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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바이러스' 예술감독 서희태

전동키호테 2008. 12. 20. 12:54
[Why] [강인선 Live] "TV 속의 '강마에', 그 모델이 바로 접니다"
'베토벤 바이러스' 예술감독 서희태 

지휘자이자 음악감독인 서희태(43)씨의 인상은 어디서 본 듯 낯익다. 최근 클래식 음악 열기를 일으키며 끝난 TV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주인공 강마에 역(役)을 맡았던 김명민과 비슷하다.

사실 드라마 속의 지휘자 강마에 캐릭터는 서 감독의 지휘 스타일과 음악에 대한 사랑을 먹고 태어났다. 서 감독은 김명민의 손을 뒤에서 붙들고 지휘연습을 시켰다. 구불구불한 헤어스타일 전수했고 무엇보다 드라마의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래서 기획단계엔 존재하지 않았던 '예술감독'이 되어 '베바 신드롬'을 만들어낸 막후 역할을 했다.

▲ 연미복을 입고 지휘봉을 든 서희태 감독. 서울 서초구 자택의 계단 양쪽 벽에 좋아하는 음악가들의 사진을 걸어뒀다. ☞ 동영상 chosun.com / 정경렬 기자krchung@chosun.com

올해의 히트상품 '베바'
'베토벤 바이러스'는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올해의 히트상품 5위를 차지했다. 1위 촉각형 휴대폰, 2위 베이징올림픽 스타, 3위 교통요금 결제시스템, 4위 인터넷 토론방에 이은 5위이니, '베바'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진 비범한 지휘자 강마에를 만나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시청자들의 눈길을 점점 더 사로잡더니 평균 시청률 17.1%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베바 신드롬'도 일어났다. 바이올린과 플루트 등 악기 판매가 눈에 띄게 늘었다. 악기연주를 배우러 음악학원을 찾는 사람들이 증가했는가 하면, 클래식 음악관련 동호회 활동이 활발해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주인공 강마에가 입었던 옷·가방·안경 등이 불티나게 팔렸고 드라마에 나온 와인도 판매가 급등했다.

밀레니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서씨가 어떻게 드라마의 막후 지휘를 맡게 됐을까.

"이재규 감독이 지휘자 '강마에' 역을 맡은 김명민씨에게 지휘를 가르쳐주고 선곡도 좀 해달라고 그랬어요. 가끔 현장에 나와 같이 봐주면 좋겠다고도 했고요. 대본에 쓰인 음악용어도 고쳐주고 하다 보니 제 일이 점점 늘더라고요. 촬영 시작한 후 연주하는 장면을 처음 찍을 때 이감독이 전화해서 와달라고 그랬어요. 그날부터 드라마 끝나는 날까지 저도 밤낮으로 일하면서 꼼짝없이 붙들려 있었지요."

클래식 음악을 TV 드라마에 담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배우들이 직업 연주자 수준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클래식 음악 드라마의 핵심이랄 수 있는 '음악'과 '소리'도 수준급이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기와 소리를 어우러지게 만들어야 했다. 이 모든 작업은 PD와 작가, 기존의 방송 스태프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드라마와 음악과 기술 사이의 빈 공간을 이어주는 역할을 서 감독이 맡았다.

―처음부터 '음악감독'이나 '예술감독' 역할을 맡은 게 아니었군요.
"성악가인 아내가 이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 '패션 70's'의 삽입곡을 불렀거든요. 그 인연으로 알게 된 이감독이 어느 날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때만 해도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몰랐어요. 우리나라에선 아무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니까요."

―구체적인 역할이 없으니 막막했을 것 같은데요.
"연출도 도왔고, 배우를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했고, 음악 연주해서 믹싱하고 촬영 끝나고 나면 편집도 하죠. 선곡과 대본작업에도 참여했어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가 원래 '안 된다'는 생각을 안 해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밀고 나가요. 안 그러면 '베바'의 예술감독 역할은 못했을 거예요."

서 감독은 점점 더 드라마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포기하고 연주 요청도 수없이 거절했다. 어떤 역할을 맡을 사람이 없으면 성악가인 아내에게도 부탁하고 아들에게 플루트 연주도 해달라고 했다. 그동안 배운 것, 쌓아온 인맥이 총동원됐다. 드라마가 끝난 후엔 그 경험을 담아 '베토벤 바이러스(MBC 프로덕션)'라는 클래식 음악 입문서도 썼다. '베바'가 그랬던 것처럼 클래식 음악을 쉽고 친근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책이다. 

시청자 비난에 원형탈모 생겨
―원래 성격이 드라마에 나오는 강마에처럼 강렬하고 괴팍한가요?
"아니에요. 강마에와 저는 지휘 스타일만 비슷하지 성격은 달라요. 강마에는 인상을 쓰며 지휘하지만 저는 늘 웃으며 합니다. 강마에 캐릭터를 만들 때 고민을 많이 했는데 17세기나 18세기에나 있었을 법한 지휘자의 모습이에요. 말투·의상·헤어스타일까지 자존심 강한 인물로 만들었지요. 마치 베토벤이 살아난 듯한 인상을 준 거예요. 그러나 요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강마에 같은 성격을 견디지 못할 겁니다. 예전엔 단원들이 수긍하고 숙여줬는지 모르지만 요즘엔 그렇지 않거든요."

―방영 초기엔 시청자들의 비판도 상당히 거셌지요?
"1, 2회 방영하고 난 후 시청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어요. '배우가 왜 악기를 거꾸로 들고 있느냐', '연주와 음악이 하나도 안 맞는데 이게 무슨 전문 음악 드라마냐'는 거예요.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제가 머리숱엔 자신이 있는 사람인데 원형 탈모까지 생기더라고요."

―나중에 칭찬을 받으니까 나아지던가요?
"아뇨. 주사 맞고 나았어요. 하하."

―어떤 지적이 제일 아팠습니까?
"제가 이 드라마 일을 돕기로 한 건 우선 제 아이들에게 재미난 추억을 만들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또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클래식 음악은 소수를 위한 음악으로 남겨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드라마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프더라고요."


"음악을 하려면 아예 독립을 해라"
교육자인 서 감독의 아버지는 특이하게 '톱 연주'를 한다. 아름드리 큰 나무를 베는 긴 톱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활로 소리를 내는 연주다. 음악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음악을 가르쳤다. 서 감독은 바이올린을, 누나는 피아노를, 동생은 첼로를 배웠다. 그러나 중학교에 진학하면 음악을 그만두게 했다.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아버지는 자식들이 음악을 업으로 삼는 것은 원치 않았다.

서씨는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 뜻에 따라 고등학교 때도 이과반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음악을 포기하진 못했다. 레슨도 변변히 받은 적 없는 상태에서 부산대 성악과 시험을 봤다. 합격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음악을 하려면 아예 독립을 하라"고 했다.

대학 시절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했다. 수퍼마켓에서 일도 했고 지게로 주문한 물건을 배달하기도 했다. 공사판에서 막노동도 해봤다.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아이템플이라는 학습지 판매도 했다. 실적이 전국 3위를 했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음악이 다시 그를 도왔다. 어린 시절 배워둔 바이올린 레슨을 시작하면서 형편이 나아졌다. 학원에서 바이올린과 성악을 같이 가르치면서부터는 차를 사서 몰고 다닐 정도가 됐다. 대학을 졸업한 후엔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뚜렷한 목표가 있어서 유학을 간 건 아니었어요. 서양음악을 전공하니까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한번 보고 싶었어요. 제가 좋아하던 베토벤이 살던 집에도 가보고 싶었고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만든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거지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시립 콘서바토리에선 성악·교회음악·오페라를 공부했다. 헝가리의 리스트 음악원에선 음악교육을, 러시아의 그네신 음악원에선 지휘를 배웠다. 유학생활 중 고생도 만만치 않았다. 쌀 한 톨 못 먹고 시장에서 파는 양배추 조림으로 허기를 때운 날도 많았다. 그래도 유학생활이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건 성악가인 부인 고진영씨를 그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제 아내의 하숙집 주인이 베르타 할머니였어요. 결혼 후엔 그 할머니가 작은 아파트를 세를 줬어요. 유학 초기부터 둘째아이 낳을 때까지 만 3년 정도는 죽을 만큼 고생했어요. 집값도 못 냈죠. 할머니가 5~6개월 정도는 기다려줘요. 그러다 갑자기 아이들 우유를 사가지고 와요. 집세가 밀렸다는 뜻이죠. 그 할머니가 이젠 양로원에 사시는데 요즘도 오스트리아에 가면 아무리 바빠도 꼭 뵙고 와요."

 

성악에서 지휘로
―성악 레슨도 한 번 안 받고 대학에 입학할 정도면 재능은 타고 난 거죠?
"아니에요. 예전엔 노력하면 뭐든 다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한계를 느꼈어요. 성악에선 타고 나야만 갈 수 있는 경지가 있더라고요. 저도 이왕 시작한 음악이니 거기까지 가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 아내를 보면서 좌절했어요. 아내는 아침에 일어난 지 1분 만에도 소리를 잘 내요. 저는 아니에요. 네다섯 시간 전에 일어나서 등산도 하고 식사도 하고 준비를 해야만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됐어요."

―그게 재능이 부족해서였나요?
"성대에 좀 문제가 있었어요. '인골라'라고 하는데, 노래를 하면 목젖이 밑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위로 올라가면서 고음이 어색한 소리가 나요. 흔히 소리가 말린다고 하죠. 6개월 동안 쇠 젓가락으로 목을 누르면서 혹독하게 훈련했어요. 노래를 포기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나아지긴 했는데 그 후엔 목을 푸는 데까지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아내는 너무 쉽게 노래하고 행복하다는데 저는 그 과정이 괴로웠어요."

―그래서 성악을 그만두고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된 건가요?
"대학 때 지휘봉을 쥐었을 때 너무 행복했거든요.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소리도 참 좋아했어요. 오케스트라는 우주에서 날 수 있는 소리를 다 내잖아요. 그래서 유학 중에 성악과 지휘를 다 배웠어요."

―좋은 지휘자에겐 어떤 미덕이 필요한가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넘어질 때 자기 몸이 다치는 한이 있어도 악기를 감싸 안고 넘어져요. 악기는 분신이니까요.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저의 악기에요. 그러니까 저는 그 사람들을 감싸 안아야 하죠. 그 악기가 뭘 원하는지도 알아야 하죠. 단원들을 세심하게 챙기면 더 좋은 소리를 내줘요."

―감싸 안는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걸 말합니까?
"좋은 현악기는 수백 년 된 것들이 많잖아요. 만들어서 수백 년을 그냥 놓아둔다고 좋은 소리가 나는 게 아니에요. 수백 년을 좋은 연주자가 써줘야만 좋은 소리가 나는 거예요. 단원들도 마찬가지예요. 소통하는 게 중요하죠.

―지휘하다가 겪은 제일 황당한 일은 어떤 거였어요?
"피아노 협연을 하는데 연주자가 몇 마디를 뛰어넘어 연주했어요. 그 상태로 계속 하면 되는데 갑자기 아까 건너뛴 부분으로 돌아와 다시 연주하는 거예요. 오케스트라가 그것까지 따라갈 순 없죠. 그래서 단원들을 진정시키고 피아니스트가 아까 했던 부분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그럴 땐 정말 식은땀 나죠."

―지휘자는 장수한다고 하잖아요. 왜 그런 것 같습니까?
"우선 지휘가 운동량이 굉장히 많아요. 아주 좋은 유산소 운동이죠. 지휘자가 보는 악보를 한번 보세요. 수십 개의 악기 연주가 동시에 가는 복잡한 악보거든요. 그러니 머리를 많이 써야 해서 치매가 예방되죠. 하하. 또 악보를 눈으로 확인해야 하니 시력도 오래 유지되고 청력의 민감도도 좋아요."

―지휘자는 무대 위에서 뒷모습을 보여줘야 하니 마음이 편하진 않을 것 같던데요?
"지휘자들은 뒷모습에 신경을 많이 써요. 같은 연미복이라도 지휘자 것은 뒤태에 더 신경을 쓰죠. 보석까지 붙이는 사람도 있어요. 파마를 한 제 헤어스타일도 일종의 팬 서비스죠. 지휘자가 몸짓으로 보여주면 음악도 더 와 닿아요."

―연주 후 스트레스는 어떻게 풉니까.
"저는 스트레스를 안 받아요. 지휘할 때 너무 즐겁고 행복하거든요. 연주엔 많은 변수가 있긴 하지만, 끝나고 난 후엔 가급적 생각하지 않아요. 행복해지기 위해서죠. 사실 저는 취미가 없어요. 놀 줄도 몰라요. 운동도 여행도 안 해요. 취미라면 아내가 청소할 때 뒤따라 다니며 걸레질해주는 정도예요. 나이트 클럽과 노래방을 제일 싫어해요. 억지로 노는 건 일이라서 오히려 더 피곤하죠."

▲ 서희태 감독은 지휘봉을 들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그래서 지휘를 할 때면 늘 웃는다. / 홍승진씨 제공

일류와 대가의 차이
―서라벌대와 서울종합예술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왜 그만두셨습니까?
"처음에 음악을 공부할 땐 교수가 되고 싶었어요. 무대보다는 가르치는 일에 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실제 해보니까 제 이상과는 다르더라고요. 무대가 그리워졌어요. 대책 없이 사표를 냈죠. 옆방 교수님들이 저보다 더 걱정하면서 미친 거 아니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만두니 어떤 일이 생기던가요?
"교수로 일할 때 제가 굉장히 안일해졌어요.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는 생각이 줄고 연주도 하기 싫어져서 안 하게 됐어요. 과감하게 교수직을 놓고 나니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보게 되더라고요. 예전엔 타이틀이 절 지탱해줬지만 그걸 놓으니까 저를 지탱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하기 때문에 더 연주에 매달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봤어요."

그는 개그맨 전유성씨와 함께 '아이들이 떠들어도 화내지 않는 음악회'를 열었고, 오페라 사이에 마술공연을 집어넣기도 했다. 음악은 제대로 들려주면서 다른 재미를 집어넣어 음악이 더 잘 전달되게 하는 것이 그의 특기다.

―그래도 안정된 상황을 박차긴 어렵지 않던가요?
"아내에게 참 고맙게 생각해요.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아내가 늘 '내가 일을 좀 더 하지'라고 해요. '아이들도 있는데 좀 더 참으라'든지,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할 수도 있잖아요. 제가 가장으로서 역할을 못할 때 아내가 받쳐주지요. 제가 하는 일에 대해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어요."

―음악인생을 사는 데 큰 가르침을 준 스승이 있습니까?
"남아공 출신의 바리톤인 비쿠스 슬라베르트 선생님이에요. 아버지가 독립심을 가르쳐주었다면 그분은 제게 사랑을 가르쳐주셨어요. 제가 음악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셨어요."

어느 날 레슨을 받으러 갔더니 교수가 난데 없이 산책을 하자고 했다. 교수는 음악가들의 무덤이 있는 공원으로 가서 제자의 손을 잡고 말없이 걸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고 학교로 돌아온 교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위령의 날'이란 곡을 연주했다.

가사는 서글픈 내용이다. 아내를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낸 노인은 위령제날 아내의 묘지를 찾아간다. 느린 전주는 할아버지의 걸음처럼 느릿느릿하다. 노인은 묘지 앞에 가서 '여보, 나 왔소. 우리가 처음 만난 그 5월을 기억하시오? 오늘 여긴 많은 꽃들이 피어 있소. 당신의 손을 다시 한번만 내게 줘봐요'란 내용이다. 교수는 제자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 주려고, 음악적인 무엇인가를 전해 주려고, 제자의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했던 것이다.

"그분 덕분에 음악에 대해서 정말 많은 것을 깨쳤어요. '세상에는 참 많은 일류가 있다. 그 일류가 대가가 되려면 인간성이 필요하다. 일류와 대가의 차이는 인간성의 차이다'라고 하신 말을 늘 기억하고 있지요."

―이젠 '클래식 음악 전도사'가 되고 싶으시다고요?
"제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서희태의 음악회에 가면 뭔가 얻어갈 게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아이들이 클래식을 쉽게 이해하고 즐기게 하는 데는 서희태가 최고다'라는 평을 듣고 싶어요. 전도사로서 음악을 퍼뜨리는 일을 하려는 거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기획을 하고 계십니까.
"내년 1월 11일부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베토벤 바이러스 인 라이브'란 콘서트를 시작해 6개 도시에서 공연을 해요. 그 다음엔 '한국 가곡쇼'를 해보고 싶어요. 우리 가곡이 세계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성악가들이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는 걸 들어보면 정말 발음이 좋아요. 외국 가수들, 대중음악 하는 분들, 또는 아카펠라 하는 분들도 다 가곡을 자기 방식으로 자유롭게 부르게 하고 싶어요. 장르와 영역을 파괴해서라도 한국가곡을 세계화시키고 싶은 것이 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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