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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엔 젬병, 연애는 찌질, 헛똑똑이 알파걸

전동키호테 2008. 4. 23. 09:05

살림엔 젬병, 연애는 찌질하게… 헛똑똑이 알파걸

"엄마, 밀린 전기세 좀…" , "엄마, 다음달 백수랑 결혼해" ,절반은 과잉보호 부모 탓

 

#1. "에휴, 헛똑똑이라니까 헛똑똑이! 의사 딸이라고 남들은 좋겠다고 하지만, 내 속사정 누가 알겠누." 서른 다섯 살 노처녀 의사 딸을 둔 주부 황모(61)씨는 오늘도 혼자서 넋두리다. 아침에 딸한테 걸려온 전화 한 통이 화근이었다.  "엄마, 한전에서 전기세 밀려서 전기 끊는다고 전화 왔었어. 엄마가 알아서 해결해줘. 오늘 환자 많아서 바쁘거든." 공부 잘하는 딸을 뒀단 자부심으로 목에 빳빳이 힘주고 다녔던 황씨지만 이젠 걱정이 많다. "독립하겠다고 노래를 불러서 원룸 얻어줬더니 세금도 제때 못 내요. 나이가 몇인데 언제까지 뒤치다꺼리 해줘야 하는지…."

#2. 대학강사 딸을 둔 50대 김모씨도 속앓이가 심하다. '잘난' 딸이 이혼남과 결혼을 하겠다고 나선 것도 기가 막히는데, 상견례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너무 빨리 재혼한다고 해서 우리도 썩 내키지는 않는데, 워낙 그 댁 딸이 우리 애를 좋아한다고 해서…." 알고 보니 '대접' 못 받으며 더 매달린 쪽은 자기 딸이었다. 김씨는 "애가 차갑고 도도해서 결혼 못 하면 어쩌나 했는데 완전히 속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알파걸(운동·학업·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자보다 우월한 여성 혹은 여자 아이)' 딸 때문에 속앓이하는 엄마가 늘고 있다. 그런 딸들이 일이나 자기계발에선 능력 있지만, 연애·재테크 같은 일상 속 '실전'에는 젬병이기 때문이다.

 

■일엔 '알파걸', 연애엔 '오메가걸'
전문가들은 "알파걸 가운데 연애에 삐걱거리는 '오메가걸(그리스 문자의 마지막 'ω'를 합성한 신조어, 알파걸의 반대 의미)'이 많은 건 우연이 아니다"고 했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알파걸에게는 모든 것을 잘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다"며 "남자에게 이성적인 끌림을 줘야 한다는 강박이 엉뚱하게 신파조로 변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 능력이 있는 알파걸이 남자를 고르는 기준은 금전적인 능력이 아니라 지적·정서적인 성숙도"라며 "자기보다 성숙한 나이 많은 남자에게 끌리기 쉽기 때문에 '부적절한 관계'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분석했다.

경쟁에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평강공주 심리'를 자극하기도 한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박진생 원장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경쟁심을 유발하는 배우자를 싫어해 사회적 통념상 여자보다 '급'이 낮은 직업이나, 백수와 결혼하는 알파걸도 종종 있다"고 했다.

■알파맘, 친정엄마엔 애물단지
결혼한 알파걸, 즉 '알파맘'의 헛똑똑이 현상도 주목할 부분이다. 육아·살림 같은 엄마·주부로서의 덕목을 친정엄마에게 전가하는 경우다. "딸아이가 바쁘다는 핑계로 세금, 통장 관리까지 나한테 다 의지해요." 외손녀를 봐주고 있는 정모(59)씨는 "안쓰럽다가도 주부로서는 빵점인 것 같아 걱정된다"고 했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함인희 교수는 "서양의 알파걸은 일찍 독립하기 때문에 업무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똑순이'다. 한국에선 그 독립과정이 없어서 일상에서 무능한 알파걸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진생 원장은 "부모로부터 떠나는 사회화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30대 주부들이 꽤 있다"며 "절반은 부모 책임"이라고 지적했다.

■알파걸 딸, 과잉보호는 금물
알파걸의 원래 의미는 모든 방면에서 자기 관리에 철저한 여성. 하지만 한국에선 알파걸의 방점이 '좋은 직업'에 찍혀 있어 알파걸의 의미가 왜곡됐다는 지적이다. 황상민 교수는 "부모들이 공부 잘하는 딸을 만들기 위해 성·금전 등 실생활에 필요한 요소를 세속적인 걸로 치부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했다. 황 교수는 "부모가 딸을 알파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헛똑똑이로 키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박진생 원장은 "딸을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고, 자립심을 키워주는 것이 헛똑똑이를 방지하는 길"이라고 조언했다.        김미리 기자 miri@chosun.com  2008.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