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_교회_主_성광

교회는 보험입니다..예가교회 조익표목사

전동키호테 2007. 4. 2. 15:57

예가교회, "교회는 보험입니다"
예가교회 조익표 목사, "어려움에 처한 교우의 생활을 책임질 수 있어야"

 

서울역에서 숙대 방향으로 난 큰길에서 갑을빌딩 골목길을 따라 50미터 정도 따라 올라가다보면 유리로 된 건물이 숨어 있다. 예가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조익표 목사)다. 여느 교회처럼 첨탑을 장식한 십자가도 없고, 간판을 내걸어 놓지도 않았다. 3층 예배실 앞 벽면을 가르는 십자가를 빼놓고는 교회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건물부터 교회에 대한 통념을 무너뜨린다.

기자가 교회당에 들어 간 시간은 주일예배가 시작하는 오전 11시 10분 전. 이미 60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 중에 부를 찬송을 배우면서 예배를 준비하고 있다. 예배시간을 넘어서 들어오는 교인은 없다. 예배가 시작하면 예배실 문을 아예 잠근다고 했다. 불신자나 초신자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예배의 본질을 흐리는 타협은 거절한다. 예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상징하는 예전을 따라, 말씀과 성찬으로 이어지는 예배를 드린다. 초대 교회의 예전을 현실화하려는 오랜 공부와 공동체의 시행착오를 거쳐 예배예전을 다듬었다.

조익표 목사(48세)는 초신자에게는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강권하지 않는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자각하고 예배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래서 예가교회는 주일 예배보다 예배 후 공동식사에 모인 숫자가 더 많다. 아예 식사시간에 맞추어서 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3층에는 방문하는 불신자들이 흡연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방문객과 처음 신앙에 입문하는 초신자들을 위한 배려가 각별하다.

예가, 하나님의 새 가족

창현교회 허광섭 목사는 예가교회가 용산 청파동 철다리 밑 맞은편에 세를 얻어 사무실과 예배실을 꾸미던 초창기의 조 목사를 ‘왜라는 삶의 질문과 싸우고 있는 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는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물음을 던지고, 구체적인 방도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영적 지도자이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교우의 문제는 그의 문제입니까? 내 문제입니까?’, ‘우리 사회에서 돈에 굴복하지 않는 삶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100년 후에도, 500년 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는 지금도 쉽지 않은 문제들을 붙들고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그가 신학을 하고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다. 그는 1994년 건축 설계사로 일하면서 전도하는 열렬한 전도자였다. 그는 전도를 하다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절실하게 묻게 되었다고 한다. 애써 전도한 교우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성숙한 성도로 양육되지 못하고 그저 그런 기성교인들로 전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성서가 증언하는 교회처럼 사랑하지 않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사회봉사를 함께 하며 ‘교회’를 공부하는 ‘산돌’이라는 모임을 했고, 산돌모임은 이후 가정교회를 거쳐 현재의 예가교회가 되었다. 

"교회는 보험입니다"

   
 
  ▲ 예가교회 전경. (사진제공 예가교회)  
 

예가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누는 가족이 되고자 한다. 예가교회는 이렇게 말한다. “공동체란 ‘함께 살아갑시다’ 하는 말이다. 태어나고 자라서, 직장 다니고, 결혼하고, 애 낳고, 키우고 학교 보내고, 나이 먹어 은퇴하고, 희망 있는 죽음을 준비하는 등. 이 모든 인생의 여정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조 목사는 ‘교회는 하나님의 새 가족으로서 보험’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직장을 잃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100% 하나님의 것으로 고백한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에 따라 나누겠다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토대 위에 설 때, 교회는 서로에게 하나님의 구체적인 보장자산이라고 확신한다. 조 목사는 돈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진 소유를 내려놓는 것이 교회됨을 경험하고, 모든 필요를 넉넉히 주시는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삶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교회는 구체적인 구원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더 이상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은 우리가 함께 나누라고 주신 것임을 고백하는 곳입니다. 내게 좋은 일이 있건 나쁜 일이 있건 함께 내어 놓고 그것을 함께 나누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예가교회의 모체인 산돌모임은 애초에 사회봉사 모임이었다. 예가교회는 공동체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사회봉사에도 힘썼다. 1998년에 발행된 예가교회의 주보 100호에는 사회봉사 부문의 각종 상을 받은 특이한 이력이 적혀 있다. 서울특별시장 사회봉사상(1989), 성남시장 장애인 봉사상(1993), 경기도지사 장애인 복지증진 상(1996), 서울특별시장 아동복지시설 후원자 상(1997) 등. 작은 교회이지만 헌금의 대부분을 사회봉사를 위해서 사용했다. 한번 시작한 봉사는 그 기관이 자립하기까지 끈질기게 지속하고 있다.

올해부터 예가교회는 전도하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 조 목사는 전도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나는 그 구원을 보고 누리고 경험하고 오늘도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찬의 참된 은총이 베풀어지는 교회입니다. 성찬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주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리고 평화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 같이 사회봉사하던 동기와 '좋은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를 공부하다가 그런 교회를 세워보자고 의기투합하는 가운데 예가교회를 설립했다. 사진은 성경공부하는 모습. (사진제공 예가교회)  
 

다음은 조익표 목사와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예가교회를 개척한 동기가 있는가

젊었을 때 함께 사회봉사를 하던 모임이 있었다. 우리는 1980년대 중후반 8년 정도를 함께 활동하다가 1994년 교회를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기존 교회가 결여한 점을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 밖에서는 교회를 사랑을 나누는 집단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정작 교회 안에는 사랑이 실종됐다. 사랑이라는 말은 많이 하는데, 기독교인의 구체적인 삶에서 사랑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한국교회에서 통용되는 간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도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했더니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예수 믿었더니 돈 많이 벌고 자식 대학 가고 만사형통하더라는 이야기. 간증이라는 게 신앙의 증거로 채택되는 건데, 치유와 성공밖에 없다. 사랑에 관한 간증이 없는 게 이상했다.

가령 전에는 손해를 못 참았는데 예수를 믿고 다른 사람을 위해 수고하는 게 참 기쁘다는 간증은 극히 드물다. 설령 이런 간증은 하더라도 호소력이 떨어진다. “믿음을 갖기 전에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는데, 믿음을 가진 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고백이 옳은 것이 아닌가? 기존 교회에 염증을 느끼던 우리는 ‘좋은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공부하다가, 그런 교회를 세워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작은 가족 모임을 중심으로 하는데 초대 교회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인가

우리 교회의 모습이 성경에 나온 교회와 일치하느냐에 앞서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주어졌는데, 이것을 어떻게 실천할 거냐. 사랑 앞에 붙은 '서로'라는 말에 주목했다. 서로라는 건 일종의 폐쇄원이다. 서로라는 말에 이미 공동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계명을 교회 안에서 사랑하라는 말로 이해한다. 이 계명을 실행할 수 있는 양적 규모를 10명 이하로 보았다. 많아야 20명 정도 되는 이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구체적으로 돕는 실천을 하는 확대 가족 공동체가 우리가 지향하는 가정 교회다. 이런 가족이 다섯 개만 모여도 50~100명이다. 이렇게만 연대하면, 한 가족이 파산했을 때에라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서로 책임지는 관계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무엇이었나

초창기 우리 교회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함께 읽었다. 공동체에 관심이 많은 책이다. 약속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보면,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질 약속을 복음이라고 말하고, 사도행전에서는 초대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약속의 성취를 고백한다.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복음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썼다. 이게 교회다.

서로 경제적으로 책임지는 공동체가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 아닌가

교회에 온다면 우선 하나님이냐 돈이냐를 선택해야 한다. 예수님도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대단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결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갈 수 없다. 헌금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는 십일조를 드려 내 것 가운데 10분의 1만 하나님의 것으로 드린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우리 것의 100%가 하나님의 것이다. 성경은 다 내놓으라고 말한다. 헌금과 헌금이 아닌 내 것의 구분이 없다. 이렇게 보면 신앙이 달라진다. 새로운 게 보인다. 100% 내놓으라는 말은 결국 공동체가 나눠쓰라는 말이 아닌가. 헌금은 나눠쓰려고 걷는 것이다. 헌금은 각자 믿음의 분량을 따라서 하지만, 내 돈의 100%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게 고백할 때는 자기 돈을 쓰는 것도 조심스러워진다. 우리는 헌금을 교회 밖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쓰기도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족들과 나누는데 많은 부분을 쓰고 있다.

   
 
  ▲  남산보육원에서 아이들과 식사하는 모습 . (사진제공 예가교회)  
 
"교회는 보험이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교회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족을 책임질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교인들 가운데 형편이 어려워서 헌금할 입장이 안 된 경우가 생길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원칙을 정했다. 일단 어려운 사람들도 헌금을 한다. 대신 헌금 봉투에 자신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액수를 적어낸다. 그러면 재정 담당자는 청구한 액수를 온라인으로 넣어준다. 처음엔 말이 많았다. 100원 헌금하고 1000원을 써내면 망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왜 그 돈이 필요한지 심사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망하면 그만이지 뭐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하면서 이 원칙을 지켰다. 교인 상조기금 잔고에 청구 금액을 주고 모자라면 교인들에게 돈이 더 필요하니 상조기금을 더 모집하자고 광고한다.

교회 안에서 일종의 소액대부제를 실현하는 셈이다.

아직 심플한 틀이다. 난 회계보고를 받지 않는데, 지난 연말 상조기금 회계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작년에 수입이 거의 없었던 몇 가정이 있었는데 함께 나눔으로써 큰 부족없이 지내며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교회는 지금 등록 교인이 35명 정도니까 많이 나누고 있다고 생각한다. 초기의 문제는 아무도 안 가져갔다. 교인들이 어려움에 처했어도 처음에는 안 가져가는 것이었다. 버티지 말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고 해도 악착같이 버티더라. 그러나 나눠 쓰면서 재물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경험을 한다. 자기가 가진 돈을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하고 조심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신기하다. 우리 교인이 다른 교회 교인들보다 돈을 더 많이 내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일반 교회에서는 십일조해야 복 받는다, 부자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십일조가 갖고 있는 나눔과 사랑, 구제 정신을 가르쳤을 뿐이다. 기존 교회에서도 진통 없이 실현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교인으로 등록하는 데 결단이 필요하겠다. 재물 문제에 헌신하지 않으면 등록조차 어려운 구조다.

교회에 출석해 교인으로 등록하는 데 2~3년 정도 걸린다. 1년간은 우리 교회가 정한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는 헌금에 대한 교육도 들어있다. 사람들에게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하라고 한다. 등록하지 않더라도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등록교인은 35명 정도지만 주일 예배 인원은 70명가량 된다.

예가교회에서는 교인으로 등록함과 동시에 철저히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것 같다.
 
돈과 하나님 중에 누구를 믿을 것이지를 선택하는 것부터 신앙인의 삶이 출발한다. 그게 시작이다. 내가 소유한 게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 내가 잠시 맡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신앙의 출발이다. 우리의 삶은 그보다 훨씬 더 큰 데 있다. 친구를 위해 자신의 삶과 목숨까지 내놓은 예수님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가 충분히 향유하는 게 교회의 최종적인 목표다. 내 창고가 차는 것이 낙이었던 사람이 내 것이 비어가고, 누군가를 위해 수고하면서 내가 채워지고 있음을 느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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