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_기도_書_말씀

'제1회대한민국신학대학원생 설교대회'를 보고…

전동키호테 2007. 3. 29. 13:18

온누리교회의 두란노서원과 한국설교학회가 '제1회 대한민국신학대학원생 설교대회'를 개최하였다. 설교문과 영상을 심사하여 장장 4개월여의 심사를 거쳐 4월 9일 온누리교회에서 대망의 결선대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상당한 금액의 상금이 걸려 있고 주관하는 기관과 단체의 권위 등도 매우 큰 대회다. 많은 신학생들이 이 대회에 참여한 듯 보이고 여기저기 광고가 되는 걸 보니 꽤 큰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그러나 매주 '설교'를 하는 나는 이 대회를 볼 때 남의 얘기 정도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눈앞에서 뻔히 벌어질 때 느끼는 당혹감과 같은 느낌이 든다.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보거나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 새치기 하는 사람들을 볼 때의 당황스러움이나 언짢음 같은, 마치 내 속이 들킨 것 같은 당혹감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이 대회가 싫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모른척하기에는 '설교'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너무 크다. '대한민국신학대학원생 설교대회'라는 이름을 모른척하기에는 대한민국의 신학대학원생으로 지내며 '설교'를 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제 앞으로 '목사'가 되어 설교를 할 사람으로서 너무나도 불편하고 좀더 보태자면 거북하고 모욕스럽기까지 하다. 이렇게까지 '모욕' 당하는 '설교'를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이 대회는 '설교'를 모욕하는 대회다. 동시에 '설교'의 근본을 뿌리 채 흔들어 놓을 수도 있는 위험한 대회다. '설교'를 '경쟁을 통한 대회'에서 '평가'하여 '수상'한다는 자체가 설교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자, 왜곡이다.

 

설교대회가 위험한 이유

 

첫째로 설교는 각 개인에게 적용되는 말씀이기 때문에 군중 혹은 일반 다수가 공히 그 가치와 의미를 판단할 수 없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공적으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개인에게 말씀하시는 과정이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설교자를 통하여 같은 설교를 듣는다 하더라도 이 말씀은 다수를 향한 메시지인 동시에 다수 안에 있는 각 개개인에게 선포되는 말씀이기 때문에 각 개인에 따른 이해와 감상이 다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들려지는 말씀의 정보는 동일할 수 있으나 말씀이 가지는 의미와 그 안에서 개개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다르다는 것이다.

설교의 메시지는 다수에게 동시 다발적으로 전해지는 정보의 전달만이 아니다. 만약 이것만으로 설교를 평가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럴 때에 그것은 설교가 아니라 강의다. 그러나 이 정보를 의미 있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어떤 기준으로도 평가할 수 없다. 각 개인의 상황과 느낌이 결코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은 객관적이나 청자는 철저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주관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말씀 적용의 개별성으로 나타난다. '설교'를 평가한다는 것, 특히 '대회를 열어 각 설교의 우열을 나눈다'는 것은 이러한 설교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을 무시하는 것이다.

 

둘째로 설교는 신학의 반영이다. 요즘에야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의 설교에서 '신학'을 제거하는 경향이 강하다. 거의 모든 설교가 탈신학화하여 모두가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설교를 한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겠지만 나는 이러한 경향이 설교의 타락과 질적 저하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신학은 신앙의 전제다.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사고체계와 구조를 신학이라고 하고, 설교를 이러한 신학적 구조를 통한 성경 메시지의 전달이라고 할 때에 다른 신학체계를 가진 자들에게 동일한 설교가 객관적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

나는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한다. 그런 나에게 알미니안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설교는 싫고 좋고의 차원, 혹은 우열을 나누는 차원과는 또 다른 이해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즉, 각기 다른 신학적 배경과 틀을 가진 모든 자들에게 동일하고 객관적 가치를 가진 설교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신학적 성격을 모두 배제한 설교를 한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자체가 신학이고 그것을 버릴 수 없으며 이를 통하여 설교한다면 신학을 배제한 설교, 신학을 무시한 설교는 이미 성경 이해의 어떤 틀 - 신학적 유산으로 모두에게 물려진, 이는 개혁주의든 알미니안이든 상관없이, 각각의 신학 유산 안에서 -을 무시하고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각각의 신학적 유산들을 통하여 진리를 각 시대에 전달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설교'는 인간이 상 받을 만한 일이 아니다. 설교는 인간이 아무리 잘한다고 한들 '인간의 이름'으로 '인간'이 '상주고 상 받고' 할 만한 일이 아니다. 설교를 하는 것도 설교를 듣는 것도, 은혜의 산물이지 그것이 내 자랑이 될 수 없다.

인간의 타락한 죄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들으려는 의지까지도 오염시켰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능력도 없지만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는 성경의 역사이자 인류의 역사다. 하나님께서는 매 시대에 인간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하셨지만 인간은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듣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부정하고 핍박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은 그 자체로도 무한한 은혜다. 아무 자격도 없는 자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이다.

그런 인간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이런데도 '말씀을 전하는 일'이 '인간이 상 받을 일'인가? 상과 칭찬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지 인간이 인간에게 할 것은 아니다. 그저 아무 자격 없는 우리에게 말씀을 허락하신 그 사건 하나 만으로도 감당 못할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아무리 설교를 잘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한 설교'가 될 수 있을까?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모두 죄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식의 틀 속에서 과연 '칭찬 받을 만한 일', '상 받을 만한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설교하고 설교를 듣는 것은 '성령'께서 붙잡아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설교에 대하여 가질 자세는 평가하고 상주고 칭찬하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겸손함이다.

 

넷째로, 모두에게 인기 있는 설교, 곧 '흥행에 성공한 설교'는 가장 타락한 설교의 모습이다. 인간이 듣고 인간이 평가하여 상주는 설교의 기준은 곧 인간이다. 아무리 경건하고 거룩한 기준을 들먹인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인간들을 대표하는 인간'의 수준에서 판단되는 것이다. 극단적인 표현일지 모르지만 결국 인간의 귀에 달콤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을 때가 많았다.

이사야, 에레미야, 에스겔의 설교는 대중의 외면을 당한 설교였다. 그 시대에 가장 적절하고 명확하며 신적인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했지만 오히려 대중은 그들을 핍박했다. 그러나 반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우상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던 자들, 멸망과 파괴 심판으로 이끌었던 자들의 설교는 귀에 달았으며 모든 자들이 즐겨 듣고 '흥행'에 성공한 자들이었다.

우상 숭배가 가장 심했던 시기에 가장 많은 '산당'들과 '성직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매일 매일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고 만족시키는 종교적 행사들과 귀에 착착 감기다 못해 정신을 빼앗을 정도로 멋있는 '설교'를 했다.

그렇다. 나의 글이 이 대회를 주관하고 특별히 '심사'하시는 '목사님'들에 대한 불경과 불손일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분들의 '실력'과 '경건'과 '신학'을 무시하는 오만방자함일 수도 있다. 나는 그 분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을 공격하는 것이다. 결국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타락은 '강단 타락'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강단'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타오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화려한 조명'과 '더 화려한 무대 효과'와 이를 받쳐주는 더 정교하고 탁월한 '영상과 여러 장치'들로 가득 찼다. 이러한 화려함은 '진리'를 가렸다. 더 이상 '진리'에 집중하지도 집착하지도 않는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흥행'이다.

어디선가 영화감독을 모셔다 놓고서는 '흥행의 7가지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성경을 중심으로 한 설교의 흥행'에 대하여 강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떡하겠는가. 성경과 교회의 역사 속에서 '흥행'한 설교는 타락한 설교였을 때가 훨씬 많았다. 결국 인간의 귀에 착착 감기는 설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버릴 수밖에 없다. 인간의 죄성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귀에 맞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죄성에 만족스럽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 진리와 비진리, 거룩과 비거룩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굳이 이 땅에서 '설교'를 평가해서 '상'까지 주고 '명예'로 삼을 필요까지는 없다. 천국에서 받으면 된다.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면 되는 것을 왜 굳이 지금 '이 땅'에서 '인간'들의 '손'을 빌려서 인정받으려 하는지 모르겠다. '흥행하는 설교'가 문제가 아니라, '바른 설교'가 필요하다. 그런데 '바른 설교'는 평가의 대상도, 우열의 대상도 될 수 없다.

 

다섯 번째로 진정한 설교의 평가는 점수로 매겨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 성공한 설교, 정말로 잘한 설교가 그렇다면 아주 없겠는가? 그렇지 않다. 정말로 잘하는 설교, 훌륭한 설교는 분명히 있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전달하시고 이를 충실히 잘 전달한 설교자의 설교는 분명히 있고 이 설교는 그 자체로 큰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설교가 없겠는가? 있다.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설교는 '대회'의 '경쟁'혹은 '다른 사람'의 평가를 통해 '증명'되거나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훌륭한 설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 생각에는, '설교'를 듣는 순간 그것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설교 전체의 논리의 흐름, 문장과 어휘의 선택, 신학적 주제, 적절한 주해, 목소리, 동작, 적절한 예화 등으로 채점표를 가지고 점수를 매겨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설교란 성령이 역사하신 것

정말 좋은 설교는 중심이 있는 설교다. 신학교 때 '설교 실습' 시간에 한 동기 전도사는 너무나도 유창한 말솜씨, 탁월한 예화, 품위 있는 제스처, 적절한 성경주해 등으로 완벽한 설교를 했지만 우리는 그 설교를 이내 잊었다. 그건 설교라기보다는 명강사의 명강의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이 많고 어눌하고 예화도 없이 담담히 말하던 어느 만학의 전도사의 설교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설교는 중심의 표현이다. 설교자의 중심이 중요한 것이다. 이 중심은 포장된다고 가치를 가지고, 포장되지 않는다고 해서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비록 어눌하고 작은 소리였으나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진리에 대한 열심과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 가치와 의미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짓은 아무리 포장하고 또 포장해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냥 포장지의 화려함만이 있을 뿐 내용의 빈약함은 이내 관심과 기억에서 사라질 뿐이다. 마치 어린 시절 받았던 요란한 포장의 과자 선물 세트처럼 포장지 안에 있는 빈약한 과자들은 버려지거나 잠시의 만족을 줄 뿐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한 것과 같다.

점수표를 들고 채점을 하며 그 중심을 볼 수는 없다. 그 중심을 본다고 한들 그것을 어떻게 평가를 하며 더구나 그것들의 우열을 나눌 수 있겠는가? 저 전도사의 탁월한 표현력이 저 전도사가 이 전도사보다 하나님 앞에 충실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명제의 정당성을 보장한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둘째로 정말 좋은 설교의 가치는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난다. 나에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설교가 있다. 내 평생에 가장 귀한 설교가 있다. 그런데 그 설교가 내 평생에 있어 가장 귀하고 의미 있는 설교로 남게 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 설교를 듣고 내가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 인생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설교는 '나를 변화시킨 설교'다.

설교를 하는 사람이 되어서 설교가 매우 어려울 때가 있다. 언어의 벽에 부딪칠 때 상당히 어렵다. 좀더 쉬운 언어라기보다는 좀더 적절한 언어를 택하는 일이 참 어렵다. 그러나 이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어려움, 때로는 고통이 되기도 하는 것은 아무도 내 설교를 듣고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사람이라, 만족스러운 설교를 하고 내려올 때가 있다. 원고도 나름대로 잘 정리되었고 표현도 적절했고, 열정적으로 진리를 말하고 내려왔다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이 만족감은 물 한 컵 마실 틈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왜냐면 아무도 설교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설교를 통하여 얻은 것은 고사하고, 다음번에 만날 때에는 마치 그 문제에 대해서 내가 한 번도 설교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에 설교의 한계와 벽에 고통을 넘어서 절망 가까운 것을 느낄 때도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죽을 쑤고' 내려올 때가 있다. 사람들이 듣는지 안 듣는지 도무지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식은땀을 흘리며 철저한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반응'과 '무덤덤'을 견디며 1시간을 버티고 내려올 때가 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만날 때에 그 설교에 의하여 변화된 사람들을 보게 될 때가 있다. '설교를 듣고 결단했어요. 결정했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 또 솟아나는 힘을 얻는다.

결국 설교의 성패는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설교를 통하여 '변화'될 때에 증거된다. 그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이런 설교가 진정 '훌륭한 설교'라고 나는 믿는다. 당장 눈앞의 시간을 즐겁게 보내게 해주는 설교가 아니라, 설교가 끝난 후에 비로소 진정한 기쁨과 만족, 결단으로 나타나는 설교가 진정한 설교라고 믿는다. 듣는 순간에는 몸을 비틀고 힘들어 견디어냈을지라도 그 설교로 인하여 '변화'가 일어난다면 이 설교가 진정 훌륭한 설교일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이 둘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전하는 자도 만족스럽고 듣는 자도 만족스럽고 변화도 일어나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런 탁월한 설교자들을 찾기란 매우 어렵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허락하신 은혜의 선물일 것이다. 

 

설교 평가는 인간이 하는 것 아니다

설교는 웅변이나 연설이 아니다. 비록 그와 비슷하다 할지라도 결코 그것과 같을 수는 없다. 얼마 전에 아나운서를 모셔다 놓고 설교 세미나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낀 '설교하는 사람'으로서의 당혹감과 부끄러움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것보다 좀더 심한 모욕감을 느낀 것일 뿐 둘 다 같은 사건일 것이다.

설교를 인간의 입에서 나온다고 해서 인간의 손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설교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자 모욕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입에서 나온다고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설교의 텍스트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를 전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이해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를 들어 깨달은 바를 행동에 옮기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저 인간은 전하라고 하시니까 전할 뿐이다. '인간의 지식'이나 '인간의 사상'을 첨가해서 전하니까 '인간의 평가'를 기대하는 것이다. 과연 이 과정 중에 '상 받을 일'이 무엇이 있는가? 구원해주신 것도 갚을 길 없는 은혜인데 거기에 '설교'하는 일까지 맡기셨다고 생각할 수 없는가?

이제 제발 설교의 권위를 떨어뜨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목사님들께서, 교수님들께서, 교계의 어른들께서 이제 더 이상 설교의 권위를 떨어뜨리지 않았으면 정말 좋겠다. 이런 모습들을 볼 때마다 설교자로서 앞으로 살아가야할 후배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 분노라기보다는 슬프다. 설교자에게 설교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는 '설교'. 이 '설교'가 이 땅 위에 온전히 회복되기를 기도해 본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 설교를 왜곡하고 모욕하며 그 권위를 파괴하려는 모든 시도가 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아프게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주의 동역자들이, 나와 같은 젊은 설교자들이, 이제 목사가 되기 위하여 앞으로 가는 나와 같은 전도사들이, 누구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굳건히 붙들고 그 진리만을 전하고 그 진리만을 좇아 행하게 되길 기도한다.

 

.........................  2007.3. 28  newnjoy...이수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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