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 간 신도는 마당이 어지러우면 빗자루 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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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간 신도는, 마당이 어지러우면 빗자루를 들고, 물독이 비었으면 물지게를 지는 거 아닙니까?”중국대사로 내정된 소감을 묻자 서울대 류우익(전 대통령실장) 교수는 느릿하게 비유를 들었다. MB 정권에 뛰어든 몸이기에 대통령이 부르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취지다. ‘대통령의 복심’다운 표현이다. 인터뷰 내내 그의 입에선 딱딱한 한자성어가 쏟아져 나왔다. 선공후사(先公後私·공적인 일이 사적인 일보다 먼저), 극기복례(克己復禮·개인적 욕망을 뛰어넘어 예를 따르다), 학이보국(學而報國·공부하여 나라에 기여한다) 등등. 어렵사리 성사된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방은 주인을 닮았다.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세 들어 있는 세계지리학연합회(IGU) 사무총장실. 장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넓고 하얀 벽 한쪽엔 대한민국 지도, 다른 한쪽엔 사무총장 임명장 액자, 그리고 책상 위 지구본. 무미건조한 방에서 3시간 동안 만났다.
-지리학을 전공하셨는데, 정치에 깊이 뛰어든 이유는.
“사람들이 지리학을 잘 모르죠. 저도 처음 대학 진학할 때만 해도 정확히 몰랐습니다. 어려서 집안에서 전통교육을 받으면서 ‘상통천문, 하달지리(上通天文下達地理·위로 천문에, 아래로 지리에 밝음)해야 한다’고 배웠죠. 또 시골 작은 학교(경북 상주고등학교)를 다니다 보니 담임선생이 3년간 같았는데, 지리학을 전공한 분이에요. 지리학을 배우면 세계를 누비고 세상사를 다 알 것 같았습니다. 그런 생각에서 출발했기에 제가 전공한 것도 지리학 중에서 지정학(地政學·정치지리학 또는 지리정책학)입니다.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부전공으로 역사와 사회학을 공부한 것도 현실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죠. 그러다 보니 귀국해 정부의 각종 정책에 대한 자문에 응하는 역을 많이 맡았습니다. 1989년부터 1998년까지 10년간 정권을 넘어가며 대통령 자문위원(21세기 위원회와 정책자문위원회) 한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학자로서 정책자문역 하는 것과 대통령 만들기에 뛰어든 것은 다르죠.
“그건 이명박이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죠.”
-확신의 근거는.
“학자 출신이라 세상일을 좀 크게, 논리적으로 보는 편입니다.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2005년께입니다. 당시 노무현 정권이 너무 폐쇄적이고 한쪽으로 쏠려 있어 정권교체를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다음 대통령은 과거 정치에 대한 부채가 없는 사람,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이룬 사람이어야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명박 시장이 그런 사람이라고 확신한 근거는.
“하루 아침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고…, 사실 이 대통령이 초선의원이던 1990년대 초부터 이런저런 자문에 응하면서 생각을 나눠왔습니다. 이 대통령은 경험이 많았던 분이고 저는 정책과 이론을 공부한 경우인데, 얘기하다 보면 그게 서로 맞아떨어지는 거예요. 내가 대통령의 생각을 잘 읽는다고 하기보다 점점 생각이 비슷해진 거죠. 학자 입장에서 자기 철학을 이해하고 받아주고, 또 구현해줄 정치인을 지지하는 건 당연하죠.”
-당선도 확신하셨나요.
“당연하죠. 고건·박근혜 같은 분들의 당선 가능성이 30~40%나 되고, 이 시장은 9%밖에 안 되던 2006년에도 확신했습니다. ‘어떻게 된다고 확신하나’라고 물으면 저는 ‘반드시 돼야 하기 때문에 된다’고 말합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한 번도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실장을 맡게 된 건.
“선거에 이긴 다음 날 이 당선인을 만나 인사했습니다. 지리학회 일 보러 프랑스로 떠난다고. 당시 저는 정권교체에 성공했으니 본업(세계지리학회 사무총장)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당선인이 ‘류 교수 왜 그래’라며 말리시더군요. 그래도 떠났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집안에 상을 당해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선인이 다시 불러 인수위원회 일을 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촛불로 4개월 만에 물러날 때는 억울한 마음이 컸었다던데.
“당시엔 그런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어차피 거쳐야 할 홍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권 초 정부와 청와대를 전면 교체하고 새출발하느라 정신이 없었죠. 그러다 보니 국민과 소통하는 공간이 부족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크게 보자면 당시는 좌파에서 우파로 권력이 이동한 첫 경험입니다. 아무리 민주국가라도 갈등이 없을 수 없죠. 그래도 그만하면 순탄하게 넘어왔다고 봅니다. 대다수 국민의 의식이 상당히 성숙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중국말은.
“그걸 못 배웠어요. 유럽에서 공부하고 활동해 영어·독일어엔 불편이 없고 프랑스어도 좀 합니다. 어려서 한문 공부를 좀 했고, 나름대로 어학엔 소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임하기 전에 기초적인 회화 정도는 익혀갈 생각입니다.”
-청와대 시절 ‘힘·욕망·감정을 절제하라’고 하셨죠. 실제로 너무 엄격하셔서 주변에서 섭섭해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공직자라면 당연히 선공후사(先公後私)하고 극기복례(克己復禮)해야죠. 서양에선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하는데, 저는 극기복례란 말을 더 좋아합니다. 개인의 욕망과 힘 같은 것을 절제해야 공공에 봉사할 여지와 여력이 생깁니다. 대통령이 재산을 다 내놓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죠.”
-재산헌납과 관련해 대통령이나 가족이 아쉬워했다는 얘기도 나돕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이미 시장 시절부터 마음을 굳혔습니다. 다만 ‘돈이 많아 헌납한다’는 얘기는 싫어하셨죠. 돈이 많아 헌납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공직에 오른 사람이 자진해 봉사하는 마음에서 내놓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김윤옥 여사도 동의했고요.”
-교수님의 공적 활동 때문에 본의 아니게 주변에서 섭섭해할 수도 있는데.
“지난 추석 거의 3년 만에 모교를 찾았습니다. 그동안 일부러 안 갔죠. 경조사에도 안 갔고요. 고향 친척이나 동문들이 섭섭하다고들 하더군요.”
-가족 얘기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가족들도 섭섭해하지 않을까요.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물론 부족한 것도 많겠지요. 제가 땅투기 하려 했다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했을 겁니다. 국토개발 자문에 응하느라 전국 지도에 선 그으면서 살았으니까요. 하지만 단 한 평도 사지 않았습니다. 97년 팔당 인근 개발제한지역에 집을 사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지 못한 점도 있을 겁니다. 작은아들이 어려서 백혈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떴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5년간 아들 병간호하느라 서울대병원에서 살았습니다. 병원 사람들이 저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죠. 병상에서 공부해 고려대에 합격했습니다. 합격하고도 대학을 못 다녔습니다. 가슴에 묻었죠. 조금 있는 돈 모아 아이 모교에 장학금으로 냈습니다. 큰아들도 미국 유학 중 대통령실장 아들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업에 지장이 생겨 귀국시켰습니다. 그래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오병상 정치국제에디터, 정효식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중앙일보 2009년 11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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