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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범들의 아버지 천종호 판사를 만나다

전동키호테 2013. 5. 12. 09:08

 

 

소년범들의 아버지 천종호 판사를 만나다

법정에선 따뜻한 천사
출산 앞둔 소녀범에게… 배냇저고리 선물해주고
상습절도 일삼던 자매 위해… 10만원 든 지갑 건네줘

부산 달동네의 빈민 출신
단칸방서 아홉 식구 살아… 외상으로 쌀 받아오라는
아버지의 말이 너무 싫었죠

호통판사로 한때 유명세
호통치는 모습 방송에… 인기 검색어 1위 올라
소년범 6000명 재판… 나보다 많이 한 판사 없죠

청소년회복센터까지 설립
부모 없는 아이들 돕고싶어… 발로 뛰면서 자금 모아
변하는 아이들 모습에 행복

"친구 때리고 돈 뺏고. 왜 이렇게 괴롭혔어?" "이렇게 괴롭히면 친구가 힘들어할 것을 몰랐어?" "언제 철들 거야?"

지난 3일, 부산지법 소년보호재판 법정. 천종호(48) 부산지법 부장판사 앞에 학교 폭력 가해자인 민수(16·가명)가 섰다. 천 판사의 호통이 법정에 쩌렁쩌렁 울렸다. 재판정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움찔했다.

천 판사의 별명은 '호통 판사'다. 지난 1월 한 방송 프로그램에 그가 호통치는 모습이 나왔다. 이를 본 네티즌들이 포털 사이트에 '호통 판사'를 검색했고, 순식간에 인기 검색어 1위가 됐다.

법정에서 소년범과 부모, 교사에게 거침없이 호통을 치는 천종호 판사가 오랜만에 법정(부산지법)에서 활짝 웃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처분을 내리기 며칠 전부터 밤잠을 설칩니다. 한참 동안 ‘내 자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을 한다”고 했다. / 남강호 기자
최근 부산에서 천 판사를 만났다. 자그마한 키에 하얗고 말간 얼굴이 동안(童顔)이었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소년 판사'다. 법조계의 '비인기 종목'인 소년보호재판(19세 미만 범죄인을 처분하는 재판)을 올해로 4년째 자청해 맡으면서 생긴 별명이다. 2010년부터 창원지법에서 소년보호재판을 한 천 판사는 지난 2월 부산지법으로 옮기면서 국내 최초 소년보호재판 전담 부장판사가 됐다. 그동안 만난 소년범이 6000명. 한국에서 소년보호재판을 가장 많이 한 판사다.

최근 천 판사는 '소년범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새로 얻었다. 지난 2일 그가 소년보호재판을 담당하면서 만든 청소년회복센터가 4년 만에 10호를 돌파했기 때문이다. 부산과 경남 창원·의령 등에 있는 회복센터는 보호관찰 처분을 받은 소년범 중 보살펴줄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24시간 돌봐주는 곳이다.

센터를 만들기 위해 지인은 물론 지인의 지인까지 백방으로 만나고 다녔다는 그는 "소년범들을 보니 가정이 해체된 경우가 많더라"고 했다. "죄가 밉다고 내치기만 하면 아이들이 더 큰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커요. 엄하게 벌주되, 제대로 사회에 발붙이게 사회가 도와줘야지요. 아이들의 나쁜 짓은 결국 어른들의 책임이잖아요." 지난 2월 천 판사는 경험을 담아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나는 도시 빈민 출신"

천 판사는 "소년보호재판관이 되기까지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 같다"고 했다. "저는 어린 시절 가난을 겪어봤고, 판사가 된 후엔 가정법원 판사로 이혼 재판을 해봤습니다. 이 경험들이 결국 저를 소년보호재판으로 이끈 것 같아요."

그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외모만 보고 넉넉한 집에서 곱게 자랐다고 생각한다. 고향을 물어봤다. "아미동 까치고갭니더." '아미동 까치고개'는 부산의 대표적 달동네였다. 스스로 '도시 빈민 출신'이라고 했다. "7남매 중에 대학 나온 사람이 저뿐이면 말 다했지요. 비행 청소년 중에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애가 정말 많아요. 바보 사정은 바보가 안다고…. 저도 어려운 시절 보냈으니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더라고요."

천 판사는 칠남매의 넷째였다. 부모님까지 아홉 명이 단칸방에 살았다.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한눈팔지 않고 일해도 살림은 늘 어려웠다. "'쌀 좀 외상으로 받아온나'라는 말이 참 싫었다"고 했다. 그는 초등생 시절 개근상을 딱 한 번 받아봤다. "돈이 없으니 미술 준비물을 못 챙기잖아요. 혼나기 싫어 결석을 해버렸지요."

공부를 잘했던 그는 판사를 꿈꿨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문과생으로 '개천에서 용 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법시험 합격이었다. 학교 선생님이 말렸다. "아이고야, 서울대 애들도 붙기 어려운 시험인데, 니가 우찌 붙노. 취업 잘되는 교대나 사대를 가서 빨리 돈 버는 게 안 낫긋나?"

그래도 판사의 꿈을 버릴 수 없었다.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1984년 부산대 법대에 진학했다. 제대 후인 1994년 사법시험에 붙었다. 판사에 임용된 뒤엔 "부장판사 정도 되면 퇴직하고 변호사 개업해서 부모·형제에게 꼭 베풀어야지"라고 마음을 먹었다. '소년 판사'가 될 줄 꿈에도 몰랐다.

2006년 부산가정법원 판사가 됐다. "이혼 재판을 하면서 가정이 해체돼 방황하는 아이들을 자주 봤어요. 형편이 어려워서 서로 안 맡겠다는 부모도 있었고…. 이혼은 세계적 현상이니 줄이기 어렵더라도 아이들만은 잘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천 판사는 2010년 창원지법 소년보호재판관으로 가면서 '길어봐야 2년 정도'라고 생각했다. "소년보호재판을 계속 하게 된 건 재판에서 만난 아이들 때문이에요. 아이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더라고요. 비행(非行)의 원인을 찾아 해소해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정이 들데요. 마음을 고쳐먹은 소년범이나 회복센터 분들이 '판사님, 조금 더 있어주이소'라고 말하는데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어요."

◇법정에서 "시 읽어라"는 판사

천 판사의 '처분'은 특별하다. 법정에 온 소년범들에게 무릎 꿇고 "부모님 사랑합니다"를 열 번씩 외치게 한다. 아이의 비행 원인이 부모의 무관심이면 엄마나 아빠에게 "미안하다"라고 외치게 한다. 노랫말이나 시구(詩句)를 메모했다가 읽게 하기도 한다. 출산을 앞둔 비행 청소년에게 배냇저고리를, 상습절도를 하던 자매에게는 지갑에 10만원을 넣어 선물했다.

천 판사는 상습절도 혐의로 재판을 받은 선주(16·가명) 얘기를 꺼냈다. 알코올중독인 아버지는 선주를 자주 때렸다. 천 판사는 법정에서 아버지에게 종이를 건넸다. "소리 내어 읽으세요." 아버지가 읽어내려갔다. "그 아이가 그대를 사랑합니다… 난 사랑받고 싶어…." 한 드라마 주제곡이었던 '그 남자'를 살짝 바꾼 가사였다. 천 판사는 선주에게 "부모님 사랑합니다"를 외치게 했다. 아버지에게는 "여보, 선주야. 아빠가 잘못했다. 용서해라"를 외치게 했다. 선주 가족은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후 선주는 문제없이 학교를 잘 다니고, 가족은 탄탄해졌다.

"제가요… 예전에 사람들이 왜 판사 하느냐고 물으면 무심결에 '약자들을 돕고 싶다'고 했거든요. 지키지도 못할 말을 한 것 같아서 항상 마음의 짐이었는데, 요즘은 그 약속을 조금은 지킬 수 있게 된 것 같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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