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_감동_生_인물

만화가 박재동...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겁니다

전동키호테 2013. 5. 19. 09:21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겁니다
자식 위해 희생하며 살라고… 아버지가 희생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자식이 꿈이루길 바랐겠죠


	박재동 화백
채승우 기자

그 세대가 대개 그렇듯 만화가 박재동(朴在東·61·사진)에게 아버지는 대화 상대가 아니었다. "아버님, 오셨습니까?" "그래, 잘 있었나?" 일상에서 부자(父子)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는 "아버지는 나무처럼, 기둥처럼 그냥 계시는 존재였다"고 기억했다.

만홧가게 주인으로 평생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던 박재동의 아버지는 1989년 세상을 떠났다. 예순. 수십 권의 일기와 가장 사랑했던 명랑만화 '악동이와 영팔이' 한 질을 유산으로 남겼다.

박재동은 작년 예순을 맞았다. 아버지의 인생만큼 살아본 것이다. 아버지를 이해할 자신이 생긴 것일까. 23년 만에 그는 아버지가 남긴 일기장을 읽어내려갔다.

자식은 부모에게 언제나 바보인 듯하다. 박재동은 일기 속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발견했다. 평소 그토록 말이 없던 '무언(無言) 가장'이 사실 자신을 향해 끝없이 말했다는 것을, 아들에게 궁핍을 말하기 쑥스러워서, 아니 말해도 이해시킬 수 없어서 밖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란 것을. "나는 이렇게 철이 없었을까요?" 박재동은 "일기장을 보면서 가슴을 두드렸다"고 말했다. 그러곤 일기에 답글을 달기 시작했다.

"사람에게는 흡족하다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족함은 있어야 할 텐데…. 넉넉하지 못한 부모를 탓해라."(1971년 일기) "평소 이런 말씀을 한 번도 안 하신 부모님 심정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답글) "머지않아 자녀 교육이 끝나면 나를 낳아준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1972년 일기) "저는 이토록 아버지께서 고향에 가고 싶어 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저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줄 알았어요."(답글) "오늘 밤도 아내는 마지막 청소를 하다가 심한 두통으로 쓰러졌다."(1976년 일기) "아, 저도 둔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내색도 안 하시고 웃는 모습만 보여주셨습니까."(답글) "어릴 때를 생각하면 눈 쌓인 산에 토끼 사냥을 하느라 뛰어다닌 기억도 나고…."(1987년 일기) "아, 그래요. 아버지도 어린 시절이 있었지요. 우리처럼…그래요…!"(답글) 박재동은 "아버지와의 첫 대화였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왜 일기를 썼을까. 일기장 곳곳에 그 심정을 표현했다. "자식은 옆에 있어도 부모의 일을 모른다." 박재동의 아버지는 인생을 정리할 무렵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우리는 물려줄 유산이 없다. 다만 정직했으니,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는 물려줄 수 있지 않겠나."


	만화가 박재동 화백이 그린 부모님의 만홧가게 모습. 꼬마에게 만화를 건네는 이가 아버지. 빙수를 만드는 이가 어머니다.
만화가 박재동 화백이 그린 부모님의 만홧가게 모습. 꼬마에게 만화를 건네는 이가 아버지. 빙수를 만드는 이가 어머니다.

아버지! 이렇게 힘드신 줄 몰랐어요

전쟁 세대는 불행하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죽은 자들이다. 하지만 살아남아 행복한 사람도 많지 않았다. 박재동의 아버지 박일호(朴日浩)도 그랬다.

그는 두 번 군에 복무했다. 6·25 발발 직후 학도병으로 참전했지만, 군번이 없다는 이유로 4년 더 복무했다. 일기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특권층 자제들은 군대에 가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며 나 보란 듯했다. 그들은 애국자인 척하지만, 진짜 애국자는 농어촌의 청·장년들이었다. 순박한 그대로 전선에 나가 몸을 바쳐 싸웠다."

제대 후 그는 고향 울산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폐결핵을 얻어 학교에서 쫓겨나는 불운을 겪었다. 치료 과정에서 간경화까지 겹쳤다. 하지만 일기장 어느 구석에도 이 일로 세상을 원망하는 문장이 없다. 박재동은 "보상받아야 마땅했지만, 그 세대가 그랬듯 아버지도 '다 내 팔자려니' 생각했겠죠"라고 말했다.

생계를 잃은 가족은 부산으로 내려갔다. 고향은 눈이 있어 '밑천 없는 천한 장사'(어머니 표현)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일기에 썼다. "이불 하나, 동이 하나, 솥 하나 들고 부산의 빈민 지대 전포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고생길을 열었다."

1959년 부산 전포동에 셋방을 얻은 박재동의 부모는 연탄 배달, 풀빵 장사, 팥빙수 장사를 하다가 골목 만홧가게를 적은 돈으로 인수했다. 박재동의 만화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하루에 만화 20권을 보았어요. 1년이면 7000권, 3년이면 2만권…."

그래도 가난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일기에 "온종일 분주히 날뛰어도 고작 제자리걸음"이라고 한탄했다. "두 살 난 딸아이는 먹지 못해 차마 눈뜨고 못 볼 형편이었다. 그래도 입은 살아서 찾는 것이 얼음이었다. '어염, 어염(얼음)….' 이미 사경에 이른 애처로운 목소리. 참다못해 얼음을 한 사발 갈아서 단물을 담뿍 뿌리고 눈을 딱 감고 내밀었다. 단숨에 먹어치운 딸아이는 앞으로 엎어져 납덩이처럼 착 늘어졌다."(1971년 일기) 박재동의 여동생은 이때 기적적으로 일어났지만, 훗날 재생불량성 빈혈로 마흔 즈음에 세상을 떠났다.


	박재동의 아버지가 1971년 4월 5일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18년 동안 쓴 일기장.
박재동의 아버지가 1971년 4월 5일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18년 동안 쓴 일기장.

◇천대받던 만화에서 의지를 배웠어요

가난은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천시(賤視)는 살맛을 떨어뜨렸다"고 박재동은 회고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일기에 썼다. "아내는 파출소에서 밤을 지새운다. 어쩌다 만화쟁이가 된 죄로 불량 만화 단속에 걸려 즉결에 간다고 집을 떠났다. 당국의 지시에 따라 반공(反共)만화를 보급해도 간첩을 잡는 데 총을 쏜다고 불량 만화라고 한다. 그렇다면 간첩을 무엇으로 잡으며, 간첩은 그렇게도 무력하단 말인가."(1972년 일기)

박재동은 아버지에게 답글로 말했다. "당시 만화는 사회악으로 지목돼 어린이날이면 학부모들이 만화책을 불태웠지요. 어떤 학부모는 아이 귀를 잡고 우리 집을 나가면서 '남의 애 다 버리는 장사, 오래오래 해먹어라' 하기도 했고요. 아버지, 저는 만화 속에서 글을 깨치고, 상식과 지식을 알게 되고, 약자를 깔보지 않고 배려하는 마음을 배우고, 어려움에 맞서 꿋꿋이 이겨내는 심성과 의지를 배웠어요." 그는 "내가 한겨레 그림판에서 평가받은 것은 아동 만화의 발랄한 특성을 신문에 끌어들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재동의 어머니도 아버지의 일기에 답글을 달았다. "당신이 옳은 소리를 하면 '만홧가게 하는 주제에' 하고 무시하고, '평생 만홧가게나 해먹으라'고 악담까지 했지요. 그러면 내 자식만은 당신들 뒤지지 않게 훌륭하게 키우리라. 사람들이 얕보고 무시하면 내 마음은 강철같이 다져졌어요. 우리 희망은 오직 세 아이라고."

박재동은 어머니를 "초능력자"라고 말했다. 병든 남편을 대신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3시간밖에 못 주무셨어요. 몇 구멍 연탄을 앞에 두고 여기는 떡볶이, 여기는 어묵, 여기는 꽈배기. 새벽에 물을 길어와 팥을 삶고 밀가루를 반죽하고 청소하고, 아버지 약 해 드리고…."

아버지는 이렇게 썼다. "부산 생활 20여 년 동안 연탄과 함께 살아온 아내. 이제는 연탄에 중독돼 이 장사도 청산해야 할 날이 다가온다."(1980년 일기) '아내의 투지'라는 5년 뒤 일기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서툰 풀빵 장수라 몸뻬는 밀가루투성이였지. 눈물을 삼키면서 살아온 아내. 한 맺힌 내 가슴을 한없이 울린다. 그래도 '여한 없이 살았노라' 하니 더욱더 한이 맺히는구나!"

박재동은 어머니의 대답을 대신 아버지에게 전했다. "지금도 어머니는 내 한 몸 꿈적거려 온 식구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또 감사해서 피곤한 줄 몰랐다고 말씀하세요."


	가족을 그린 박재동의 그림. 왼쪽부터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 그리고 자신이다. 옆의 박재동 그림은 일기를 쓰는 아버지, 만홧가게 ‘문예당’의 바깥 모습, 여동생을 업고 빙수를 만드는 어머니다.
가족을 그린 박재동의 그림. 왼쪽부터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 그리고 자신이다. 옆의 박재동 그림은 일기를 쓰는 아버지, 만홧가게 ‘문예당’의 바깥 모습, 여동생을 업고 빙수를 만드는 어머니다.

◇부쳐주신 돈이 부모님의 핏덩이 같았어요

'만홧가게 아들' 박재동은 공부를 잘했다. 명문 부산중·고를 거쳐 서울대에 들어갔다. 아들이 부산중학교에 합격했을 때를 어머니는 이렇게 회상했다. "엄마들이 만홧가게를 드나들면 공부 못하는 아이로 생각하는 시절에 만홧가게 아이가 부산중에 붙었으니, 만화책 속에 묻혀 살아도 제 할 공부는 다 할 수 있다는 증명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우쭐했다." 서울대에 합격했을 때는 이런 마음이었다.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만홧가게 아이도 서울대학에 붙었다!'고."

하지만 가난한 가족에게 기쁨은 종종 시름으로 변한다. 박재동이 서울대 미대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는 "우리 집에도 서광이 조금 비치는 듯하다"고 썼다. 하지만 이내 걱정한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너무나 무력하다. 검소로써 출혈을 막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재동이가 학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1972년 일기)

대학 1학년을 마친 박재동이 "학비를 벌기 위해 1년을 휴학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부모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학업을 중단해선 안 된다"고 반대했다. "어머니는 큰아들 학비 마련을 위해 동네 축담 하수구 밑에 좌판을 차리고 빙수, 어묵, 붕어빵, 삶은 계란, 도넛을 팔았어요." 그렇게 모은 하숙비 2만원을 먼저 부쳤다. 박재동은 "그렇게 움켜쥔 돈이 아버지, 어머니의 핏덩이 같았다"고 회고했다.

큰아들 학비만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1973년 일기에 "둘째 아들과 딸아이 학비 문제가 '범 아가리' 같이 벌리고 있다"고 썼다. 학비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아버지의 분투에는 시대의 풍경이 아련하게 엿보인다. "한창 인기가 상승하는 프로는 '여로'인데, 그 시간엔 책방이 텅텅 빈다. 너무 저조한 매상이라 엄두가 나지 않지만, TV를 구입하는 것이 선결 문제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1972년 일기) '툭박진' 미제 중고 TV를 4만원에 겨우겨우 구입해 만홧가게에 설치한 아버지는 "7시경에는 가게가 제법 붐벼 TV가 없을 때와 사뭇 달라진 느낌"이라고 썼다.


	일기를 쓰는 아버지, 만홧가게 ‘문예당’의 바깥 모습, 여동생을 업고 빙수를 만드는 어머니 그림

◇짤랑대던 동전 소리는 정직했습니다

가난하게 산 다른 전쟁 세대처럼 박재동의 아버지도 꼿꼿하게 버텼다. 그는 1972년 일기에 "나의 유일한 신조는 '생각하는 삶'"이라고 썼다. 박재동은 답글을 이렇게 달았다. "만홧가게 책꽂이 옆에 아버지가 써 붙여둔 글귀, '금전을 잃으면 손해다. 신용을 잃으면 큰 손해다. 용기를 잃으면 마지막이다'를 아버지의 신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아버지 모습은 '저항하는 을(乙)'이었다. "한 출판사가 독점한 뒤 신간 만화책을 무조건 다 사라고 요구했어요. 아버지는 항거했어요. 동네 일곱 만홧가게도 아버지를 따랐어요. 그러자 출판사 구역장이 책을 끊고 우리 가게 바로 앞에 만홧가게를 차렸어요. 신간을 싸게 읽혀서 무너뜨리려 한 것입니다. 2년을 버텼어요. 결국 우리 집 앞 만홧가게가 망했어요." 박재동은 "아버지가 정말로 크게 보인 순간"이라고 기억했다.

아버지는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조리에 분노하는 문장이 일기에 종종 나온다. 1972년 둘째 아들 수업료 감면에 필요한 사실증명서를 받기 위해 관공서에 갔을 때였다. 벼룩의 간을 내먹겠다고 공무원이 뒷돈을 바라며 질질 끌다가 겨우 도장을 찍어주는데 결국 수수료 거스름돈을 챙기더란 것이다. "백사(百事)가 돈 놀음이다. 각종 수수료는 정당히 내야 하지만, 거스름돈은 아예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수고료로 자진해서 받는 꼴상이 정말 아연하다." 박재동은 아버지를 '상식파'라고 평가했다. 취직한 딸아이가 "회사를 당장 때려치운다"고 했을 때 "그래도 업무 인계와 잔무까지 해줘야 한다"며 이렇게 타이른다. "비록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더라도 너의 참된 마음은 보여야 한다."(1981년 일기)

박재동은 이런 답글을 달았다. "잠잘 때가 되면 아버지 어머니는 10원짜리 동전을 하나하나 세셨지요. 저는 그 짤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 정직한 소리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이 필(筆)을 휘두를 수 있게 한 힘 말이에요." 박재동은 "아버지는 더디게 보이는 삶을 살았지만, 소시민의 그런 정직함이 탄탄하게 모여 안정된 사회를 만든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식은 앞가림만 해도 효자이네요

가난과 싸우면서도 아버지는 꿈을 꾼 듯하다. "농촌 사업은 나의 포부라고 하겠다. 그날이 올 때까지 끈질긴 투병과 부모로서의 임무인 자식 교육이 남아 있다."(1972년 일기)

아버지는 1981년 22년 부산 생활을 접고 드디어 고향 울산으로 돌아왔다. '머지않아 자녀 교육이 끝나면 나를 낳아준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이란 1972년 약속을 지킨 것이다. 어머니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세간이 큰 트럭으로 가득하다. 절반이 세 아이 책이다. 내가 구운 풀빵 수만큼 되지 않을까." 박재동의 부모는 울산 전하동에서 문방구를 열어 떡볶이, 팥빙수, 김밥을 팔았다. 365일, 하루도 쉬지 않았다. "어머니는 군대 가는 남동생에게 '면회 오란 소리 하지 마래이' 하고 말씀하셨어요. 오란 소리할까 봐 겁이 나서 먼저 그렇게 얘기한 거예요. 그러곤 화장실에 가서 엉엉 우셨지요."

하지만 자식들은 한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속은 타들어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듯, 화가는 그림으로 일관해야 할 텐데 재동이가 요즘 엉뚱하게 연극을 하느라 야단이다."(1976년 일기) "재동이는 대책도 없이 하던 일을 중단하고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를 쉽게 생각하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행동이다. 대학 나온 보람이 별로 보이지 않으니 어느 때 그 빛을 볼 것인지?"(1978년 일기) 박재동은 이렇게 답글을 달았다. "입시생을 가르치는 화실을 운영하면서 아이들 하나하나가 돈으로 보이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화를 낸 순간도 있었던 모양이다. "의욕이 없는 자식의 행동에 참을 수가 없어 한바탕 바깥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나이 30세가 다 돼서 아직 방향을 못 잡는 자식 앞에서 무엇으로 타이르겠는가."(1980년 일기) 박재동의 답글이 걸작이다. "이 일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하하." 그해 박재동은 대단히 부모 속을 태운 모양이다. "(교사로 일하면서도) 재동이가 이번 학기가 (대학원) 마지막인데 등록금이 좀 모자란다고 20만원을 빼갖고 귀성했다."(1980년 일기) 아버지가 다음 답글을 실제로 봤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그때 받은 교사 월급을 모두 학교와 학생을 위해 쓰고는 매우 개운하고 행복했어요."

박재동은 말했다. "일기를 읽으면서 '자식은 자기 앞가림만 해도 효자구나' 생각했어요. 아버지를 돕지는 못해도 적금을 들어 결혼 자금이라도 만들었어야 했는데. 난 개념이 없었어요. 내가 왜 이랬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허허허."

◇아버지! 지금 우리나라는 솟구쳐 오르고 있습니다

박재동의 아버지는 1987년까지 세 번 혼사를 치렀다. 딸, 큰아들, 둘째 아들 순서였다. 세 번째 혼사를 앞두고 아버지는 이렇게 일기를 썼다. "또다시 혼사를 치르게 돼 우리로선 부담이 크다. 우리 형세에 맞추느라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지만, 힘이 든다. 둥지를 떠나는 새끼들은 낡은 둥지의 어미·아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는지." 박재동은 이런 답글을 썼다. "자식이란 제 살길이 바빠 정신이 없어 부모님은 언제나 그대로 계시는 줄만 아는 것이 아닐까요…."

죽음을 1년 앞둔 1988년, 아버지의 일기는 특별하다.

비가 내린 4월 28일, 일기의 제목은 '행복'. 손자 3명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썼다. "행복하다. 긴 투병 생활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온 나로서는 오늘의 이 자리가 너무도 감격스럽다. 정말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이제 기적이 없는 한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하고 살리라." 노력하며 살아온 그들의 삶에서 달라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머니는 이렇게 회고했다. "환자였던 남편은 지금도 환자고, 풀빵 장사였던 내 모습도 바뀐 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잘 자란 아이들이다."

그 해 9월 17일 서울올림픽이 시작됐다. 박재동의 아버지는 종일 TV를 봤다. 그날 그는 이렇게 일기를 썼다. "내 생애에는 다시 못 볼 축제일 것이다. 불과 10여년 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 아닌가. 먹고살기 바쁜 우리에게 너무도 사치스러운 행사였을 것이다. 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땀의 결과이다. 이제 우리나라가 50억 세계인들이 기억하는 나라가 됐으니 가슴 뿌듯하다."

박재동은 감격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답글을 썼다. "아버지, 24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는 50억 세계인이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솟구쳐 오르고 있습니다."

◇저는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버지 소망이었으니까

"아버지처럼 당신도 자식을 위해 희생하면서 살았습니까?" 이 질문에 박재동은 말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희생했어요. 왜 했을까요? 자식이 손자를 위해 희생하기를 바라고 희생했을까요? 자식은 꿈을 이루길 바랐겠지요. 전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까지 희생하면 아버지 세대의 보람은 없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행복하고 꿈을 이뤄야 아버지의 보람을 이룬 것이지요."

 

 

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