못했어요. 제가 참모라면 대통령한테 ‘캠프데이비드 가시면 안됩니다, 부시가 내일모레 그만둘 사람인데 왜 거길 갑니까’라고 했을 거예요. 성조기 들고 미국과 관계 복원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극소수입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가 왜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노무현 정부 때 미국과 소원해진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친미로 확 돌아선 것 아닙니까. 저는 그것도 그렇게 좋은 인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미국에 대해 좋은 생각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근본적인 처방을 찾아야지 쇠고기가 안전하다고하는 것만으로는 안되는 사태라고 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협상했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사실 아무리 잘한다 해도 이번 쇠고기 협상보다 결과가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럴 만한 사안도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쇠고기를 안 사먹을 재간도 없습니다. 그런데 서투른 사람들이 정치를 해서 이렇게 된 겁니다. 이 정부는 전략도 없고, 정보도 없어요. 쇠고기 문제는, 옛날 군인 대통령들은 늘 적과 싸우는 문제를 연구해서 전략과 정보를 다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번엔 막무가내였어요. 쇠고기 문제에 대한 상대를 농민뿐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더 중요한 소비자들을 생각하지 못한 겁니다. 국민 감정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국민들은 미국에 대해 좋은 감정만 갖고 있던 10년 전 국민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런 서투른 국정 운영은 어디서 기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 정부는 교수들 때문에 안됩니다. 교수는 현장을 몰라요. 이론은 잘 알지 몰라도. 정치 참여하는 교수들 중에 제대로 된 교수들 많지 않아요. 제대로 된 교수라면 학교에 남아있지 저렇게 정치판에 왔다갔다 하겠습니까. 이렇게 교수가 판치는 나라가 어디 있어요. 세계 어느 나라 정부에서 교수가 대통령 실장하고 수석·비서관을 합니까. 그리고 대통령도 이런 학자들에게 일을 다 내맡기고 있어요. 군인 대통령들도 전문가들의 지식을 빌렸지 다 맡기진 않았어요.”

-첫 내각 인사부터 부자들을 장관에 앉혀 잡음이 많았습니다.
“액수야 무슨 문제가 되겠어요. 과정에 문제가 있으니 문제지. 돈이 많으면 명예나 권력은 갖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쪽 다 없는 사람은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재산이 많으면 그거나 쓰지 권력까지 가지려고 한다’고 화내는 사람들 많이 있을 겁니다. 지금 미국산 쇠고기 반대 시위도 그런 것들이 감정적으로 부대껴서 나오는 거예요. 이 대통령이 사태를 잘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쇠고기 문제가 아니에요.”

-정부가 계속 혼선을 빚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대통령이 잘 되려면 표를 덜 받았어야 합니다. 제가 말은 안했지만 표 많이 받는 것 보고 ‘큰일났구나, 아슬아슬하게 됐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했어요. 이 정부의 문제는 거기에 있어요. 오만이죠. 정동영 후보와의 표차 531만표, 그거 믿고 그러는 겁니다. 저는 이명박 후보가 이기더라도 신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야당 세력이 참패하지 않고 살아 남아서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 이겁니다. 야당이 잘 돼야 합니다. 그래야 여당이 잘 될 수 있습니다. 이명박의 불행은 야당이 아니라 여당에서 견제를 받는다는 거죠. 한나라당, 경선 아직 안 끝났어요.”

-대선 이후 이 대통령을 만나셨습니까.
“만나자고 했는데 제가 못 갔어요. 사람들이 저한테 ‘이명박한테 가서 충고 좀 하라’고 하는데 지금 가면 자기 얘기 하느라 절대 남의 얘기 안 듣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가 얼마나 많은데 우리 얘기를 듣겠어요.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 처음 2년은 들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안 듣더라고요. 그러더니 망하고 실수하더군요. 대통령에게 충고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일단 대통령이 되면 자기 능력이에요. 그 능력으로 난국을 헤쳐나가야지, 누가 옆에서 충고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 노선을 어떻게 보십니까.
“실용은 정치의 방법이지 이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념 없는 정부는 잘 될 수가 없어요. ‘비즈니스 프렌들리’라고 하는데, 쓸데없는 말로 불안을 자초한 측면이 많아요. 노동자들이 불안해 하잖아요. 실속없이 적을 만들었어요. 이런 점들이 서툴러요.”

-남북 관계도 악화되고 있습니다.
“남북 문제는 이 대통령이 잘못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돈을 많이 들여서 남북 문제에 투자를 많이 했어요. 이렇게 진전된 것을 후퇴시키면 안돼요. 사업적으로 말하면, 투자 성과를 지키지 못하면 좋은 최고경영자(CEO)가 아니죠. 투자 성과가 헛되지 않도록 지켜 나가야 할 책임이 있잖아요. 그게 실용 아닙니까. 대북 지원도 그래요.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북한 동포들이 굶어죽는 것을 방치해선 안 됩니다. 내가 배고픈데 옆에서 배 두드리고 있으면 그 아픔은 안 잊혀요. 한이 남지 않겠어요. 통일된 후에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정부가 싸움을 하더라도 먹여놓고 싸움을 해야지. (쌀이 군으로 들어간다고 하는데) 군대는 우리 동포 아닌가요.”

-2006년에 왜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직을 수락하셨습니까.
“저도 왜 한나라당으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나라당은 사실 ‘웰빙당’입니다. 당에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데 윤리위원장 할 사람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말로 ‘인 아무개는 어떠냐’ 한 거예요. 저를 장식용으로 데려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제가 ‘나는 골수 운동권이다, 박정희도 나 못 이겼다, 내가 누군지 모르고 그러는 모양인데 안 하는 게 좋을거다’ 그랬어요. 그런데 강 대표가 그 얘기를 듣더니 ‘그러면 더 모셔와야 한다’고 했다더군요. 강 대표가 황우여 사무총장에게도 물어봤는데 황 총장이 적극 찬성했어요. ‘그 분이 오시면 우리 당에 큰 공헌을 할 것’이라고 하면서. 제가 감사원 부정방지대책위원회에 있을 때 황 총장과 4년을 같이 일했어요. 강 대표가 ‘당신이 인 목사를 잘 안다니 잘 됐다, 데려와라’ 한 거지요. 황 총장이 특명을 받고 우리 교회에 한 달을 다녔어요. 인천에서 여기까지 새벽기도 왔지, 수요일 저녁에 왔지, 주일에도 왔어요.”

-교인들 반대도 많았고, 변절자라는 말을 들으셨죠.

인명진 목사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부담스럽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1970년대 초반부터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 기라성 같은 분들을 곁에서 도와드리고 함께 일하다 보니 어떤 사람을 만나도 정신적으로 압박받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강윤중기자
“교인들이 ‘차떼기 수구정당에 목사님이 왜 가시느냐, 가면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가 다 무너진다’고 반대했어요. 황 총장을 앞에 놓고 ‘당신이 누군데 여기 와서 목사님을 데려가려고 하느냐’고 욕하고…. 그러나 결국 교인들이 마음을 바꿨습니다. ‘한나라당이 다 잘 되면 무엇하러 목사님 오시라고 하겠나, 그러니까 가셔야 하는거 아니냐’ 하더군요. 교인들이 1주일 동안 모여서 기도하고 투표까지 했어요. 또 민주화 운동을 평생 같이 했던 후배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식구들은 더더욱 반대했고. 집사람이 ‘박근혜가 누구냐, 생전 박가 하고는 상대도 하지 말고 혼인도 하지 말라고 하더니 어떻게 거기를 가느냐’고 하더군요. 한나라당으로 간 뒤에 변절했다고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후배들이 거의 다 발을 끊었어요. 한나라당 가면서 후배들을 잃었어요. ‘위대한 변신’ ‘위대한 변절자’라고 하더군요. 후배들이 저하고 왕래도 안 하잖아요. 예전에는 설에 100여명씩 세배를 왔는데 요샌 안 와요. 희생이 큽니다.”

-개인적으로 잃은 게 많으십니다.
“제일 아쉽게 생각한 건 ‘기독교환경운동연대’ 대표를 그만둔 일입니다. 제가 우리나라에서 환경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했어요. 80년대 전두환 정부한테 쫓겨 나서 호주에 갔다가 다시 한국에 와서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세웠는데 그때 개량주의라고 욕 많이 먹었어요. 전두환과 싸워야 하는데 웬 환경이냐 이거죠. 이 단체가 나중에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됐어요. 열심히 돈도 대고 일도 했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대운하를 한다는 것 아닙니까. 환경운동 실무자들이 난처해 하는 겁니다. 자기 대표가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인데 자기들은 대운하를 반대해야 하니까. ‘내 눈치보지 말고 반대해라, 대운하가 된다 해도 계속 반대하는 세력이나 환경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더라도 이게 제대로 된다’ 했어요. 이 사람들이 대운하 반대 국민회의를 만들었는데 제가 대표니까 제 이름을 넣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넣을 수가 있나요.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분위기예요. 그래서 그만뒀습니다. 제가 만들고 25년간 지켜왔던 그 단체를 떠났어요.”

-한나라당을 질타하는 발언을 할 때, 당 내부에서 압력은 없었습니까.
“무슨 말을 하건 누구한테도 제재를 당해보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당이에요. (하하) 강재섭 대표도 나한테 한마디 얘기를 안해요. 오히려 실무자들이 염려스러우니까 ‘위원장님 그렇게 말하면 기자들이 다 글로 써요, 기자들 조심하세요’라고 말했지. ‘경향신문·한겨레신문·오마이뉴스 저것들한테 이용당한다’고. 제가 징계할 때도 일절 간섭을 안 했어요. 그런데 한나라당이 재미있는 게, 간섭은 안 하는데 내 얘기를 듣지는 않아요. (하하) 나한테 요만큼 역할을 주고 더 이상은 우리 기득권을 넘보지 말아라, 이거죠. 저는 듣든지 말든지 계속 얘기했어요. ‘이건 역사적인 기록이다, 언젠가는 당신들이 내 말 안 들은 것 후회할 거다’ 하는 심정으로. 그런 점에서라면 저는 평상시에 훈련이 된 사람입니다. 목사가 얘기해도 교인들이 안 듣잖아요. 안 들어도 계속 얘기하지요.(하하)”

-그래도 한나라당에 변화를 일으키는 데 일정부분 기여하지 않았습니까.
“2006년 12월에 검증위원회 만들자고 한 게 제 아이디어입니다. 박근혜 대표가 덜컥 받아들이더라고요. 저는 ‘박근혜만 좋아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명박 후보 쪽을 많이 설득했어요. 이상득 부의장한테 ‘문제가 있더라도 당에서 얘기를 다 해야 본선에 가서 문제가 없다’고 했죠. 얘기 듣더니 그럴 듯하다고 하더군요. 실제로도 그랬지요. 국민들이 BBK 얘기를 지겹게 들었거든요. 그래서 본선에서 BBK 얘기가 나와도 ‘저거 늘 있었던 얘기인데 지겹다’ 한 거죠. 이명박 대통령이 경선에서 이긴 건 검증위 덕분이고 제 덕분이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친이(李)’인가.(하하)”

-‘친이명박’이라는 비판을 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된 겁니까.
“이명박 대통령과 예전부터 아는 사이긴 하지만 서울시장 재임 이래로 따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차 한 잔 마신 적 없고 한나라당 들어간 뒤에 전화 한 통 한 적이 없어요. 경선 끝나고 만났지요. 공식적으로 만난 건 검증청문회 때였고요. 박 전 대표도 잘 모르지만 측근 중엔 가까운 사람들이 많아요, 이성헌이라든지. 이 사람들이 저를 친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지 왜 친이로 만듭니까. 저는 마음을 열었는데 그 쪽에서 마음을 안 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관계를 생각하면 박근혜 전 대표에게 마음을 연다는 게 쉽지 않았을 법도 한데요.
“박정희와 박근혜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쉬운 건 아닙니다. 딸이니까. 그래도 저는 ‘얼마 살지 않을테니 생전에 박근혜와 화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신통찮지만 그래도 제가 성직자 아닙니까. 매듭을 풀어야 한다고 마음을 정리했어요. 각오하고 갔다 이거예요.”

-결국 박 전 대표와의 관계 개선에는 실패한 셈이네요.
“다른 건 좋은데 박 전 대표의 역사관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검증청문회에서 5·16과 유신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니까 구국혁명이라고 하더군요. 이명박 후보, 흠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건 앞으로 안 하면 됩니다. 자녀를 또 위장취업 시키겠습니까. 그러나 박 전 대표의 역사관은 우리나라의 장래가 달려있는 겁니다. 인혁당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고서도 놀랐어요. ‘아버지가 한 일에 대해 유감스럽다,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하면 피해자들 마음이 풀어지는 건데 ‘그건 법이 한 거다’라고 말하더군요. 아직도 자기 아버지가 한 일이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병신이 됐는데…. 저도 비가 오고 날이 궂으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픔을 느껴요. 그런 사람이 아직도 많이 살아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5·16을 군사쿠데타라고 역사를 정리했잖아요. 그런데 박 전 대표는 그걸 공식적으로 부정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 된다고 생각해봐요. 그건 역사의 후퇴죠. 대통령이 되려면 박 전 대표가 생각을 바꿔야 해요.”

-박 전 대표가 친박계의 복당을 요구하는 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쫓아내야 할 사람들을 또 끌어들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중요한 문제가 얼마나 많은데 만날 복당 얘기만 합니까. 자리라는 게 자기가 만드는 거지 누가 주나요. 박 전 대표도 한나라당에서 자기 자리는 자기가 만들어야 해요. 그런데 자꾸 자리 달라, 인정해 달라, 복당시켜야 한다 하니까 답답하기 짝이 없어요. 저는 박 전 대표가 심리적으로 경선에 불복하는 것 아닌가, 아직도 이명박을 경쟁자로 생각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떼 쓰고 요구하는 것 같아요.”

-한나라당에서 일하는 동안, 괜찮은 정치인도 눈에 띄던가요.
“많아요. 한나라당 의원들의 개인적인 심성이나 능력이 통합민주당 의원보다 평균적으로 뛰어날 겁니다. 한나라당이라는 분위기나 시스템이 그들의 좋은 점을 담아내지 못해서 그렇지요. 윤리위원으로 같이 일했던 박세환 의원, 겪어보니까 사람이 순박하고 좋아요. 친박이라고 알려졌는데 한 번도 친박 티를 안 내요. 진짜 공정해요. 김희정 의원도 좋은 사람이에요. 낙선했는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또다른 아쉬운 점은 없으신가요.
“여성위원회에서 심형래 불러다 강연 들은 것. 대통령은 전등불 끄라면서 물가 걱정하고 있는데 한나라당 여성들은 그런 얘기 들으면서 박수나 치고 깔깔거리고…. 제가 이 사람들 징계하려고 했는데, 너무 피곤하고 끝이 없겠다 싶어서 안 했어요. 제가 그동안 헛수고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 병은 못 고치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공천 탈락한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는데.
“그럼요. 저 때문에 공천 못 받은 사람한테 미안하고, 당원권 정지되고 징계받은 사람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고. 제가 양심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에게 사심이 없었다는 겁니다. 윤리위원장으로 갔으니 직무를 다 한 거였지요. 어떻게 보면 한나라당이 얄미워요. 피 묻히는 일은 철없는 사람, 순진한 사람 불러다가 시키고. 그런 의미에서 이용당했다는 느낌도 들지만, 나라 잘 되기 위해 이용당한 거야 잘한 일이지요.”

-목회자로 돌아오셨는데,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당사자니까 할 얘기도 없고 부끄럽죠. 한국 교회는 물질중심적이고 타락했어요. 저도 ‘목사라는 사람이 정치감투 쓰려고 권력 주위를 빙빙 돈다’는 비판을 들었던 게 가장 가슴 뜨끔했어요. 장로가 대통령이 된 게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 대통령은 교회하고 관계를 끊어야 해요. 그럼 교회가 난리가 나겠지요. 은혜도 모른다고, 배신했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이명박이 교회를 봐주면 교회는 무너져요. 교회를 역차별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살아요. 밀착할 경우엔 이명박이 망하면 교회도 같이 망합니다.”

<경향신문_이중근 특집기획부장. 최희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