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_교회_主_성광

믿은은...?

전동키호테 2009. 11. 23. 15:44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1,2).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막 9:1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교회에서 유년 교사가 믿음에 대하여 열심히 가르쳤다.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이야기며,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바다에 옮길 수 있다는 말씀, 또 믿음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는다는 말씀, 이런 성경의 말씀들을 성의 있게 가르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초등학교 5학년짜리 남자 아이가 환한 얼굴을 하고 불쑥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믿음이 참 좋은 것이네요."
"그렇고 말고."
"그런데 선생님 믿음이 좋은 것은 알겠는데 믿음이 무엇이예요?"
"믿음이 무엇이냐고? 믿는거지 뭐, 예수님을 믿는 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이지 똑똑히 모르겠어요!"
당황한 선생님은 자기에게 마음으로 물어봐도 대답해 줄 분명한 개념이 떠오르지 않았다.

흔히 대답으로 쓰는 말이 히브리서 11:1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런데 이말은 믿음이라는 말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요14:1)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믿음이 인격적(人格的)인 사실임을 지적한다. 바위를 믿으라, 산을 믿으라,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믿음은 인격과 인격 사이의 정직한 거래이다. 거래는 약속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약속이 개재되어 있다. (문149. 약속관계에 있어서 믿음은 무엇인가?) 어떤 인격자가 자기의 인격을 담보로 하여 다른 인격자와의 사이에 맺은 약속을 피차 정직하고 정확하게 이행하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문150. 미신이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인격이 없는 것에 대한 믿음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미신이라고 말한다. 믿음이란 일반작인 생활의 여러 국면들에도 적용되고 있다. 구태여 종교적인 술어로만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신앙(信仰)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그 개념이 종교적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믿음은 신앙과 같은 뜻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서 어떤 약속을 주는 그 인격자가 그 신앙의 핵심이며 전부이다. 그리고 그 인격자로부터 발하여진 약속의 내용과 그 약속이 이행되기 위하여 요구하는 조건들이 있게 된다. 이 요구조건은 약속을 주는 인격자에게 약속을 받는 인격자가 이행하여야 할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조직적으로 정리하여 체계화시킨 것을 교리(敎理)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교리는 중요하다. 교리가 잘못되면 그 신앙이 잘못 되기 때문이다. 교리는 약속을 주는 자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약속을 받는 자가 자기의 이해대로, 때로는 자기의 편리대로 왜곡(歪曲)시킬 수 있다. 이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래일 때는 있기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일에서 하나님이 당장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경전(經典)을 통하여 말씀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한 일이며, 현금(現今)많은 종교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본다.

신앙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일 때에 그것은 인간의 심중 깊이 간직되어 있는 신심(信心)을 전제로하여 출발한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하실 때 그 심중에 신심을 심으셨다.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신심에 하나님의 인격을 담보로 하여 약속을 제시하였고 그것이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문151. 신앙은 무엇인가?) 신앙은 신심이 교리에 이끌려 생활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종교든지 교리가 있고 어떤 형태로든지 경전이 있다. 불교의 교리에 신심이 이끌려 나타나면 불교 신앙가이다. 그것이 마호멧 교리에 인도되어 생활로 나타나면 마호멧교 신앙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에 인도되어질 때 성경의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 약속 즉 교리를 준 인격자가 누구인가? 이것이 그들의 신앙의 질(質)을 좌우하는 것이며, 그가 준 것이 과연 진리인가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신앙은 무엇을 믿는 것이 아니고 진리의 인격자가 준 진리의 약속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진리인가라는 이야기는이미 제1편에서 말하였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이라는 말들의 뜻을 새겨보자. 성경 원어는 구약은 히브리어요, 신약는 헬라어라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그런데 구약에는 믿는다는 동사는 많이 쓰여졌으나 명사는 두 번 밖에 쓰여지지 않았는데,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信)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사 26:2). 여기 '신'이 바로 믿음이다. 또 한 곳은 하박국 2:4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이다. 구약에 '믿는다'는 말은 대부분 '아만( )'이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에 사용하는 아멘과 같은 말이다. 이것은 진리 또는 진실과 같은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는 믿음, 믿는다 등의 말씀들이 470회 정도 쓰이고 있다. 헬라어로는 명사가 '피스티스( )', 동사가 '피스튜오( )', 형용사가 '피스토스( )'이다. 명사가 약230회 동사가 약 230회 형용사가 약 10회 나타난다. 그런데 이 세마디 말은 우리 성경에서 8가지 이상으로 번역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그 번역된 말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피스티스'
믿음…마 8:10; 롬 1:17등 약 230회.
신앙…빌 1:27; 히 6:1.
충성…갈 5:22; 딛 2:10.
미쁨…롬 3:3.
도(道)…행 6:7.
'피스튜오'
믿는다…마 8:13; 요 1:12등 약 224회.
맡긴다…눅 16:11; 롬 3:2; 고전 9:17; 갈 2:7; 갈 2:7; 딤전 1:11; 딛 1:3.
'피스토스'
충신(忠信)…계 19:11.
미쁘다…고전 1:9; 딤전 1:15; 살전 5:24.
신실…고전 4:17; 엡 1:1.

(문152. 헬라어로 '피스티스', '피스튜오', '피스토스'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대략 살펴 본 것인데 우리가 보는 대로 믿음, 신앙, 믿는다. 맡긴다. 충신, 충성, 미쁘다, 신실, 도(道)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말들을 종합하여 한마디로 표현해 본다면 인격적 교제에 있어서 피차가 상대방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결단코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그의 이 인격을 담보삼아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격을 믿고 그를 실망시키지 않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을 실망시키지 않는가? 예수님이 주신 교훈을 가감 없이 생활에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장 믿을 만한 친구로 우리에게 호소하신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고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 14).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그의 친구다. 이 명하는 대로 하는 것이 곧 그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다. (문153. 믿는 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그러므로 믿음은 예수님을 가장 친한 친구로 삼아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믿음과 인식(認識)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여기는 귀신의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기 귀신의 믿음이란 귀신이 사실을 사실로 인식, 인정하는 상태를 뜻한다. 성경의 신앙이란 이러한 사실의 인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신앙과 행함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도 역시 그 생활로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때 그것이 믿음이라는 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문153. 믿음은 사람의 어떤 것과 관계되는가?) 그러므로 성경에서 인정하는 믿는다는 것은 믿는 사람의 도덕성과 관계되어 있다. 마귀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러나 그 아는 사실이 그의 성품과 도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안는다. 사실에 대한 단순한 인식이나, 어떤 인격에 대하여 알고 있다는 사실이 믿음은 아니다. 그 인격적 대상과 어떤 계약 관계를 가지고 상호간에 인격적 거래가 있는 상태가 믿음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 상태가 믿음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가? 흔히 생각하기를 알아야 믿는다고 한다. 그런데 알아야 믿는다는 말은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고 인정한다는 말일 뿐이다. 알아도 인격적 거래를 하지 않을 때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행함이 있는 믿음,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응답은 성령의 감동으로 일어난다. 인간의 마음에 신심이 있다는 근본적 사실은 사람이 믿음을 가질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여 믿음이 생기지마는 믿음은 믿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사람은 믿게 되어져 있다. 인간의 생활은 이 믿음에 의해서 영위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생활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분석해 보라. 이 신뢰의 줄에 강하게 얽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는가? 모든 인간 생활의 거래는 이 신뢰가 바탕이 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이 신뢰가 훈련되어지고 있지 않는가! 가정에서 무조건 부모를 신뢰하는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은 모두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생활, 이렇게 성장하여 무엇인가 판단하고 회의하고 의심하는 일을 비로소 시작한다. 이런 의심과 회의는 무조건 신뢰할 때 믿음으로 배워 알게 된 것들에 기초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믿음으로 알고 믿음으로 안 사실에 의하여 또 믿음은 더욱 굳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이렇게 믿음으로 알고 성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앎으로 믿게 된다는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의 착각인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 성경은 '믿음으로 안다'고 말한다.


"신양! 오늘 얘기가 이해 안돼요?"
"그런 것을 어떻게 믿어요."
"그러면 내가 유치한 질문을 하나 할테니 대답해 봐요."
"뭔데요?"
"해가 동쪽에서 떠요? 지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아가요?"
"그거야 지구다 돌아가지요."
"그래요. 어떻게 그것을 알지요?"
"그거야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왔잖아요."
"그래서 알아요? 잘 생각해 봐요. 그게 아는 것이었어요? 믿는 것이었어요?"
신양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빙그레 웃었다.
"그것 참, 믿은 것 같은 데요."
"그렇지요. 우리는 믿었을 분이지요. 과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증명해 주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들의 가르침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여왔지요.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의심없이 안다고 말했을까요? 내가 분명히 아는 사실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알지요. 그것은 내 눈을 보는 것이니까 알수 있지요. 성경도 한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알지요. 가르치는 사람의 인격을 믿고, 또 그렇게 가르칠 수 있는 예수님의 인격을 믿고, 믿음으로 들어보십시오. 모를 것이 하나도 없지요. 계속해서 와서 들어 보고 믿음이 활용되도록 해 보세요." 신양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결국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알프스산을 넘어 이태리를 단숨에 쳐들어간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그는 이태리를 방어하는 군사들의 허를 찔러 단숨에 이태리를 정복하려고 다른 사람이 감히 엄두도 못내는 알프스를 넘어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군사들을 지휘하여 알프스쪽으로 진군시키고 척후병을 보내어 넘어갈 길을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명하였다. 척후병들은 이 기상천외의 명령에 벙벙하였으나 일단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이미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불가능한 조건들을 조사하여 알프스를 넘어 공격할 수 없다는 보고를 가지고 돌아왔다.
나폴레옹은 그들에게 오늘날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유명한 말을 던졌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과연 그는 넘어갔고 승리하였다. 그러면 척후대가 조사한 불가능한 조건들은 하나 하나 해결 되었는가? 그들이 넘어간 다음 그 조사된 문제들을 놓고살필 때에 완전한 해답이 나왔는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역시 불가능의 조건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미 그 산을 넘어간 그들에게 그것이 다만 문제가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문제 하나씩만 보면 미해결의 문제이다.
예수님을 믿는 일에도 이와 같다. 하나 하나 따져서 지식으로 이해 안될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고후 4:13)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안니함이로라"(고후 5:7)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의 모든 것은 결국 믿음으로 알고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인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인데 예수님이 자기의 인격과 이루신 일을 담보로 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그 약속이 피차에 이루어지도록 예수님이 제시한 요구 조건들을 성령이 능력을 이루어 나아감으로 예수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삶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조건에는 다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만이 그것을 이행해야 할 이유이다. 그러므로 때때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신앙은 논리적으로 불합리하다. 실망시키지 않는 삶은 논리가 아니고, 학문이 아니고, 생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가 말씀하신 것을 실망시키지 않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신다. 믿음은 예수님을 가장 친한 친구로 삼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한번은 나폴레옹 황제가 어떤 부대를 방문하여 사열을 하게 되었다. 그가 사열을 하며 말을 타고 정렬한 구사들 앞을 지나가는 중에 그가 탄 말이 발작을 일으켰다. 그래서 황제는 낙마의 위험을 처하였다. 그때 열중의 한 병사가 급히 뛰어나가 말 고삐를 잡아 황제를 위험에서 건졌다. 황제는 고마워서 그 병사를 돌아보며,
"대장 고맙소"라고 말하였다.
그때 그 병사는 부동자세로 서서
"폐하 무슨 대장이오니까?"라고 물었다. 황제는 그의 단순한 신뢰가 기특하였다.
"친위대 대장이지."
이 말을 들은 병사는 황제가 친위대 대장 임명식을 하도록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곧장 사열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거닐었다. 당황한 것은 그 부대 사령관이었다. 사령관은 말을 달려 그 병사에게 가까이 왔다.
"얘, 빨리 열로 들어가라. 네가 무엇인데 여기서 뻐기고 있는가? 속히 들어가서 사열을 받아야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놈이 대장이요."
"네가 무슨 대장이냐?"
"친우대 대장이요."
"네가 무슨 친위대 대장이냐? 누가 그런 말을 했는가?"
그 병사는 손을 들어 황제를 가리키면서 "그가 말씀하였소"라고 대답했다. 황제는 그 모습을 얼른 돌아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 부대장은 입을 다물었고 그 병사는 그시로 친위대 대장이 되었다.
이것은 군대의 입장에서 얼마나 비 논리적(非 論理的)인가? 논리를 따지자면 사관학교를 마쳐야 하는 진급해야 하고 그래서 마침내 높은 지위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논리의 타당성이라고는 '황제가 말씀하셨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고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인격을 담보로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 인격을 답보로 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이제 이 문제를 연구해 보기로 하자.

제 8 장 왜 믿어야 하는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 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우리가 왜 믿어야 하며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누구를 믿어야 하는 것은 이미 많이 말하였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오늘날 이 세상에는 불신이 홍수처럼 넘치고 있다. 앞에서 말하기를 세상의 사람들은 신뢰의 줄에 의하여 생활이 운영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불신의 홍수가 넘친다고 하니 모순이 아닌가? 그러나 이 두가지는 다 사실임을 논리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체험에 의하여 안다. 사소한 거래나 이웃끼리의 인정이나, 이발소에서 면도사에게 얼굴을 맡겨놓고 기분좋게 자고 있는 모습이나, 그렇게 빈번한 교통사고에도 불구하고 마음놓고 운전사에게 전부를 맡기고 여행하는 사람들, 불량식품이 쏟아진다고 떠들어도 음식점은 여전히 만원이다. 이것은 사람의 생활이 이런 무의식적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의 증거이다.

그러나 인간이 타산적(打算的)인 의식을 할 때 이러한 무조건적 신뢰가 성립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일단 의심해 보고 조심하고 확인한다. 이것은 인간은 한결같이 이기적이라는 증거가 된다. 이기심이 난무(亂舞)하는 곳에 신뢰가 없는 것이다. 인류의 시조가 범죄한 후 세상에는 이러한 불신의 물결이 흘러 오늘날 온 세상을 휩쓸고 있다.

이러한 세상을 향하여 "나를 믿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은 혁명적 선언이요, 폭탄 선언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증거로 보여 주고 믿으라고 하는가?

사람들이 믿어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절망성(絶望性)에 근거한다.
현세적(現世的)인간의 인격이 어떠하며 그들의 생명의 질(質)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의 인격은 죄의 인격이요. 그 생명은 사망의 생명이다.

모든 사람은 사형수라는 얘기다.
(문155. 사람의 인격은 어떤 인격인가?) 사람의 인격이 죄의 인격이라는 증거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다. 역대의 아담의 후손으로는 죽지 아니한 사람이 누구인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그러므로 이 세대 중에 누가 감히 자기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겠는가? 성경의 확실한 증언을 들어보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10,11,23).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은 병행절(竝行節)을 찾아 대조하면 그 뜻을 당장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말은 롬 3:23과 5:12이 꼭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반의 말이 서로 다른데 전자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고 후자는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고 기록하였다. 뜻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 곧 죽는다는 말이다. (문156. 죄의 결과는 무엇인가?) 사람이 죽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이른 결과이다.

오늘날 의학이, 생물학이, 기타 과학이 이토록 고도의 발달을 하였어도 죽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앞으로 더욱 발달하여도 이 세상적 과학의 힘으로 죽음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생명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이야기와 같다. 사실이다. 사람들은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진정한 의미의 생명인지 사망의 한 과정(過程)인지도 분명히 인식하지도 못하고 인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필자가 어느 지방에서 전도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계획된 설교의 순서에 따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주제로 설교하였다. 그런데 그 시간에 어느 중학교 교감 선생님이 참석하였다. 이틀 후에 우리는 그 교감 선생님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성경 말씀을 가지고 몇가지 권면을 마치고 난 후, 그는 질문을 던졌다.

"목사님, 요전 저녁에 설교를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저는 그 영생이라는 말이 실제로 무엇인지 개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영생을 강조하셨는데 죄송하게도 저에게는 그 개념조차 떠오르지 않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요, 영생이 무엇입니까?

참 어려운 질문을 받은 것이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될까? 나는 미소를 띠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선생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평생을 통한 경험 세계에 너무나 익숙한 것이 죽는다는 너무나 엄숙한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 수천살(數千살)된 생존자를 혹시 보게 된다면 영생이란 저런 것인가라고 생각이라도 할 수 있는데 말이지요. 혹시 영생을 주장하는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음이 없는 삶을 보여주건, 그렇지도 않고 영생이라는 말은 열심히 주장하니 참 휘황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선생님! 제가 한 말씀 여쭈어 보겠습니다. 영생이 무엇인지 개념이 안 떠오른다고 하셨는데 그럼 죽음이 무엇인지 호가실히 아십니까?"

교감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글쎄요'라고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는 현상이 어떤 것인지는 압니다. 그것은 경험세계의 것이니까요. 그러나 죽음 그 자체가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기를 죽는 현상이 죽음 자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착각이며 그 죽는 현상의 참된 의미나 상태는 모릅니다. 이제 제가 대답하지요. 영생은 죽음의 정 반대의 상태입니다. 이 대답이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영생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상태대로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 계속 사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완전한 현상 상태로 복귀되는 것인데, 그 생명의 완전한 현상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아직 우리가 확실히 증명하지 못하나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그것이 확실히 있다는 사실을 알지요. 나는 믿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명 현상보다는 죽음 현상에 더 익숙하다. 사실 사람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흑암에 앉은 백성이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다.(마 4:15, 16)

그러므로 우리가 살았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죽은 자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요"(엡 2:1, 5)그러므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이다. (히 2:15)

세상에 공갈, 위협이 참 많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공갈, 위혀이 무엇인가? 그것은 '죽인다.'는 말이다. 사람은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인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결코 죽지 않는 슈퍼맨이 있다면 그에게 죽인다는 위협은 한낱 우스운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이 죽는다는 사실, 아니 좀더 과감하게 말하여 죽었다는 사실이 인간의 절망성인 것이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계 3:1)가 현세적 인간의 진정한 상태인 것을 사람들은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아니한다. 이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자는 절망의 부르짖음이나 희망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부르짖음을 외치게 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상에서 보면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슬픈 경험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목숨이 끊어져서 호흡이 없고 모든 신체 기능이 정지하는 그 물질적 현상은, 인간의 참 상태 곧 죽음의 상태가 그 종결을 짓는 가긍한 모습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죽음을 항상 두가지로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문157. 죽음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하나는 진짜 죽음, 다른 하나는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이다.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은 오늘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 죽음이다. 초상이 나고 상여가 나가고 울음이 있고 산에 무덤을 하나 더 보태어 놓는 죽음이다. 이것은 현세적 인간, 곧 죄인이었던 모든 사람이 어쩔수 없이 당하는 "모든 사람의 결국"(전 7:2)이다.

(문158. 진짜 죽음은 무엇인가?) 그러면 진짜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것이다(엡 4:8). 하나님이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이 사망이다. 하나님 의지하기를 거절하는 모든 사람,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진짜 죽은 자들인 것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을 때의 생명력의 여운(餘韻)에 불과하다. 예를 든다면, 우리가 여름에 선풍기를 전기에 연결하여 돌리다가 스위치를 껐을 때 그 바람개비가 당장 정지하지 않는 것을 본다. 돌아가던 힘에 의하여 그 힘의 영향이 끝날 때까지 점점 속도를 줄이다가 마침내 멈추어 서게 된다. 아직 돌아가고 있다고 그 선풍기가 전기에 연결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코드를 빼내거나 스윗치를 끈 순간 그 선풍기는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 돌아가던 힘의 영향력이 있는 때까지는 돌아간다. 이런 것을 물리(物理)에서 관성(慣性)이라고 말한다. 이 예는 아주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나 오늘 하나님의 생명에 떠나 있는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생명 현상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예를 들어 본 것이다. 선풍기 스윗치가 꺼졌을 직후에는 연결되어 있을 때의 속도와 방불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속도가 점점 줄어서 마침내 정지한다. 시조가 타락하였을 그 가까운 세월 동안 인간의 수명은 1000년 가까이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은 점점 줄어서 오늘은 100년도 채못된다. 그만큼 처음 하나님이 부여해 주셨던 생명력의 그 영향이 줄어든 것이다. 비록 이와 같을지라도 이 짧은 생명 현상이 지속되는 동안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에 복귀할 기회가 있다. 그래서 죽어가고 있는, 아니 비록 진짜로 죽었으나 생명 현상이 있는 지금 하나님의 생명에 다시 연결되도록 자신의 손을 길게 내밀어야 하는 것이다. 이 손을 하나님을 향하여 내밀어야 하는 것, 내어미는 것 이것이 믿음이요, 우리의 상태가 이와 같은 고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쉽게 인정하려는 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법률적으로 그들이 범하는 것이 없을 때 더욱 그렇다. 이러한 사람에게 '당신은 죄인이요,' 죽었소'라고 말하는 것은 듣는 자에게 얼마나 불쾌한 일인가? 사람이 어떤 현실적 위기 즉 큰 파산이나 질병에 처해 있을 때 오히려 인간의 연약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영원한 생명을 취하는 일이 쉽다. 그 현실이 연약성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사업이 잘되고 건강이 탁월할 때 이들은 죽음은 자기와 상관없는 것처럼 생활한다. 그러다가 목숨이 끊어지는 그 죽음이 갑자기 닥쳐올 때 그들은 절호의 기회, 하나님의 생명을 붙잡을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상태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겸손하게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아직도 부여되고 있는 생명 현상은 하나님의 생명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가치가 지고한 것이며 이렇게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는 시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붙잡을 수 있는 기간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역사(歷史)는 죄인이 되어버린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는 일을 하도록 허락된 은혜의 기회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되고 있는 것이다.

이 새염의 관성이 있는 동안 나타나는 모든 생활은, 비록 그것이생명의 관성일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에 직접적인 연결이 없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타내는 모든 생활은 죽은 생활이요 죽은 행실인 것이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2), "죽은 행실"(히 6:1; 9:14)을 하는 것이다. (문159. 인간의 존재 자체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그래서 인간의 존재 자체가 죄요 사망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존재의 입장에서 볼 때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없는 상태를 실감하고 하나님 앞에 존재하는 길이 믿음의 길이다. 그래서 사람이 현재 존재하고 생명이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지금 참된 생명과 참된 존재를 확립하여야 한다. 이 확립할 길이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救贖)의 길이다. 이 길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심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 것이며, 그의 인격을 통하여 증거해 주셨다. 이 길로 걸어가면 우리는 결코 절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예수님을 실망시키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이런 길을 마련하셨는가? 예수의 인격은 어떠하며 그의 생명의 질은 무엇인가? 곧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연구해 보자.

현세적 사람들의 인격은 죄의 인격이요, 생명은 사망의 생명인 것을 우리는 연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사랑하고 인간의 영원한 인격의 영광스러운 생활을 성취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어떠한 분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三位一 ) 하나님의 한 개체이심을 우리는 이미 연구하였다. 그 하나님이신 분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절정(絶頂)이시다. "우리가 참된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이러한 분이 사람되어 세상에 오신 것은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 15)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사망을 폐하려고 오셨다. (문160. 사망은 어떻게 해서 폐해졌는가?) 그 방법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사망을 폐하는 것이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 그것은 죄를 멸하는 것이다. 이 죄는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하는 것이다(롬 5:21). 그러므로 죄를 멸하는 것은 곧 사망을 멸하는 것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의 죄를 취하시고 인간들이 죄로 죽을 그것을 당신이 사람되시므로 죽으셔서 죄의 값을 치루신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예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시나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어 혈육에 함께 속하셨고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고후 13:4) 그리하여 그가 죽으셨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계 1:18)고 하셨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그들이 기대하는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여 평화를 정착시킬 분으로 생각하며 희망을 걸고 따라다녔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어 죽게되자 절망과 낙담으로 다 흩어졌다. 그가 인류의 소망(所望)이기를 기대했는데 그도 다른 인간들과 꼭 같이 죽음으로 생을 마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예수에게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과연 예수께서 대신 죽어 주는 일이 아무리 고상하여도 그 일을 인해 그가 대신 죽어 준 그 사람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그 대신 죽는 일이 하나의 영웅적인 일은 혹시 될지언정 죽음 문제를 해결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까지가 예수님이 하신 일이라면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절망의 종교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불쌍한 사람이요, 믿으라는 권고는 헛된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교훈하실 때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는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4:6; 11:25, 26)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기의 말을 생활로 항상 증명하셨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요 10:37, 38). 예수님은 자신을 믿으라는 권고를 그가 행하신 일에 근거하셨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믿을만한 일을 행하는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도록 한 근거가 무엇인가? 과연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요'라고 말한 교훈이 행함으로 증거되었는가?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중에 좋은 말씀이 그 전부이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은 윤리나 도덕의 좋은 교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와 인격을 걸고 하신 교훈이다. "내가…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 말이 사실인 것과 거짓말인 경우가 그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과연 그가 부활이요 생명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희대의 사기군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신학대학 학생 시절에 안식일 오후에 전도지를 전하러 어느마을에 나갔던 경험으르 잊을 수 없다.
조그마한 마을 넓은 밖 마당에 신수가 훤하고 풍골 좋은 할아버지가 몇몇 젊은이들을 지휘하며 일을 시키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 앞으로 가서 공손히 절하고 전도지를 드리면서,
"할아버지 교회에 나오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불쑥,
"이 사람아 지금 여기 뭘하고 있는지 아는가?"라고 물었다.
"뭘하십니까?"
"며칠 후에 동제(同祭)지낼 준비를 하는 중이야. 자네가 그 동제에 참석하여 우리와 같이 제사지네세. 그러면 나도 교회에 가지."멋진 교환 조건을 내 놓은 것이다.
"할아버지, 동제를 지내면 그 나무가 복을 준답디까?" 그 마을 동제는 마을 뒤쪽에 있는 아주 큰 고목에 지내는 것이었다.
"얘끼 이 사람아, 그러면 예배당에 가면 무슨 복을 주나?"
참 이 말도 옳을 듯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말하였다.
"할아버지 우리가 예배당에 나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나무에 제사하면 복 준다는 무슨 약속의 말이라도 있습니까?"
"허허, 이 사람아, 성경은 그저 성현(聖賢)의 말씀이야, 예수님은 성현이시지."
이런 대화를 나누다가 할아버지는 문득 말머리를 돌렸다.
"이 사람아, 나는 오래 살고 싶어."
"할어버지, 건강해 보입니다. 오래 사시겠어요."
"이 사람아, 내가 오래 살고 싶다는 말은 죽기 싫다는 말이야. 내가 금년에 70인데 죽기 싫어."
바로 이때다. 나는 얼른 할아버지의 말을 받았다.
"할아버지 제가 불사약을 드리지요."
"이 사람아, 그런게 어디 있어."
"여기 있습니다."
(문161. 성경의 불사약은 어느 장 절인가?) 나는 얼른 성경을 펴고 요한복음 11:25, 26을 읽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보십시오 할아버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으십시오."
"그걸 누가 믿겠나. 어찌 영생을 한다는 말인가?"
"할아버지, 성현은 거짓말을 하십니까?"
"성현이 어찌 거짓말을 하는가? 거짓말을 하면 성현이 되는가?"
"그렇지요. 성현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셨으니 믿으십시오. 그러면 할아버지 소원이 성취될 것입니다."
"어떻게 믿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나?"
"할아버지, 예수님은 성현이시지요?"
"그렇고 말고, 성현이시지."
"성현도 거짓말을 합니까?"
"성현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나?"
"그렇지요. 거짓말을 안 하시는 성현 예수님이 나를 믿으면 영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안 믿으십니까? 믿으십시오."
이때서야 할아버지는 자기 말의 모순을 깨달았다. 그는 허허 웃으며 전도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경험은 오늘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축소판이었다. 오늘 세상은 예수님을 삼대성인, 사대 성인중 하나라고 말한다. 책들이 그렇게 쓰고 사람들이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엇을 했기에 성인인가? 그는 십자가에 죽었다. 이 죽음은 사랑의 절정의 행위라고 한다. 뭣 때문에 사랑의 행위인가? 예수가 당장 그 당시의 어떤 축을 사람을 사랑으로 대신해 주었다는 말인가? 강도 바라바를 대신 했는가? 아니다. 결코 바라바가 죽는 것이 아까와 대신 죽은 것이 아니다. (문162. 예수의 사랑의 절정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온 이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성경의 말씀을 떠나서 결코 해답이 없다. 그렇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받아야 한다. 참으로 예수님은 그가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이다. 이것이 그가 우리를 믿을수 있는 넉넉한 근거로 제시한 행동이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시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고후 12:4),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18)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문163.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생명은 어떤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이요 그의 생명은 영생의 생명이다. 이러한 확실한 증거를 그의 부활로 나타내셨다. (문16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을 암시하는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를 믿을 확실한 근거요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아니한 행동이다. "내가 행하거든 그 행하는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하신 행함이 바로 이 부활이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 17:31) "만일 죽은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3∼19).

(문165. 예수님께서 친히 취하신 4가지 특성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믿어 구원얻게 하려고 적어도 네가지 특성을 취하셨다.

첫째는 그가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인(神人)이시다. 이 말은 예수님은 완전히 하느님이시오 동시에 완전히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문제는 여러 곳에 여러 모양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특별히 말하지 않는다.

둘째는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前提)로 한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으셨고 또 살아나셨다. (문166. 역대에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는 증명이 성공한 일이 있는가?) 역대로 마귀는 예수님의 부활한 사실을 거짓이라고 증명하려고 노력했으나 결코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프랑크 모리슨(Frank Morrison)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오랜 세월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고 마침내 한 권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누가 돌을 굴려 내었을까?라는 책이다. 이 책은 결국 부활이 확실한 사실임을 증거하는 훌륭한 책이 되었고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셋째는 그는 사람으로 사시면서 결코 죄를 짓지 않았으며 우리의 완전한 모범이시다. 예수님은 탄색하실 때 죄없이 탄생하시므로(이것은 중생편에서 자세히 논할 것임)본성적으로 죄가 없으셨고 또한 결코 죄를 짓지도 않으셨다. "저를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 2:22) "그가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훌하지 아니하는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이와 같이 완전한 생애를 신성의 능력으로 사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사셨다. 이것은 인간을 실망시키지 않는 믿음의 생활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생활이었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사람이 그와같이 살 수 있다는 보증이 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일에 그는 믿을 만한 증거를 주신 것이다.
넷째는 그가 이 구원의 길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기관으로 교회의 설립자가 되셨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부르심 편에서 이미 말하였다.

예수님은 33년 동안 우리와 꼭 같은 사람으로 그런 사람이 사는 환경과 사회제도 아래서 사시면서 죄없이 사셨고 그가 죄없으신 사실에 의하여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주실 자격을 가지셨으며 드디어 우리의 죄를 대신 맡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마침내 부활하심으로 어느 모로 보더라도 우리가 믿을 완전한 인격을 제시하신 것이다.

(문167. 예수님의 인격이 우리의 인격으로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분의 인격이 우리의 인격이 된다. 왜냐하면 그가 죽으실 때 우리의 죄의 인격을 취하여 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의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을 우리에게 주시고 영생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되는 것을 구원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9장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으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18)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떻게 나타나는가?

(문168. 믿음앞에 무엇이 선행되는가?) 앞에서 여러번 말한 대로 우리가 믿는다는 일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문169. 예수님의 부르심의 방법은 무엇인가?) 이 부르심은 단순히 음성으로만 부르신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업을 통하여 부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르심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응답하여야 한다. 이 응답은 성령(聖靈)의 권고하심으로 가능하다. 성령의 간절한 권고가 있어도 기어이 거절하면 그것이 불신이요 또한 죄가 된다.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데, (문170. 죄는 무엇인가?) 곧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요 16:7∼9). 성령은 예수를 믿도록 모든 사람을 견책하신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결국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시는 일에 사람의 감동을 받아 믿음이 생긴다. 그러나 사람이 기어이 이 호소를 거절하면 마침내 성령께서는 떠나신다. 이렇게 되면 그는 영원히 죽는 길을 스스로 확정한 것이 된다.

(문171. 예수님이 성령의 역사를 바람으로 비유하신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役事)를 바람으로 비유하셨다(요 3:8). 바람은 없는 곳이 없다. 이것으로 성령의 보편적이며 편만한 역사를 암시하셨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한 구원의 길에서 아무도 스스로 벗어나지 않도록 성령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계속 일하신다. 이 일에 의하여 예수님이 이루신 그 모든 일이 나를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신 일임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기로 결심하는 것이 믿는 것이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9∼12), 예수의 이름을 영접하는 것이 그를 믿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신다. 성령의 음성을 통하여 두드리신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것은 순종으로 나타난다. (문172.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 순종은 보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희상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아들의 신분이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하여 순종하는 순종인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람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 1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보상이 아니요, 사랑의 순종임을 위의 성경절이 보여준다. 나를 대신하여, 나의 죽을 것을 죽어 주시고 나를 영생케하여 주신 이 사실을 깨닫고 그 사랑에 강권을 받아 예수님의 말씀을 즐겨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나는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께서 내 안에서 사셔서 나의 행하는 모든 일을 예수님이 살아서 하셨을 모든 일을 그대로 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든다면 갑동이와 을남이가 수영을 하러 나갔다고 하자. 그런데 갑동이가 익사(溺死)하게 되었을 때 을남이가 구하러 들어와서 익사 직전에 잇는 갑동이를 가까스로 구해내고 그만 힘이 진하여 을남이가 익사하고 말았다.

을남이는 친구를 대신하여 죽었다. 살아난 갑동이는 사실을 을남이의 생명을 받은 것과 같다. 그는 갑동이면서 동시에 을남이의 생명이다. 그런데 을남이가 외동아들이었다. 이제 갑동이는 을남이의 집에서 을남이의 일을 감당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을남이의 희생이 너무 고맙고 친구의 그 사랑이 갑동이를 강권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깊이 깨닫고 감사함이 넘치는 갑동이는 자원하여 을남이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관계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순종하는 관계이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요, 은혜의 관계요, 감사함으로 자원하여 순종하는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신다고 말한 '강권'이란 말은 원문에 '격발한다'는 뜻이 있다. 총에 탄환을 장전하여 방아쇠를 당긴다는 뜻이다. 총알이 발사되지 않을 수 없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이 사랑을 느끼는 자는 예수를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 사랑은 예수처럼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믿음이 나타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활이다. 이 생활은 사랑의 생활인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요청하였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으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눅 17:5∼10).

(문173. 믿음을 더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믿음을 더하는 방법은 주인의 명한 것을 다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응답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1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전적으로 순종하는 생활로 나타난다. 성경을 순종하는 생활이란 곧 예수님이 사신 것과 같이 사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얻은 생명이 우리 속에서 삶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사신 것과 같은 삶을 나타내도록 하기 때문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에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하시는 것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죄에 익숙해 있다. 의와 선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이 삶을 살기 위하여는 우리의 본질이 바뀌어져야 한다. (문174. 중생이란 무엇인가?) 이와 같이 본질이 바뀌는 것, 곧 죄의 인격과 사망의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과 영생의 생명으로 바뀌는 것을 중생이라고 한다. 믿음이 참으로 믿음이 되기 위하여 회개(悔改)와 중생(重生)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문제는 다음 편에서 취급할 문제이다.

(문175. 히브리서 11:1의 실상의 뜻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믿음이 무엇이냐고 질문할 때 흔히 잘 쓰는 히브리서 11:1의 말씀을 생각해보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다. 여기 '실상'이라고 한 말은 헬라어로 "후포시타시스( )"이다. 이 말은 실질, 본질, 실상등의 뜻이 있고 또 확증, 확실등의 뜻도 있다. 특히 확증의 뜻으로는 소유권(所有權)의 확인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쉬운 말로 하면 '후포스타시스'는 등기문서(登記文書)를 뜻하는 말이다. 히브리서 11:1의 '실상'이라고 번역한 것을 등기문서로 이해하여 생각하면 의미는 생동감 있게 우리에게 이해되어 온다.

등기문서라고 하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좋은 집을 팔려고 한다면 살 사람이 우선 그 집을 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팔려는 사람의 확실한 소유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등기 열람을 해야한다. 그리고 비로소 확인하고, 안심하고 매매계약을 한다. 그런데 실제적인 집을 보지 않아도 등기열람으로 그 건물이 그 명의로 등기된 것을 확인하면 그 주소에 그 건물이 있는 것은 증명된다. 그러나 등기문서가 그 건물은 아니다. 그래도 이 증빙 서류는 건물을 가서 보고 확인하는 것 이상으로 확실한 것이다. 믿음은 바로 그러한 등기문서이다. 무엇에 대한 등기문서인가? 바라는 것들의 등기 문서이다. 그러면 바라는 것들이 무엇인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많고도 많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대표적인 것을 몇 개 찾아보자.
골로새서 1:27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所望)이라고 하였다. '바라는 것'을 한자로 적으면 소망이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문176.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의 소망이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지 않고 누구를 바라겠는가?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2, 3). 믿음은 예수그리스도의 등기문서이다. 믿는 사람을 보면 곧 예수님을 본 것이나 다름 없는 것과 같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시려고 오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그러나 예수님이 곧 하나님 아버지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예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믿는 자가 곧 예수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확실히 보여 주는 등기문서들인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예수님이 재림은 복스러운 소망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예수님의 재림을 무엇보다 간절히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재림이야말로 우리의 바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확실한 것을 증거하는 등기문서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보니 예수의 재림이 재림하신 것만큼이나 확실하다고 보여 주는 등기문서인 것이다.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것뿐이겠는가?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10). 이 성은 하늘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영원한 천국을 상징한다. 우리는 얼마나 이 나라를 사모하는가? 사모함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믿음은 천국의 등기문서이다. 믿는 사람들을 볼 때 천국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 청년이 불신 청년과 돈독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사이에 가린 것이 없고 의합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청년은 이 부신 친구에게 틈만 나면 은근히 전도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이 점에서만은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어느 날이다. 그리스도인 친구는 은근히 믿음을 전파하였다. 불신 친구는 속으로 작정한 것이 있었다. 다시는 자기에게 전도하지 못하도록 하리라고 수를 생각한 것이었다.

"여보게, 자네한테 하나 물어보세."
"뭔가?"
"나네 늘 전도하는데 이 점만 우리가 일치 못하고 있는 점이네. 지금도 또 전도를 하는데 말일세, 자네가 나에게 천국을 보여 줄 수 있겠나? 그러면 나도 믿지. 이 눈에 똑똑히 말이야, 만일 그렇게 못하면 이젠 다시 믿는 얘기는 하지 않기로 약속하세."
그리스도인 청년이 한참 미소 먹은 얼굴로 불신 친구를 바라 보았다.
"자네 그 말 확실한 말이지? 천국만 보여주면 틀림없이 믿는거지?"
"암 여부가 있나, 장부의 일언인데."
"좋아, 그럼 내가 천국을 보여 주겠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대로만 따르게. 그러면 천국을 틀림없이 볼 것이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인은 그 친구를 데리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딜 가는가?"
"천국에 가네, 두려워 말고 따라오게."

불신 친구는 참 궁금하였다. 천국이 어디 있는데 보여 준다는 말인가? 결코 그런 것은 없을텐데, 자기에게 다시는 전도 못하게 하려고 작정하고 한 말인데 천국을 보여 준다니? 만일 참말 보게 되면 별수 없이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드디어 어느 집 앞에 섰다.
"이 사람, 여기는 자네 집이 아닌가?
"옳아, 그런데 자네는 내가 하는대로 하기로 했잖는가? 이제 우리 집에서 나와 같이 우리 식구들과 같이 일주일만 살도록 하게 천국은 자네 것일세."
그들은 일주일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일주일 후에 그리스도인은 물었다. "천국 봤는가?
이 불신자 친구는 눈에 넘치는 감동의 빛을 띠우며 말했다.
"봤네, 보고 말고. 그래 천국이 틀림없이 이럴거야!."
그렇다. 모든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와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나타난 천국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 나타내는 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내가 예수를 믿는 믿음이 실제적으로 내 생활에 나에게 무엇인가? 그것이 (문177.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어떻게 증거해야 하는가?) 예수의 성품을, 천국의 모습을, 생활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면 이미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한가? 예수 안에서 가능하다고 말고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러므로 믿음은 생명 자체와 연결되어지는 것이며 생명과 연결되는 길은 중생과 부활의 경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모타가 코-드로 전원(電源)에 연결만 되면 돌아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안 돌아가겠는가? 탄환이 총에 장전되어 방아쇠를 당겨 결발 시켰는데 어떻게 발사되지 않겠는가? 믿음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역사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예수의 모습, 천국의 모습을 그들의 생활로 증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바닷가에 집게( )를 본 경험이 있다. 바닷가 모래밭에, 혹은 자갈 위로 작은 소라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이상히 여겨 잡아 속을 보니 마치 거미를 닮은 작은 게가 소라 껍질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냥 보기에는 영락없는 소라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 껍질을 쓰고 사는 것은 집게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우리 자신을 살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그들의 모든 인격 모든 생활은 예수님의 그것이요 천국의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요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우리는 믿음을 이와 같이 나타내고 있는가?

사랑의 십자가와 좋은 사람들은 여러분들의 믿음이 생활을 좀더 성경으로 돌아가도록 말씀으로 돕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원하시나요 사랑의 십자가와 좋은 사람들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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