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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500만 명 듣는 버스 정류소 안내

전동키호테 2009. 8. 25. 08:27

◆버스 안내방송은=80년대에는 음성 녹음된 테이프를 기사가 버튼을 눌러 방송했다. 거스름돈을 주고 승객 질문에 답하다 보면 기사는 테이프 누르는 것을 잊기 일쑤였다. 90년대에는 출입문이 닫히면 10초 뒤 안내 방송이 나가는 반자동 방식이었다. 99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정류소 길목마다 부착된 외부 송신기와 버스 내부의 수신기가 센서로 반응해 방송됐다. 2004년 서울시내버스체계 개편 때부터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기술이 이용됐다. 버스 안의 단말기가 위성이 보내오는 위치 정보를 인식해 방송이 나간다.

[중앙일보 박태희.최승식] “길동주민센터입니다.” “봉일시장입니다.” “성북구보건소입니다.”

21일 오후 2시 서울 송파구 신천동의 한 녹음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유리벽 안에서 서울 버스정류소의 이름을 녹음 중인 여성은 전 KBS 성우 전숙경(35·여)씨다. 전씨는 서울 번호판을 단 광역·지선·간선버스 7000여 대에서 11년째 흘러나오는 정류소 안내와 광고 멘트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하루 500만 명의 승객이 전씨의 목소리를 듣고 하차할 채비를 한다.

이날 전씨는 새로 생겨났거나 이름이 바뀌는 정류소 30곳과 추가되는 버스 광고 멘트 20개를 한 시간 반 동안 녹음했다. 그는 이 같은 일을 2주일 간격으로 반복한다. 전씨가 이 일을 처음 맡은 것은 1999년. 시스템 공급을 맡은 Y텔레콤의 공개 오디션에서 수십 명의 전직 성우·아나운서와 경쟁한 끝에 ‘소음 속에서도 선명히 들리는 음색’이라는 평가를 받아 선발됐다.

당시 전씨는 하루 3~4시간씩 꼬박 일주일에 걸쳐 8000여 개 서울시내 모든 정류소의 이름을 녹음했다. 일을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이번 정류장은”과 “다음 정류장은” 부분은 한번 녹음해 재사용하고 뒷부분 “XXX(어디어디)입니다”만 따로 녹음해 연결했다.

현재 승객들이 듣는 안내문 가운데 “이번 정류소는” 부분은 전씨의 스물아홉 살 때 목소리다. 2004년 버스 환승체계 개편 때 ‘정류장’이 ‘정류소’로 바뀌면서 새로 녹음했다.

표준어를 구사하는 전씨는 정작 대구 토박이다. 고향 친구들과 전화 통화를 할 때면 ‘사투리 모드’로 바뀐다. 서울 생활은 99년 경북대를 졸업하고나서부터다. 잠시 음성 녹음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Y텔레콤 녹음실 사장의 ‘귀에 띄어’ 오디션에 참가한 게 녹음과 인연을 맺은 계기였다. 고등학교·대학교 시절 방송반 아나운서로 일하면서 표준어를 연습한 것이 도움이 됐다.

전씨의 목소리는 현재 인천 지역 모든 버스, 대전광역시와 고양시의 일부 노선에서도 매일 울려 퍼진다. 얼마 전 끝난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의 크리스티나 양의 음성도 전씨 목소리다. MBC ‘TV 특종 놀라운 세상’의 내레이션도 전씨 음성이다.

전씨는 딱 한 번 버스를 공짜로 탄 적이 있다. 급히 외출해 버스를 타고 보니 지갑이 없었다. 버스 기사에게 사정을 설명하면서 ‘방금 나온 안내방송을 녹음한 성우’라고 했다. 전씨는 “이번 정류소는~”을 몇 차례 반복하고서야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박태희 기자 , 사진=최승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