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_연예_詩_만화

대통령 울린 환경미화원 이야기

전동키호테 2009. 1. 3. 21:10

‘희망 찬가’ 환경미화원 33년 신순복

 

사선을 넘어… 사별을 넘어… 마비를 넘어… '희망 찬가'
청소차 몰던 남편 스물셋에 잃어 "남편 직업 이어받아 두 딸 결혼까지"
20년 넘게 변변한 휴가없이 일해"곧게 자란 두 딸이 고맙죠" 울음 터뜨려

 

1974년 마지막 날, 남편은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은 석 달 전부터 부산 금정구청에서 청소차를 몰았다. 이날 아침 그는 "저녁 근무를 마치고 동료들과 송년회를 할 거다"라고 했다.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든 스물세 살 아내는 10시쯤 잠이 깼다. 남편이 들어와야 할 시간이 지나자 불안해졌다. 야간 통행 금지가 있을 때였다. 자정이 넘어도 남편은 오지 않았다. 단칸 방을 들락거리며 남편을 기다렸다.

새벽 2시쯤 골목길 언저리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남편의 동료였다. 그는 "파출소에 가보라"고 했다. 한달음에 뛰어갔다. 경찰은 지갑과 겉옷만을 건네주고는 아침에 다른 파출소로 가보라고 했다. 아내는 '남편이 뭔가 사고를 쳤구나'라고 생각하곤 집으로 돌아갔다.

새해 첫날 아침 8시 아내는 파출소로 남편을 찾아갔다. 남편의 이름을 말하자 경찰은 "돌아가신 분 말하는 겁니까"라고 대답했다. 남편은 시신이 돼 있었다. 아내의 옆에는 3살 된 딸이 있었고, 뱃속에는 석달 된 아기가 있었다. 그날 신순복(57)씨는 가장(家長)이 됐다.


▲ 부산광역시 금정구청의 환경미화원 신순복(56)씨 신씨는 남편이 죽은 후 33년 동안 금정구청에서 환경 미화원으로 일했다. /이인묵 기자 redsox@chosun.com
"벌써 33년 전 일이네예."

신씨는 눈가의 물기를 휴지로 훔쳤다. 신씨의 이야기는 신씨 자신만 울린 게 아니다. 대통령도 울렸다. 지난 4월 6일 이명박 대통령은 전국의 환경미화원 196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했다. 이때 신씨는 대통령과 한 식탁에 앉았다.


이 대통령은 "나도 어린 시절 공부하며 환경미화원 일을 했다"며 신씨에게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됐냐"고 물었다. 신씨는 "남편 얘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을 시작하니까 멈출 수가 없었다"고 했다. 신씨의 이야기가 끝나자 대통령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때는 그냥 막막했지예. 보상금이라고 150만원 나온 건 죄다 시댁에 갔고 구청에선 받아주지도 않았어예. 남편은 미화원이 아니라 운전기사라 내를 쓰는 건 안 된다꼬. 석 달을 구청에 쫓아댕기니까 구청장님이 써주라 해서 간신히 됐으예."  그때 구청에는 신씨 외에도 여성 환경미화원이 16명 있었다. 대부분 신씨처럼 남편의 직업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당시에는 환경미화원이 사고로 죽는 일이 잦았다. 내리막길에서 리어카의 무게에 눌려 죽기도 하고 새벽에 음주운전 차량에 뺑소니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아내가 남편의 직업을 잇는 것은 가장의 죽음으로 온 가족이 거리에 나앉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곧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났다.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몇 번 죽을 뻔했다고 한다. 한번은 쓰레기로 가득 찬 리어카를 발뒤꿈치로 버티며 내리막을 가는데 승용차가 리어카 옆을 긁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대로 밀렸으면 쓰레기더미에 깔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옆으로 빠져 나와 간신히 살았다. 시동생은 몇 번이고 '시골(경상남도 창녕)로 돌아오라'고 권유를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신씨는 꼬박 33년 동안 환경미화원 일을 했다. 그사이 구청에서 가장 어린 환경미화원이었던 신씨는 최고참 팀장이 됐다. 그는 "다른 일을 해볼 생각도 했었다"며 "하지만 남편의 무덤에서 '내가 당신 직업으로 정년을 채워서 애들을 키우겠다'고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이곳에 남았다"고 했다. 일을 시작한지 석 달 만에 유복자(遺腹子)로 딸이 태어났다.  출산휴가로 두 달을 쉬었다. 그때부터 20년 넘게 신씨는 변변한 휴가 없이 일했다. 오전 5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환경미화원 일을 했다. 밤에는 새벽 2시까지 산동네나 작은 골목에 있는 집에서 쓰레기를 모아 큰길까지 내놓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1975년 그가 밤새 일해 받는 돈은 한 달에 3000원 남짓이었다. 잠은 쓰레기를 모아놓은 리어카 사이에서 거적을 말아놓고 눈만 붙였다. 그러다가 쓰레기차가 오면 리어카를 비우고 곧장 도로 청소를 하러 나섰다. 집에 못 들어가는 날도 잦았다. 휴일에는 아이들 도시락 밑반찬을 만들었다.

신씨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착하게 커준 아이들에게 고마울 뿐이다"라고 했다. 밤낮없이 일하다 보니 아이들 얼굴을 일주일에 한 번 보기도 힘들었다. 새벽 일을 마치고 9시쯤 잠시 집에 들르면 아이들은 이미 학교에 간 후였다. 한 달 넘게 아이들과 한 마디 대화조차 못한 적도 잦았다. 공부하라고 학원비는 줬지만 딸이 어떤 학원에서 무슨 공부를 하는지는 몰랐다.  그래도 두 딸은 곧게 자랐다. 큰딸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상도 많이 받았다. 작은딸은 운동을 하다가 공부로 진로를 바꿔서 대학에 갔다. 두 딸 모두 결혼하고도 자기 일을 갖고 있다. 큰딸은 식당을 하고 작은딸은 어린이 집을 한다.

청와대 방문을 마치고 받은 'MB 시계'는 큰 사위에게 줬다. 그는 "대통령이 우리(환경미화원)같이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한테 처음 나온 시계를 줄 만큼 신경을 써줬는데, 이런 마음으로 경제도 잘 보살펴서 시계를 가보(家寶)로 삼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3년 후면 그도 정년을 채운다. 일하는 동안 후회가 남는 것은 없었을까. 그는 "일은 더 열심히 할 수 없을 만큼 했기에 후회가 없다"며 "여자 나이 스물네 살에 일 시작해서 한 직장에서 정년을 채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냐"고 했다. 하지만 그는 가정에 대해서는 후회가 많이 남는다고 했다.

"혼자서 애들 키우느라고 돈 벌 생각만 했어예. 큰애가 졸업식에 가는데 치마를 사달라꼬. 내는 애가 멋 부리려 그러는 줄 알고 종아리를 팼지예. 근데 애 삼촌이 졸업식에 가보니까, 애가 종아리가 시퍼레서 2번이나 상 받으러 올라갔대예. 상 받는 애들한테 3만원이면 되는 치마 입고 오라 한 건데, 그것도 모르고 애를 패기만 했으니 내가 무덤까지 가져갈 잘못을 한기라. 참말로 못된 에미였지예."

온갖 궂은 일을 해 딸 둘을 키워낸 홀어머니는 딸에게 미안하다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부산=이인묵 기자 redsox@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