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_건강_食_교육

축복 ? 가려울 때 긁을 수 있으면.

전동키호테 2010. 5. 9. 09:27

축복? 수녀가 말했다....."…두 팔을 반 정도 펼 수 있어서 숟가락과 젓가락 사용하여 밥을 먹을 수 있고 머리가 가려울 때는 앞부분을 긁을 수 있고 눈곱을, 귀지를, 콧속을 청소할 수 있고…옆으로 눕기 5분, 엎드리기 5분을 할 수 있고…등을 45도 각도 정도로 구부릴 수 있는 축복."  

 

윤석인(尹錫仁·60)은 바닥에 누워 사는 장애인이다. 열세 살 이래 직립보행을 해본 적이 없다. 소아(小兒) 류머티스 관절염이 발병해 뼈마디 연골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몸은 굳었다. 윤석인은 가톨릭 2000년 역사상 첫 장애인 수녀다. 그는 경기도 가평 중증장애여성시설 '성가정의 집' 원장이다. 윤석인은 화가다. 휠체어에 누워 조막손으로 붓을 놀려 그림을 그린다. 뼈마디를 후벼파는 고통과 세상으로부터 절연된 고독을 넘어 그가 말했다. "나를 지켜준 가족, 나를 가르쳐주고 받아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내가 살아있다."

윤석인은 1950년 4월 25일 태어났다. 은행 다니던 아버지는 접대받을 줄도 할 줄도 몰랐다. 월급만 가져와 세 아들, 두 딸을 길렀다. 윤석인은 넷째딸이다. 집은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았다. 오직 화목했다.

간호사를 꿈꾸던 윤석인은 불치병으로 평생을 누워 지낸다. 분노와 슬픔을 딛고서, 이제 윤석인 보나 수녀는 장애인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천사가 되었다. / 박종인 기자

서울 돈암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윤석인은 씩씩했다. 담벼락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줄넘기를 하면 두뼘씩 공중부양을 했다. 그는 "나이팅게일 같은 간호사가 꿈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씩씩했던 아이가 1961년 쓰러졌다. 온몸이 타는 듯한 고통으로 소녀가 몸부림쳤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관절염"이라고 했다. 열한 살짜리 애가? 말머리가 두 개 붙었다. '소아 류머티스' 관절염이라는. 관절 끝에 붙은 연골이 차츰 사라져 움직이기만 하면 뼈마디를 갈아내는 고통에 시달리고 끝내 관절이 굳는 악성 관절염이라고 했다.

학교도 관두고 수단과 방법을 다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2년 뒤 윤석인은 보행(步行)을 멈췄다. 머리를 들고 좌우로 돌리고 두 팔꿈치 아래를 겨우 들 수 있는 그런 중증장애인이 되었다. 동무도 없고, 바깥 나들이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대청마루 한쪽을 책장으로 만들어줬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셰익스피어 희곡 완역본을 읽고 철학책을 읽었다. 처음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책에 미친듯이 몰입하니까 나중에는 다 이해가 됐다."  모르는 말은 오빠, 언니, 동생이 풀어줬다. 영어도 한문도 독학했다. 그가 사용하는 어휘와 사유 방식을 보면 초등학교 중퇴 학력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모두 책을 통해 배운 것이다.

 

30대 때까지 그가 알고 있는 세상은 책을 통해 본 세상이 전부다. "그러다 보니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현실감이 떨어진다. 세상을 관념적으로 보게 되었고 굉장히 이상적이고 고전적인 세상을 상상하며 살게 되었다. 세상에 나와 보니 나는 '맹탕'이었다, 맹탕."  20대까지 책에 미쳐 살았다. 너무 억울해서 그러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농약을 먹을까? 자동차에 치여 죽을까? 목을 매? 동맥을 끊어?' 별의별 자살 기법을 연구했지만 용기는 나지 않았다. 자살을 포기하니 의문이 일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이렇게 살다 죽어야 하나, 뭔가 길이 있을 텐데… 알 수가 없었다." 눈앞에 책이 한 권 나타났다. '교부들의 신앙'. 1876년 미국 제임스 기본스 추기경이 쓴 가톨릭 입문서였다. 마음을 돌렸다. "그래, 살자. 살다가 살다가 끝내 길이 안 보이면 신을 찾아보자, 라고 생각했다." 신앙은 없었다.

가족은 그런 맹탕을 보듬어 준 존재였다. 딸이 방안으로 숨어들던 날 아버지는 걷지 못하는 딸을 위해 모든 종류의 가족 나들이를 중단했다. 큰오빠 윤석구(69)가 장가들 무렵이었다. 애인과 만나던 날 큰오빠는 여동생을 데리고 나갔다. "내 동생 석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내가 평생 맡아야 할 아이다. 당신이 싫다면 지금 헤어진다." 미래의 올케 이한순(65)은 "이런 집이라면 당연히 시집 가야 할 집안"이라고 생각했다. 윤석인이 말했다. "그 배려로 인해 우리 남매에겐 어린 시절 추억이 없다. 나는 가족에게, 참 많은 사랑의 빚을 졌다"라고.

1979년 큰오빠가 결혼을 하고 분가했다. 윤석인은 고독해졌다. 그해 엄마를 졸라서 공예를 배우겠다고 했다. 엄마는 공예학원에 등록해 그날그날 배운 내용을 집에 돌아와 딸에게 가르쳤다. 빵공예를 했고 꽃공예를 했다. 주변사람들에게 작품을 팔았다. 태어나 처음 맛보는 성취감이었다. 이듬해 올케가 권유했다. "아가씨가 조카들에게 그려준 로봇과 공주 그림을 보니 소질이 있다. 그림을 배워보시게." 홍익대에 다니던 대학생이 집으로 와서 그림을 가르쳤다. 6개월 동안 아그리파, 줄리앙 석고 데생을 했다. 다음에는 수채화로 유화로 두 석고상을 그렸다. 선생이 말했다. "며칠 만에 포기할 줄 알았는데 끈기와 소질이 참으로 놀랍다."

엄마를 그렸고 사진을 보며 풍경도 그렸다. 그런데 2년 만에 슬럼프에 빠졌다. "꽃 하나 잘 그린들 이게 무슨 소용인가. 내가 피카소도 아닌데 그림으로 역사에 남을 사람이 될 수도 없지 않나. 내가 할 수 있는 거, 세상에는 없다." 죽겠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어둠 속으로 그녀가 침몰해갔다. 그 어둠 속에서 그녀는 20대에 읽은 책을 떠올렸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다. 이거저거 다 안 되면 신을 찾겠다던 결심이."

"나 성당 갈래." 1982년 어느 날 딸의 부탁에 불교신자인 엄마가 동네 복덕방에 물어물어 성당을 찾아갔다. "내 딸이 이러이러한데 신자가 되고 싶다 한다. 가능한가?" 성당은 통신으로 교리학습을 하도록 배려했다. 학습이 끝나자 신부가 집으로 와서 영세를 했다. 세례명은 '보나(Bona)', 라틴어로 '좋은'이라는 뜻이다. 윤석인은 "절박한 영세였다"고 했다. "신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너무 어두우니까 오로지 빛을 찾겠다는, 벗어나겠다는 그런 절박감밖에 없었다."

그리고 19년 만에 처음으로 성당 봉사자들을 따라 나들이를 했다. 미술관도 가보고 소풍도 갔다. 그림을 다시 그렸다. 한참을 지켜본 봉사자들이 말했다. "좌절했던 나, 보나가 그림 그리는 모습 보고 의욕을 되찾았다" "당신 덕분에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게 됐다"…. 야유회에서 만난 한 신부는 이렇게 부탁했다. "나를 위해 기도해줘요."  이 내가 남을 위해서? 그 순간 윤석인에게 씌워 있던 어둠이 소멸했다. 책도 다시 읽고 그림도 되살아났다. "가족의 동행(同行)으로 감내한 인생, 서른 두 살에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받아주고 동행하며 나를 살려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도 없었다."

1986년 서울 군자동에 있는 작은예수회라는 단체를 찾아갔다. 장애인운동을 하는 박성구 신부가 운영하는 장애인공동체다. "여기 와서 살아도 될까요?" 수줍은 물음에 박성구 신부가 즉답했다. "그래, 당장 내일 와라."
화끈한 대답에 오히려 주눅이 들어 물러났다. 가족들 걱정과 반대도 심했다. 1년을 끌다가 공동체에 들어갔다. 신부는 가혹했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똑같이 대했다. 기상부터 취침까지 모든 일정이 똑같았다. 게으르다고 혼도 나고, 그림 안 그린다고 깨지고." 신부는 늘 이렇게 말했다. "골방에서 울면 뭐하는가, 기왕 울려면 거리에 나와서 울어라." 윤석인은 "나와 신부님은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과 같다"고 했다.

1991년 장애인 미술대전에 입선하기도 했다. 그림은 한국과 로마 개인전 3회로 이어졌다. 어느날 박성구 신부가 물었다. "수녀가 되고 싶지?"  교회 관습법에 따르면 수도자는 신체가 건강해야 한다. 남에게 봉사하고 치열한 수도 생활을 견디기 위한 조건이다. 그런데 박성구 신부가 김수환 추기경을 4년 동안 설득해 허락을 받아냈다. 1992년 12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생활하는 '작은예수수녀회'가 창립됐다. 장애인 윤석인과 비장애인 3명이 수련 수녀로 입회했다. 수녀회 회칙에서 '신체 건강'이라는 요건은 삭제했다.


1999년 윤석인은 종신서원을 하고 정식 수녀가 됐다. 가톨릭 2000년 역사에서 처음 탄생한 사지 마비 수녀였다. 찾아온 가족은 수녀복 입은 그녀를 보고 울었다. 많은 의미를 지닌 눈물이었다. 2010년 현재 수녀회 소속 수녀 28명 가운데 14명이 장애인이다. 윤석인은 이후 작은예수수녀회 원장으로 있다가 작년에 '성가정의 집' 원장이 되었다. 박성구 신부가 만든 공동체 작은예수마을의 일부다. 장애인이 버거운 가족들이 그들을 위탁하는 곳이다.

그 성가정의 집에서 윤석인을 만났다. 넉넉한 얼굴에 전동휠체어에 누워 아기손만한 손을 흔들며 속삭이듯 수녀가 대화했다. 백의의 천사를 꿈꾸던 소녀가 멀고먼 길을 에둘러 치유된 영혼으로 돌아와 이제 상처난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는 것이다.

"왜 내가 장애를 갖게 되었는지 그 뜻을 분명히 알게 됐다. 꾀 부리지 않고 내가 가진 바를 실천해 더불어 사는 것이다. 축복이다."

축복? 수녀가 말했다.

"…두 팔을 반 정도 펼 수 있어서 숟가락과 젓가락 사용하여 밥을 먹을 수 있고 머리가 가려울 때는 앞부분을 긁을 수 있고 눈곱을, 귀지를, 콧속을 청소할 수 있고…옆으로 눕기 5분, 엎드리기 5분을 할 수 있고…등을 45도 각도 정도로 구부릴 수 있는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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