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_기도_書_말씀

전인적인 참살이를 향하여

전동키호테 2008. 2. 22. 21:07

 전인적인 참살이를 향하여
* 박총 - TST(토론토대학 신학부) 재학중

 

새 대통령과 함께 시작하는 2008년입니다. 이명박 씨를 지지한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역대 대선 후보 중 가장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양반이 대통령이 되지 않기를 바란 사람의 입장에서 선거 결과를 평가하자면, 이번 대선은 먼저 노무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심판의 성격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경제가 온 국민의 종교가 된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비리가 많다고 하더라도 “아무렴 어때. 경제를 살린다는데….”라는 말이 보여주듯 돈만 더 벌게 해준다면야 도덕성 같은 것은 상관없다는 이 시대의 천박함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독자들은 아마 황우석 줄기세포 연구 논란이 한창일 때 벌어진 텔레비전 토론에서 모 일간지 의학전문 기자가 했던 말을 기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황우석의 잘못을 지적하는 상대편 토론자를 반박하면서 “진실보다는 국익이 중요하다”고 했다죠. 이 저주 받을 명언은 이번 대선에서 “도덕성보다 경제가 중요하다”는 말로 되살아났습니다. 사실상 이명박의 당선은 황우석 사태 때 그가 저지른 파렴치한 사기행각에도 불구하고 그가 국가를 먹여 살릴 거라며 옹호하던 여론이 일었을  때부터 예견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서구 물질문명의 역사와 실상
국민들은 추진력 있는 사람이 당선됐다며 앞으로 이 나라 경제가 활짝 펴서 명실상부한 선진국에 진입하기를 기대하고 있고, 교회에서는 교회 장로가 대통령이 됐으니 청와대에 예배당을 지어 찬송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면 이 나라가 복을 받아 더 부강해질 거라고 합니다. 청와대에 예배당만 지으면 나라가 잘될 거라는 어이없음이야 차치하더라도, 요즘에도 여전히 일부 목사님들이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가 잘 살고 다른 종교를 믿는 나라는 못 산다고 말하는 걸 보면 어째 좀 부끄럽습니다.
막스 베버(Max Weber)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옳다면 기독교가 근대 산업 자본주의 발전의 정신적 동력이 된 것도 사실이겠지만, 역사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서구사회가 독점하고 있는 부유함이 기독교적 가치에서 왔다기보다는 맘몬을 숭배한 결과임을 알게 됩니다. 그네들의 풍요로움이란 것이 식민지 경영 이후로는 죽이고 뺏으면서 이룬 것이고, 산업혁명 이후로는 힘없는 노동자와 자연환경을 착취하고 파괴하면서 이룬 것이 아니던가요.

20세기 들어서는 다국적 기업의 형태를 통해 가난한 나라의 부를 교묘하게 갈취하고, 금융자본주의 시대인 근래엔 핫머니의 유입으로 작은 나라 하나 쥐락펴락하는 건 일도 아니더군요. 더구나 미국 같은 경우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나라에 대한 내정간섭은 물론이요, 반미 성향의 정부를 전복시키기까지 하면서 얻어낸 풍요로움이 아닌지요. 켄터키의 농부이자 시인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가 9·11 사태가 터지고 나서 쓴 영감 깊은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런 식으로 유지되는 미국식 폭력의 경제(economy of violence)는 필연적으로 피착취자들에 의한 테러와 전쟁을 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질이 높아지기를 원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풍요로움 또한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서구의 소비주의와 같은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가 미국 수준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려면 지구가 열 개라도 모자란다고 합니다. 따라서 한쪽의 지나친 물질적 풍요로움을 위해 이 초록별 안에서 착취가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당하는 쪽은 역사가 증명하듯 언제나 약자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마따나 서구의 근대적 삶이란 “나의 행복을 위해서 타인의 불행을 전제로 하는” 삶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봅니다.

더구나 그렇게까지 악랄하게 군 덕택에 서구와 그 뒤를 따른 한국이 현실적으로 풍요로운 것도 사실이지만, 과연 우리가 진실로 복음적인 참살이(wellbeing)를 누리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서구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이 무엇인가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했다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세상을 만들어 놓지 않았나요. 부익부 빈익빈이란 말이 차라리 정겹게 느껴지는 20:80의 세상, 자신의 삶과 소중한 사람들을 돌아볼 겨를도 없는 분주함과 비인간적 경쟁의 세상, 노동자들의 가정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비정규직이라고 다 잘라버리는 세상, 재고무기를 소진하고 석유확보를 위해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해치는 세상, 소비가 가장 중요한 자기정체성 구축 방법이 되고, 쇼핑이 가장 신성한 권리가 되는 세상(9·11 사태 이후 부시가 패닉에 빠진 미국 국민에게 제일 먼저 한 얘기가 쇼핑을 계속하라고 독려한 것이었음을 기억하십니까?) 무참한 환경 파괴로 물 한 모금조차 맘 놓고 못 마시는 세상이 되지 않았나요.

경제개발로 인해 옛날보다 더 많이 먹고 더 좋은 집에서 산다고 하지만, 실상은 농약과 항생제로 오염된 채소와 고기를 먹으며 화학물질을 뿜어내는 방에서 자는 것이잖습니까. 그래서 유기농이니 황토방이니 하지만 옛날보다 더 많이 벌어서 결국엔 옛날에 먹던 것, 살던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우리가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싶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물질적으로는 불편해도 자연과 공존하며 풀뿌리 공동체의 우애와 환대(hospitality) 속에 살아가는 부탄 - 국가행복지수 1위로 뽑혔다죠 - 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비단 저만은 아닐 것입니다.

 

전인적인 참살이를 향하여
어쩌면 제가 반서구주의자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서구인들이 이 땅에 전해준 복음과 함께 그들이 들여온 서구물질문명을 복음인 냥 받아들이고, 교회가 부흥하고 예수 잘 믿을수록 나라도 개인도 부자 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고 성서에서 말하는 복음적인 부유함과 얼마나 먼 것인지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더구나 서구물질문명에 대한 복음적인 자기반성 없는 한국의 선교사들이 서구에서 물려받은 폭력과 파괴의 경제를 선교지에서 재차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서글픕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전인적인 참살이(the whole wellbeing)를 누리려면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이 요구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브루더호프와 같은 구별된 공동체에서 세상과는 다른 철저한 독자적인 가치와 삶의 방식을 추구하거나 좀 더 급진적으로는 근대물질문명을 거부하고 과거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아미쉬(the Amish)처럼 사는 것입니다.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나온 교회와 문화의 관계 중에서 분리모델이나 역설적 관계모델을 폄하하고 변혁모델만이 최고라고 배워 온 한국의 대다수 그리스도인처럼 저 역시 아미쉬 같은 공동체를 시대부적응자들의 도피성으로 조롱하며 그들에겐 세상을 바꿀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속단했습니다. 하지만 웬만한 변혁모델은 타협모델이 되고 말 정도로 악한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이 얼마나 능력 있는 것인지 점점 깨달아갑니다. 오늘날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하우어워즈(Stanley Hauerwas)의 말대로 교회 공동체가 교회다움과 공동체다움을 지키는 것이 다른 어떤 변혁적 시도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이러한 구별된 공동체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공, 물질, 기술, 속도, 경쟁, 가공, 편리, 첨단, 소비, 풍요, 축적과 같은 것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라고 부름 받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그러한 세상의 흐름에 시비를 걸기보다는 주어진 게임의 룰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앞서고 성공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해왔습니다. 이제는 '예수 믿는 이들이 잘 돼야 전도도 된다'라는 핑계 하에 일류대와 전문직과 고급 아파트를 추구해왔던 삶의 방식을 참회하고 앞으로는 평화, 나눔, 생태, 녹색, 공생, 느림, 공동체, 검소, 묵상과 같은 생활 방식을 추구해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점점 이러한 실천이 어려운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만, 이것이야말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린다'(롬 12:1-2)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슬프게도 오늘날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기존의 삶의 방식과 세상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 믿음의 세속화된 형태인 긍정적 사고와 생활 습관만 가지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고 떠들어대는 『긍정의 힘』과 같은 책이고, 여전히 우리에게 역할 모델로 소개되는 이들은 하나같이 하나님 잘 믿어 서울대, 하버드에 갔다는 사람이거나 신앙의 힘으로 크게 성공했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분들의 삶이 주는 메시지를 송두리째 부정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 믿고 출세한 사람들, 경쟁 사회 속에 우뚝 선 사람들 대신 예수 믿고 나서 느림과 검소함, 더불어 사는 공생을 추구하게 되었고, 신앙의 힘으로 평화와 나눔, 녹색의(생태적인) 삶을 실천하게 되었다는 사람들의 간증이 늘어나고 회자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큐티진 독자들 중에서 그러한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2008년 QTzine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