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지음
열림원 출판
2010년 3월 10일 초판
정말 오랜만에 깊은 감동의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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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는 여러 저술활동을 통해 촌철살인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2007년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됐다. 반평생 넘게 글을 쓰며 살아 왔어도 '글쟁이'라고 불린 적 없던 그에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니 바로 '예수쟁이'란 딱지가 붙었다. 절대로 신을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신앙을 가지니 뉴스가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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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대화문은 이어령 교수의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와 지난 18일 사랑의교회에서 있었던 <지성으로 묻고 영성으로 답하다> 강연내용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Q1. 당신은 한국의 대표적 문화 지성인이다. 바른 말하는 비평가로 살면서 기독교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했던 무신론자이기도 했다. 그런 당신이 어떻게 영성을 접했고 크리스천이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어령 : 나의 어렸을 적 별명은 하도 선생님들의 말에 토를 달아서 '질문쟁이'였다. 어릴 적부터 나의 지성은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깨였던 것 같다. 젊은 시절 문학을 공부하고 비평을 업으로 삼으며 내가 했던 일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독설을 내뱉는 것이었다. 나는 지성을 갈고 닦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2007년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온 딸을 계기로 세례를 받게 되고 하나님을 영접했다.
젊은 시절의 나는 성경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신을 부정했던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 하나님의 음성은 늘 내 가까이 있었다. 죽음 앞에 선 한없이 작은 인간의 존재를 깨달은 순간 문학이란 창조행위는 생의 허무함, 공포감,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들어 줬다. 인간은 죽음의 의식 없이는 생명을 느낄 수 없다. 하나님의 음성도 죽음이 아니면 들을 수 없다.
생을 따라 다니는 죽음을 늘 기억하고 사는 나의 목숨 속에, 숨결 속에 하나님은 늘 살아계셨던 거다. 죽음이란 극한 순간 앞에서 느끼는 하나님은 곧 생명, 목숨이었다. 그러면서 젊은 시절 나는 사단처럼 고발만 하는 비평가로 생명을 이야기 하지 못했음을 자각하게 됐다. 악을 고발했으나 그것은 사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증오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알게 됐다. 사랑이 죽음 보다 강하며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Q2. 책 제목처럼 당신은 지성에서 출발해 영성에 도착했는가?
이어령 : 아직 나는 영성에 들어가지 못했다. 책 하단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한 계단씩 올라가는 사람이 나를 상징한다. 나는 아직도 영성의 계단을 오르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지성의 세계에 속했던 내가 하루아침에 영성으로 거듭날 수는 없다. 하지만 참회하고, 회개하고 쥐어뜯고 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다.
Q3. 지성에서 영성으로 가는 길, 당신에게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이어령 : 아무리 훌륭한 과학자라고 해도 창조 원리 안에서는 이성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인간 DNA를 분석하는 과학자들도 끝내 이건 신의 섭리가 아니고서야 만들어 질 수 없다며 이성의 항복 선언을 하지 않나! 과학, 지성은 우주와 지구의 시간을 증명할 수는 있겠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 그것은 신앙만이 할 수 있다.
이성과 지성 없이 영성만 남는 종교는 경계하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담긴 성경을 읽을 때는 지성이 아닌 영성으로 읽어야 한다. 젊을 때는 날카로운 이성으로 성경의 잘못된 점을 조목조목 따지며 믿지 않는 이유를 댔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 난 뒤 신앙은 체험이며 경험이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됐고 성경을 영성적으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통째로 먹지 못하고 만두피 하나 속 하나하나 구분해서 먹는 만두처럼 성경을 분석해서 씹으려 했다면, 이제 성경을 통째로 씹어 먹는 독해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지성에서 영성으로 가는 피나는 투쟁길 위에 여전히 서있으며 죽을 때까지 신앙은 어려울 것 같다. 반석 위에 세워진 베드로도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는데 하물며 우리 평범한 인간들에게 신앙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Q4. 딸이 실명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난 뒤 당신은 하나님과의 기도에서 약속한데로 세례를 받게 됐다. 그러나 갑작스런 손자의 죽음으로 당신은 성경을 덮고 하느님을 원망한다. 죄 없는 손자의 죽음에 애통해했던 당신이 다시 영성의 길로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어령 : 미국에 살고 있는 딸 아이가 전화로 망박방리증에 걸려 실명 위기에 처했단 소리를 했을 때 절망감이 들었다. 처음 태어나 나에게 보여준 최초의 미소, 행복을 머금은 눈을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고통과 좌절감을 넘어 분노를 느꼈다.
딸은 오랫동안 지상의 아버지보다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돌봄을 받으며 큰 힘을 얻었고 나의 사랑이 보잘 것 없음을 깨달았다. 열심히 믿는 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하와이 교회에 첫 발걸음을 내밀었고 "우리 딸 낫게 해주시면 교회에 나가겠다"고 겁 없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을 때는 그게 정말 사실이 될 줄 알지 못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닌 하늘의 뜻대로 이뤄지며 2007년 일본에서 딸의 생일날 세례를 받게 된다. 사랑하는 딸이 힘들 때 곁에 있어준 하늘의 아버지 앞에서 나의 지성은 무릎을 꿇고 영성을 접했다. 하지만 세례 후 3개월 뒤 25살의 외손자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아무 죄 없는 외손자를 데려간 하나님에게 "왜 나에게 이런 불행을 주십니까"하고 원망하며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그러다 어느 날 도스토에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의 한 대화 장면이 떠올랐다. "사망이 죄의 값이면 갓 태어난 아이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하시렵니까?", "그것은 이미 2천 년 전에 끝난 이야기다. 아이보다도 더 순결한 예수님이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욥의 이야기, 하박국, 예레미야애가를 읽으며 하나님이 줘서 믿고 안줘서 안 믿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딸의 병, 손자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생의 시련 앞에서 드는 의문은 예수님의 죽음과 성경 속 이야기를 통해 풀렸고 신앙은 더욱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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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5. 당신은 문화비평가로서 그동안 여러 저서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한국문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들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한국처럼 기독교가 짧은 시간 안에 뿌리를 내려 교회의 성장과 신도의 증가를 가져온 경우는 드물다. 당신은 한국문화와 기독교라는 종교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이어령 : 한국문화와 기독교와의 만남을 볼 때마다 대단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한국문화는 기독교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는 토양이었다.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는 데 첫 번째는 한국인이 참 철학적, 종교적 민족이라는 거다. "배고파 죽겠다", "좋아 죽겠다"처럼 유난히 죽는다는 말을 많이 하는 한국 사람들은 죽음이 삶의 극한 언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죽음을 잊지 않고 살았고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와 쉽게 연결됐다.
두 번째는 먹는다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한국어, 한국문화와 기독교에서 성찬식을 하는 먹는 제례가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함께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다. 빵은 예수님의 살이었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였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행위를 통해 한 몸이 됐다. 한국의 제사문화는 우상숭배라고 비난받지만 성찬식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빵과 포도주를 마시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처럼 제상에 차려놓은 음식을 먹으며 조상의 영을 영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레오다르도 다 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의 예수는 한손은 주먹을 쥐고 또 한 손은 손바닥을 펴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쪽은 받아들이는 손이고, 한쪽은 악을 징벌하는 손이다. 정의와 사랑의 결합, 그것이 예수님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문화가 바로 한 손은 주먹을 쥐고 한 손은 벌리는 모순되는 것을 합치고 있다. 영어에서 올라간다는 뜻인 '엘리베이터' 는 우리말에서 '승강기'로 내려감과 올라감의 이중적인 뜻을 지닌다. 서랍을 뜻하는 우리말인 '빼닫이'는 빼고 닫는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는데 영어, 일어, 중국어에서 '서랍'은 모두 뺀다는 뜻만 가지고 있다.
Q6. 끝없는 인간의 탐욕은 결국 경제공황으로 세계 경제에 적신호를 켰고, 다른 종교와 인종을 배척하는 움직임이 세계 곳곳의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물질 만능의 자본주의는 빈부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고,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들이 갈수록 늘어나 다민족 사회가 돼가고 있지만 한국 사회의 차별과 편견의 벽은 여전히 높다. 이럴 때 기독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는가?
이어령 : 내가 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를 택한 것은 다른 종교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불교와 유교는 어렸을 때부터 내 몸 안에 배어 있는 혈액형과도 같은 것이었다. 성경의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처럼 내 가족, 내 민족, 내 국가를 뛰어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은 기독교의 정신의 기본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에게는 결핍돼 있었고 사마리아 인을 용서하고 받아들인 예수를 나의 주로 영접할 수 있게 됐다.
"내 몸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자"라고 말씀한 예수님은 타종족의 피가 섞이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마리아인을 용서하고 그들을 같은 이웃이라고 했다. 기독교의 사랑은 모순과 대립을 결합하고 융합하고 조화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이라면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며 다문화 시대 한국문화를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가져온 곳 ;
http://www.unionpress.co.kr/news/detail.php?number=59765&thread=02r01r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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