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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영웅들,.. 기억하기...

전동키호테 2009. 12. 8. 18:08

이현주 기자 = 국립국어원이 내년부터 '개방형 한국어 지식 대사전'을 구축한다. 8일 국어원은 이를 기념해 국어사전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사전 편찬에 일생을 바친 역사적 인물들을 재조명했다.

◇최초 국어사전 '말모이'
'말모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이다. 주시경,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이 1910년 무렵 조선 광문회에서 편찬하다 편찬자들의 사망이나 망명으로 작업을 끝내지 못한 사전 명칭이다.

< 사진 > 왼쪽부터 정인승, 최현배, 이희승, 이윤재, 정태진

 

'말모이' 편찬 작업 당시 이미 외국인들은 7, 8종의 한국어 사전을 발간했다. 프랑스말로 된 한불자전(韓佛字典), 법한자전(法韓字典), 영어로 쓴 한영자전(韓英字典)과 영한자전(英韓字典), 라틴말로 쓴 납한자전(拉韓字典), 일본말로 쓴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과 국역사전(國譯辭典) 등이다.

뜻있는 사람들은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든 사전이 있어야겠다는 일념으로 계명구락부에 조선어사전 편찬부를 두고 사업을 진행했다. 개성의 이상춘, 중국 상해의 김두봉 등이 사전 어휘를 수집하기도 했다.
1930년 한글날 기념식 석상에서 유지 108명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만들어졌다. 맞춤법 통일, 표준어, 들온말 적기법(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 사전 편찬을 위한 밑작업이 이뤄졌다.

◇"사전편찬은 독립운동" 일제탄압
일제의 탄압은 1942년 함흥 영생여고보 4학년 박영희의 일기장을 시작으로 본격화됐다. 조선어학회에서 사전 편찬에 몰두하던 석인(石人) 정태진에게 갑자기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서 소환장이 왔다. 박영희의 2학년 일기 한 부분에 일본어 사용을 반대한다고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 발견됐고 배후에 정태진 이 있다는 쪽으로 몰아갔다.  일본은 정태진이 마침 사전 편찬 사업을 한다는 사실을 빌미로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의 단체이며 사전 편찬 작업이 독립 운동의 일환이라는 등의 자백을 억지로 받아냈다. 이를 근거로 1942년 10월1일부터 1943년 3월6일까지 45차례에 걸쳐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 검거 선풍이 불었다. 최종적으로 일본 경찰에 잡힌 사람은 모두 33명이었다.

이윤재가 병고로 세상을 떠났고 한징도 감옥에서 세상을 등졌다. 1944년 12월21일부터 1945년 1월16일까지 9회에 걸친 공판 끝에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다섯 사람이 실형을 받았다. 이들은 8월15일 광복 때까지 감옥에서 고생해야 했다.

10월1일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정치 운동에 가담하지 말 것 ▲철자법을 보급하고 사전 편찬을 계속할 것 ▲국어 교과서를 편찬하고 국어 교사를 양성할 것 등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조선어학회 6영웅 정인승, 최현배, 이희승, 이윤재, 정태진, 이극로
건재(健齋) 정인승(1897~1986)은 사전 편찬과 함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수정·기초위원,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의 편집·발행을 맡았다. 1945년 광복 이후 한글과 국어 강습, 강의에 정성을 쏟으며 한편으로 교재 편찬에 힘썼다. 2005년에는 고향인 전북 장수군에 건재 정인승 선생 기념관이 개관됐다.

외솔 최현배(1894~1970)의 학문적인 3대 업적은 '우리 말본', '한글갈', '조선 민족 갱생의 도'다. '우리 말본'은 스승 주시경의 학문과 나라 사랑 정신을 이어받아 국어 문법 전반을 전통 문법이라는 하나의 이론적인 틀로 완성했다. '한글갈'은 훈민정음의 역사적 문제와 한글의 이론적 문제를 망라해 체계적으로 만든 것이다. '조선 민족 갱생의 도' 역시 겨레 사랑의 정신과 철학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울산 중구 동동에 있는 그의 생가터는 울산시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돼 남아있다.

일석(一石) 이희승(1896~1989)은 경성제대 조선어급문학과 졸업 후 조선어학회에 입회했다. 사전 편찬, 맞춤법, 표준어, 외래어 표기법 문제 등에 적극 관여했으며 저서로 '조선어학논고', '국어학개설', '국어대사전' 등이 있다. 그의 생가는 경기 의왕시 포일동에 남아있다.

환산(桓山) 이윤재(1888~1943)는 1919년 3·1운동 때 평북 영번 숭덕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일본에 잡혀 3년 동안 평양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이후 1937년 6월7일 동우회와 흥사단 사건으로 검거 선풍이 일면서 서대문 감옥에서 1년 동안 지내야했다. 결국 1942년 10월1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도 홍원 경찰서에 갇혀 고초를 겪다 1943년 12월8일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저서로는 '조선 글은 조선적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의 경과 기략',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의 내용-표준어 발포식 석상에서 설명한 것', '조선어사전 편찬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등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석인 정태진(1903~1952)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1945년 광복 후 다시 돌아와 사전 편찬 작업을 마무리했다. 1950년 6·25 동란까지 '큰사전' 셋째 권을 펴냈으며 1952년 넷째 권의 교정을 끝마치고 고향 파주로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경기 파주에 정태진기념관이 설립됐다.

고루 이극로(1893~1978)는 '잊혀진 한글학자'다. 1927년 독일 베를린대 졸업 후 귀국해 한글 운동에 앞장섰고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조선말 큰사전 편찬 기금 모금을 담당하는 등 핵심적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1948년 월북해 학계에서 언급되지 않다가 최근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에 그의 생가가 파손된 채 남겨져서 생가 복원 모금 운동이 추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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