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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500만 시대]황혼 로맨스..동아리

전동키호테 2008. 11. 1. 09:15
[노인 500만 시대-노인이길 거부한다] 황혼 로맨스 하고… 동아리도 만들고
<2> 내 방식대로 즐기기
20~30년의 여생 위해 투자… 性에도 솔직
시설·프로그램 모자라 일부는 '지하철 유랑'
전문가들 "10년후 노인될 베이비붐 세대 주목"

 

아직도 성생활을 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되니…. 선생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올해 초 연세대 간호대학에서 열린 '노인의 성(性)과 사랑' 특강. 90세 김모씨가 비뇨기과 전문의의 강의가 끝난 후 손을 번쩍 들어 질문을 던졌다. 200석을 가득 메운 노인들은 한 시간이 넘게 '다시 연애를 하고 싶다', '성생활 용품을 써도 되는가', '부인이 잠자리를 거부한다'는 등의 고민을 털어놨다.

지난달 29일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열린 성 특강 후 무료로 나눠준 500개의 콘돔이 바닥났다. 종로구보건소 측은 "종묘 공원 근처 노인들의 성병 감염률이 10%에 달해 시작한 특강"이라며 "요즘 노인들은 성에 매우 개방적"이라고 말했다.

▲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열린 댄스교실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서울 근교의 한 실버타운에서는 최근 한 노인 커플의 '동거(同居)'가 화제가 됐다. 2년 전 부인과 사별한 이모(70)씨는 실버타운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60대 여성을 만나, 두 달 만에 살림을 합치기로 했다. 이씨는 "주변에 서로 사랑한다고 당당히 밝혔고, 자식들도 결혼에는 반대했지만 '두 분이 서로 의지가 되고 행복하면 됐다'며 동거에 동의했다"고 했다.

연세성건강센터 배정원 소장은 "요즘 노인들은 자신의 나이에 0.7을 곱해야 진짜 나이라고 믿는다"며 "이들은 예전에 비해 높아진 생활수준과 건강을 배경으로 자신의 삶을 다양하게 즐기려 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제 막 노년기에 들어선 60대의 경우, 고졸 학력이 30% 이상인 데다 경제력을 갖춘 경우가 많아 자신을 윗세대 노인들과 차별화하려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들은 남은 20~30년의 삶을 재설계하고, 자기 인생은 자기가 꾸려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프리랜서 기자, 숲 해설, 자원봉사 상담, 철학강의 수강, 판토마임 공부, 블로그 운영, 단전호흡, 노인 모델…' 자녀들이 "엄마를 보려면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장명자(여·68)씨의 하루는 아침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쉴새 없이 돌아간다. 그의 일은 대부분 무보수로, 오히려 자신이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장씨는 "자기 인생을 즐기는 법을 찾지 못하면 나뿐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짐이 된다"고 말했다.

최근 노인복지센터와 실버타운을 중심으로 '동아리' 만들기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서울노인복지센터 임태리 사회복지사는 "관심사가 비슷한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동아리를 만들어 주 2~3회 외국어나 시사토론 등을 한다"고 했다. 현재 이 센터에서 활동 중인 동아리는 28개로, 일어·영어 동아리는 인사동 길안내와 외국어 안내문 번역도 맡고 있다.

영어회화 동아리를 운영 중인 김상기(71)씨는 "동아리에서 내가 어린 축에 속할 만큼 나이가 들었다고 공부 욕심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10년 후 노인이 되는 현재 50대 베이비붐 세대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싸이월드 신희정 과장은 "50대의 미니홈피 이용률이 2004년 3만8000명, 2007년 95만명, 올해 150만명으로 급격히 늘고 있다"며 "이들은 60대, 70대가 돼서도 자신의 홈피를 관리하고 클럽·카페를 통해 동호회나 동문회를 조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실버산업 컨설팅업체 관계자는 "현재 60대 이상 노인들은 돈 쓰는 법, 노는 법을 몰라 이들 대상으로 하는 실버산업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10년 후만 되면 '와인세대'(45~64세)를 중심으로 시장이 급격히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예비 노인인 50대가 퇴직한 후, 20~30년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큰 숙제가 됐지만, 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준비는 거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현재 대부분의 노인들은 지자체의 노인복지관이나 노인대학에서 여가를 보내는 것이 현실. 이들 복지관의 프로그램도 건강관리와 춤·노래 등에 한정돼 있고, 노인 수에 비해 시설이나 프로그램 수도 턱없이 부족하다.

서울의 한 노인복지센터에서 서양철학강의를 듣는다는 김문식(78·퇴직교사)씨는 "복지관 프로그램이 천편일률적이라, 나처럼 배우고자 하는 노인들은 자기 계발할 기회가 거의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노인들은 '지하철 유랑(流浪)'에 나서기도 한다. 임모(73·서울 성수동)씨는 오전 10시만 되면, 1000원짜리 김밥 두 줄과 그날 신문을 들고 지하철에 오른다. 그는 "경로당도 하루 이틀이지, 화투 치다 100원 때문에 멱살잡이하는 노인들 보기 싫어 공짜 지하철을 타고 오이도, 인천, 천안을 떠돌다가 오후 늦게 돌아온다"고 말했다.

임씨처럼 소위 '공지족'(공짜 지하철 이용자)이라 불리는 노인들은 매년 증가해, 서울지하철 공사에 따르면 올해 9월 65세 이상 무임권 비율은 10%에 달했다.

무위고(無爲苦)·고독고(孤獨苦)에 시달리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노인들도 늘고 있다. 65~69세 노인 인구 10만명 당 자살자 수(자살률)는 1995년 19.2명에서 2005년 62.6명으로, 70~74세 노인은 24.8명에서 74.7명으로 늘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자살자 수도 늘어 75~79세 노인은 27.5명에서 89명으로, 80~85세 노인은 30.2명에서 127.1명으로 증가했다.

한남대 사회복지학과 임춘식 교수는 "노인들의 즐기고자하는 욕구를 다양한 레포츠나 문화활동으로 풀어줄 필요가 있고 개개인도 젊을 때부터 '잘 노는 법'을 익혀야 한다"며 "물론 경제력이 우선 뒷받침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