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_교회_主_성광

목회자 세금납부 거부할 명분 없다.

전동키호테 2006. 2. 27. 15:13
"목회자 세금납부 거부할 명분 없다"
전북대 교수 김상득 목사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 구현 일조"
 
이 기사는 김상득 목사가 기독교 인터넷 매체 <에클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에클레시안의 허락을 얻어 게재합니다. 김 교수는 서울대에서 윤리학 박사를 취득한 후 장신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현재는 전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습니다. <편집자 주>

최근 조세 형평성과 관련하여 목회자의 사례비에 대한 세금 납부 문제가 다시 세간의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는 목회자의 세금 운동을 전개하는 단체까지 조직되었다는 보도에 기독인의 한 사람으로 기독교 윤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목회자의 세금 납부 문제를 논하자면, 우리는 먼저 납세 의무의 일반적 근거를 물어야 한다. 왜 기업가와 노동자는 국가에 세금을 내는가?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이에 답하자면 우리는 수입 내지는 경제적 가치가 어떻게 창출되는지를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의 철학적 토대는 존 로크의 노동가치설이다. 노동가치설이란 무소유의 자연에다 노동을 가함으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된다는 이론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갑이라는 사람이 흙을 재료로 사용하여 도자기를 빗어, 시장에서 10만원의 가격을 붙여 팔았다고 하자. 그러면 이 10만원의 가치를 어떻게 창출되었는가? 바로 노동에 있다는 이론이 노동가치설이다. 노동은 몸의 활동이고, 몸은 당사자인 갑의 몸이기에 그 가치 역시 갑에게 귀속되어야 한다고 노동가치설은 주장한다. 그래서 노동가치설에 따르면 노동의 결과물은 그 노동을 투여한 당사자의 소유가 된다. 그러나 10만원의 경제적 가치를 좀더 면밀히 분석해 보면, 노동 외에도 다른 몇 가지 요소도 기여하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첫째는 흙, 물, 빛 등의 자연이다.
흙이나 물 없이는 도자기가 만들어질 수 없다. 이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물로 여긴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선물인 자연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제조할 수 없기에 모든 가치의 궁극적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도공이 하나님의 선물을 공짜로 사용하듯이, 모든 사업가와 노동자는 자연을 공짜로 이용할 따름이다.

둘째는 사회의 기반시설이다.
즉, 도공은 수도, 도로, 전기 등의 사회 시반시설을 이용하지 아니하고는 도자기를 제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든 도자기를 시장에서 매매할 수도 없다. 물론 사회 기반시설에 대해 도공은 어느 정도의 사용료를 지불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용가치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국가의 엄청난 예산 투자 없이는 전기나 수도 시설은 존재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자유로운 상거래에 대한 국가의 보호이다.

국가는 군대와 경찰을 통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상거래의 자유를 보장해준다. 이러한 사회적 안전망이 구축되어 있지 않으면 도공은 결코 좋은 도자기를 마음 놓고 빗을 수도 없고 자유롭게 시장에 내다팔 수 없다.

국민이 수입에 대해 국가에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자연적 요소는 물론이거니와, 사회 기반시설 및 국가의 상거래 보호 장치가 없이는 아무리 한 개인이 노동을 가해도 새로운 가치는 창출되지 않는다. 수입 내지 가치의 창출에는 개인의 노동만이 아니라 자연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 목회자의 사례비 역시 예외가 아니다. 목회자 역시 전기, 전화 등의 사회의 기반시설을 활용할 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으며, 나아가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당연히 세금을 내야 한다.
이에 대해 일부 반대자들은 이중과세 문제와 목회자의 목회 활동은 노동이 아니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물론 목회자가 받는 사례비는 교인들이 이미 자신의 수입에서 세금을 납부한 돈임에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세금이 납부된 헌금’에서 다시 세금을 내는 것은 이중과세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다른 노동자, 예를 들어, 학교 교사가 받는 월급은 어떠한가? 
교사의 월급 역시 이미 세금을 납부한 학부모의 돈이다. 3차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들은 이미 세금을 납부한 돈에서 월급을 받는다. 이는 월급이 이미 세금을 납부한 돈이야 아니냐의 물음은 그 월급을 받는 근로자의 세금 납부 문제와 상관이 없음을 의미한다. 즉, 납세의 의무는 그 수입이 이미 세금을 납부한 돈이냐 아니냐의 물음과 상관이 없다.

세금납부의 근본이유는 국가로부터 혜택을 이미 받고 있기 때문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세금 납부의 근본 이유는 국가의 사회기반 시설을 이용하고, 나아가 국가가 개인의 재산 및 생명을 보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의 사례비가 ‘이미 세금을 납부한 헌금’이냐 아니냐의 물음은 세금 납부 문제와 근본적인 연관성은 없다. 사례비는 분명 목회자의 ‘수입’이기 때문이다.
교사의 교직 활동은 노동이지만, 목회자의 목회 활동은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목회자와 교사를 동등하게 비유할 수 없다고 누군가 반론을 제기할지 모른다. 물론 목회는 성직이기 때문에 세속 직업인 교사와 동등하게 취급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된다. 목회자의 활동, 즉 예배 인도, 설교, 심방, 기도 등이 노동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성(聖)과 속(俗)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과 속을 이원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즉, 성과 속은 존재론적으로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과 속은 결코 이원론의 관점에서 파악될 수 없다. 마치 인간 생명이 붙어있는 한, 영이 몸과 분리 불가능하듯이, 그리스도인이 육신의 몸을 띠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한, 성은 속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속, 즉 세상과 분리된 성은 오직 ‘저 세상’에서만 존재한다.

'성'은 '속'을 바탕으로 해서만 성립
이 세상에서 성은 오직 속과 함께 존재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 성은 속을 바탕으로 해서만 성립된다. 예를 들어, 교회 건물은 거룩하다. 그러나 교회 건물의 거룩성은 나무, 시멘트, 돌, 철 등의 재료로 지어진 속의 건물 위에서 성립된다. 일반 건물이 헌당식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룩성을 부여함으로 성전이 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성과 속은 존재론적 차원의 구별이 아니라 가치론 내지 윤리학적 차원의 구분이다.

기독교의 거룩성은 존재론적으로 세상과의 구별이 아니라, 가치론 내지 윤리학적 차원에서의 세상과의 구별을 말한다. 기독교인은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가르침 역시 이 세상을 떠나 수도원 생활을 하나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먹고 마시고 일하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치론적으로 혹은 윤리학적으로 거룩하게 하라는 뜻이다.

목회자도 노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 감당할 수없어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목회자의 활동 역시 노동임에 분명하다. 성직은 노동을 초월하는 것이지 노동이 아닌 게 아니다. 세상 속의 근로자는 생계비와 자아실현을 위해 노동한다면, 목회자는 이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거룩한 목적으로 위해 일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세상의 노동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 몸으로 하는 모든 활동은 노동이다. 목회자 역시 노동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

목회자의 목회 활동은 ‘노동+α’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 활동은 노동으로만 취급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노동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취급하는 것 역시 논리에 어긋난다. 따라서 목회자가 받는 사례비 역시 노동의 대가로 받는 수입이기에, 그 ‘수입’에 대해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목회활동이 노동인가의 논쟁은 유치한 질문.......세금납부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가를 물어야
사실 목회자 사례비에 대한 세금부과가 이중과세인가 그리고 목회 활동이 노동인가의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기독교인의 행동 표준은 무엇인가? 세상의 법이 우리의 행위 표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미 그 사람은 목회자는 물론이거니와 성도라고 부를 수 없다. 성도의 행위 표준은 ‘하나님께 영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세금 납부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물어야 한다.

예수님의 두 명령인 선교 명령과 사랑 명령의 관점에서 이 물음을 생각해 보자. 목회자는 왜 존재하는가? 그 이유는 한 가지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으로 복음을 증거 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즉 예수님의 유언인 선교 명령을 집행자로 존재한다. 목회자의 세금 납부 문제 역시 목회자의 이러한 존재 이유와 연관지어 논의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목회자의 세금 납부가 복음 증거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 답은 자명하다.

목회자의 세금납부는 복음증거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
목회자의 세금 납부는 복음 증거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설사 목회자의 사례비가 이미 세금을 납부한 ‘헌금’이고 또 목회자의 활동이 노동이 아니라 할지라도, 목회자는 당연히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금 납부는 최소한의 이웃 사랑이다. 왜냐하면 세금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위한 사회복지 기금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최소한의 이웃 사랑인 세금 납부를 외면한 채, ‘오른 손으로 한 것을 왼 손이 알게 하는’ 겉으로 드러난 이웃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목회자의 도리가 아니다. 세금 납부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목회자야말로 세상의 논리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챙기면서 살아갈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하나님의 종으로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듯이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 역시 세상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베드로와 함께 국세 반 세겔을 바쳤다(마 17:27). 설혹 다른 나라 목회자가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 대한민국의 목회자는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목회자의 세금 납부 문제는 복음의 본질과 연관된 물음이 아니라 문화의 물음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목회자에 대해 세금 납부를 원한다면 목회자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이웃사랑이고 그것이 복음의 문을 여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종교 성직자들이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다 해도, 기독교 목회자는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목회자는 선교 명령과 사랑 명령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납세거부는 무임승차, 돈에 대한 욕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선교 명령과 사랑 명령에 부합하는 납세를 왜 한국 교회는 거부하는가? 납세 거부는 무임승차요, 돈에 대한 욕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목회자가 사례비를 납부한다고 해서 교회 재정이 타격을 받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미자립교회 목회자는 과세표준액 이하의 사례비를 받기 때문에 교회 재정이나 목회자에게 아무런 경제적 손실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세금 신고는 총회 내지 노회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하면 행정적으로 큰 불편이 없을 것이다.

   
▲ 김상득 목사@에클레시안 제공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교회 부동산에 대한 세금 감면만으로도 감사하면서, 목회자들이 자발적으로 세금 납부 운동을 전개한다면,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신선한 청량제 구실을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