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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광부 출신 영화사 대표의 부음

전동키호테 2013. 5. 13. 21:02

 

파독 광부 출신 영화사 대표의 부음


	이한수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
이한수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

“어제 돌아가셨습니다.”

지난달 2일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예전에 인터뷰했던 김태우(73) 신영필름 대표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곧바로 그의 별세를 알리는 부음 기사를 썼습니다. 이튿날 그의 부고 기사가 실린 신문은 제가 아는 한 조선일보가 유일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대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 인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그의 죽음에 대해 기사를 썼고, 조선일보는 왜 이를 지면에 반영했을까요?

김 대표를 만난 건 올해 1월 8일이었습니다. 인터뷰를 하려고 전화했을 때 그는 서울 안암동 고려대병원에 입원 중이었습니다. 뇌출혈로 머리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는 머리를 여는 큰 수술을 받은 후 병상에 있으면서도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했습니다. 무슨 절박한 상황이라도 있었을까요.


	45년 동안 간직한 朴대통령 편지… 파독 광부였던 김태우 신영필름 대표가 서울 안암동 고려대 병원에서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파독 광부·간호사들에게 보낸 인쇄본 편지를 펼쳐보이고 있다. 김 대표는 “살면서 힘들 때마다 이걸 꺼내 읽었다”고 말했다. 뇌출혈 수술을 받은 김 대표는 이번 주말 퇴원 예정이다. /성형주 기자
45년 동안 간직한 朴대통령 편지… 파독 광부였던 김태우 신영필름 대표가 서울 안암동 고려대 병원에서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파독 광부·간호사들에게 보낸 인쇄본 편지를 펼쳐보이고 있다. 김 대표는 “살면서 힘들 때마다 이걸 꺼내 읽었다”고 말했다. 뇌출혈 수술을 받은 김 대표는 이번 주말 퇴원 예정이다. /성형주 기자

김 대표는 파독(派獨)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회장이었습니다. 1960년대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중 하나였을 때 우리 젊은이들은 머나먼 땅 서독(독일)에서 험한 노동을 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올해는 1963년 첫 광부 파독이 있었던 이후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김 대표는 연합회 회장으로서 동분서주하며 올해 기념사업을 준비하던 중이었습니다.

대학 3년때 독일에 가 4년간 지하막장 광부 생활, 48년 만에 대학 졸업

그는 스물네살 때인 1964년 11월 독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1960년 대학(고려대 경제학과)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군 제대 후 복학했으나 한·일 회담 반대 6·3 시위가 벌어지면서 "나라에 희망이 없어 보였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명문대를 다니던 대학생이지만 낯선 나라에서 광부로 일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서독 함보른 광산의 섭씨 36도가 넘는 지하 막장에서 석탄가루를 뒤집어쓰며 일했습니다.


	 독일 탄광에서 지하 800~1000m 암벽 천장을 떠받치는 철제 가로 받침대(카페) 사이에 쇠기둥(스템펠)을 세우는 작업을 하는 모습. 40㎏이 넘는 스템펠과 카페 설치는 체격이 작은 한국인 광부들에게 힘에 부치는 작업이었다. /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제공
독일 탄광에서 지하 800~1000m 암벽 천장을 떠받치는 철제 가로 받침대(카페) 사이에 쇠기둥(스템펠)을 세우는 작업을 하는 모습. 40㎏이 넘는 스템펠과 카페 설치는 체격이 작은 한국인 광부들에게 힘에 부치는 작업이었다. /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제공

김 대표는 자신이 평생 영화 관련 일을 하게 될지는 몰랐다고 했습니다. 독일 탄광회사에서는 매월 시청각교육을 했는데 어느날 '철(鐵)은 살아있다'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습니다. 석탄을 때서 철을 녹이고 이를 가지고 철골 건물을 짓는 내용이었는데, 김 대표는 영화에 순식간에 빠져들어 태어나 처음으로 "이거다" 싶었답니다. 귀국하면 저런 영화를 만드는 기술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김 대표는 그 꿈을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파독 계약 기간이 끝나갈 무렵 뮌헨에 있느 영화장비 제조회사를 찾아가 광산에서 번 전 재산을 들고 가 최신 영화 촬영용 카메라를 사겠다고 돈을 들이밀었습니다. 석탄가루로 얼굴이 시커먼 동양인 젊은이가 거금을 들고 와 비싼 영화 장비를 사겠다고 하니 그 회사는 신기하기도, 기특하기도 하며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 영화 회사 간부는 “영화촬영 카메라가 왜 필요하냐”고 물었고, 김 대표가 자신은 파독 광부이며 앞으로 귀국해 한국의 영화 산업을 일으켜보겠다는 포부를 말하자, 그 간부는 이야기를 다 듣고 6개월 과정 영화 촬영 기술 교육을 무료로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고 합니다.

1968년 4월 귀국하면서 들여온 독일제 촬영 카메라는 당시에 유일하게 '역촬(逆撮)'이 가능했습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찍어 거꾸로 돌리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첨단 기능입니다. 신상옥 감독 등 국내 영화인들이 소문을 듣고 김 대표의 최신 카메라를 빌려 영화를 찍었습니다. 이후 신영필름이라는 영화 기술 용역 전문회사를 차려 40년동안 이어와 한국 최대 촬영용 카메라 대여 기업으로 키웠습니다.

2005년 12월에 개봉해 1000만 관객을 울고 웃겼던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를 비롯해 ‘쉬리'(1998), '공동경비구역 JSA'(2000), '실미도'(2003) '최종병기 활'(2011),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등 한국 영화사에 남는 흥행 대작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2008년에 못다한 학업을 마치고 68세 나이에 대학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1960년 입학한지 48년만이었지요. 1964년 3학년 1학기를 채 마치지 못하고 중단했던 학업을 이어 환갑을 훌쩍 넘은 나이에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저는 김 대표의 이런저런 인생 이야기를 '파독 광부·간호사 50년- 그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바친다' 기획 시리즈 메인 기사(조선일보 2013년 1월 16일자)로 썼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파독 광부들을 찾아와 눈물 바다가 된 이야기는 이제 고전(古典)에 속합니다. 김 대표는 1968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보낸 인쇄용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도 위기 등 어려울 때마다 그 편지를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인터뷰 중 그 편지를 꺼내 보이며 옛 생각에 빠져들면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저도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옛날의 호의를 갚기 위해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보은(報恩)하고 싶다”

신문에는 미처 쓰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 대표는 파독 광부 50주년을 맞아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독일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할 때 독일인들의 베풀어 준 호의를 이제는 갚고 싶다는 겁니다.

김 대표가 보은(報恩)의 대상으로 말한 이는 지금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입니다. 자신이 독일에서 광부로 일하면서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고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할 수 있었듯이, 지금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한국에서 좋은 경험을 얻어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독일에서 혜택을 받았듯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서울 양재동의 건물을 매입해 리모델링을 거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파독 기념 전시실, 교육장과 고국을 방문한 파독 광부 등이 묵을 수 있는 숙소까지 갖춘 ‘파독광부 전시관’ 개관 작업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5층에 마련된 파독 광부·간호사 전시관을 부모와 함께 찾은 초등학생들이 파독 광부 작업복과 간호복을 입은 마네킹을 바라보고 있다. 전시관에는 광부·간호사의 여권과 월급명세서·일기·편지 등이 전시돼 있다. /김지호 객원기자
서울 종로구 세종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5층에 마련된 파독 광부·간호사 전시관을 부모와 함께 찾은 초등학생들이 파독 광부 작업복과 간호복을 입은 마네킹을 바라보고 있다. 전시관에는 광부·간호사의 여권과 월급명세서·일기·편지 등이 전시돼 있다. /김지호 객원기자

올 4월 26일 서울 세종로 옛 문화관광부 건물에 문을 연 대한민국역사박물관내 파독 광부·간호사전시관이 마련된 것도 김 대표를 비롯한 여러 파독 근로자의 기증 물품 덕분입니다.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 31명이 총 487점을 기증했는데, 전시관에는 작업복·탄광장비·여권·일기 등 22점이 전시됐습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파독된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는 2만여명으로 추산되지만 모두 고령(高齡)입니다. 지금이라도 그분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은 다행입니다.

김 대표를 비롯해 제가 만난 거의 모든 파독 근로자 분들은 독일에서 일할 때 외국인 노동자라고 해서 차별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랬을지 사실 우리 현실을 생각해볼 때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좋은 기억만 남은 건 아닌지 하고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파독 기획' 취재차 여러 분들을 만나면서 당시 독일은 적어도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었던 사회라고 판단하게 됐습니다. '나치' 경험 때문인지 인종 차별은 죄악이라는 생각이 뇌리에 박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 대표는 4월 1일 오후 10시쯤 세상을 떠났습니다. 2월 중순에도 통화를 했었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확한 사인(死因)은 광부 시절 때 얻었던 '폐 섬유화증' 악화로 확인됐습니다. 파독 광부 출신인 권이종 전 한국교원대 교수는 "막장에서 생긴 진폐증 때문"이라며 슬퍼했습니다.

김 대표는 우리 사회와 경제 발전에 기여한 대한민국 현대사의 주역인 파독 근로자들을 대표하는 분입니다. 그런 분의 별세 소식을 듣고 어찌 기사로 경의(敬意)를 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새삼 고인의 명복(冥福)을 삼가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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