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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멘토’유우익 교수 인터뷰

전동키호테 2008. 1. 13. 14:37

[weekly chosun] “대통령이 나를 필요로 하면 언제라도 다시 나서겠다”

‘이명박의 멘토’유우익 교수 최초인터뷰

서울대 지리학과의 유우익(58) 교수는 우리나라 지리학계의 수장이다. 지리학은 물론 국토계획, 지역개발, 문화관광 등 다양한 분야의 논문, 저서와 에세이를 펴냈고 세계지리학회 사무총장까지 맡고 있다. 이런 그에게 요즘 세상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이명박의 이데올로그(Ideologue·이론적 지도자)’라고 알려지면서부터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대표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 프로젝트를 비롯해 ‘나들섬 남북 공동개발’과 ‘한반도 선벨트 개발’의 큰 그림을 그린 핵심 브레인이다.

대선 당시, 한반도 대운하와 관련한 ‘물길이 통하면 인심이 통한다’는 카피와 ‘잘사는 국민, 따뜻한 사회, 강한 나라’라는 공약 비전의 개념을 잡았다. 이 당선인이 시장이던 시절부터 그의 연설문을 작성해온 그는 ‘이명박의 또 다른 입’으로도 통한다. 한나라당 경선 당시 후보 수락 연설, 대통령 당선 기자회견, 대통령 당선인 신년사가 그의 손을 거쳤고 대통령 취임사도 쓰게 된다. 유 교수는 대통령 선거 후 청와대 안가에 초청받은 테니스 멤버 11명 중 한 명이다.

지난 1월 6일 유우익 교수를 만나 인터뷰했다. 유 교수는 그 동안 한사코 언론 인터뷰를 피해왔다. 그를 단독 인터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 교수는 사진 촬영만큼은 한사코 않겠다고 했다. 인수위가 확정되기 전인 12월 25일 이 당선인은 그에게 대통령취임준비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지만 유 교수는 “대학으로 돌아간다”며 이를 고사했다. 이후 그는 연말에 프랑스 파리로 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월 10일 현재 그는 청와대 비서실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 photo 허영한 조선일보 기자

내가 언론을 기피하는 이유, 내 할일 끝났으니 본업으로 돌아가는 것뿐인데
언론서 너무 호들갑 떨어 부담스러워

지난 1월 4일 유우익 교수가 원장으로 있는 서울 신문로의 국제정책연구원(GSI)을 찾아갔다.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던 그가 사무실에 있었다. 하지만 직원을 통해 “기자와는 할 말이 없다”는 말만 전했다. 명함과 편지글만 남기고 되돌아왔다.

이틀 뒤인 1월 6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전원주택에서 사무실로 출근 중인 그와 전화 연결이 됐다. 그는 “그날은 개인적으로 미안했지만 만나도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인터뷰를 고사하던 그는 한참 동안의 전화 통화 끝에 “원 참, 내가 죄를 진 것도 아니고… 그러면 와서 차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했다

일요일인데 일하시네요. “기자들도 일하는데 교수라고 일 안 하나요?”

유 교수는 직접 외투를 받아서 옷걸이에 걸어줬다.

파리에는 다녀오신 건가요. “네, 12월 27일 떠났는데 집안에서 상을 당해 31일에 바로 왔어요. 출국 날, 공항으로 방송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왔습니다.”

방송에선 못 봤습니다. “내가 ‘새 대통령을 국민이 뽑았고, 지금 모두가 환호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결의하는 때가 아니냐’고 했어요. 사실 그렇지 않나요. 모두가 기대하고 흡족해하고 잘해보려는 시기인데 어쨌건 참모 중 한 명이 가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건 좋지 않죠. 그건 생기 넘치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고, 그건 당신들도 나도 원하는 바가 아니니 그냥 다녀오게 해달라고 했어요.”

 

기자들을 설득하셨네요. “그게 바로 내 심정입니다. 인터뷰 사양하는 이유도 그렇고요.”

파리엔 왜 가신 건가요. (유 교수는 파리 소르본 대학에 초빙교수로 1년간 머문 적이 있다.)  “나는 독일에서 공부했지만 프랑스 지리학회의 정식 회원이에요. 세계지리학회 집행이사들을 모아서 밀린 얘기도 하고 친구들 만나서 포도주 마시고 놀다 오려고 했죠. 소르본 대학(4대학) 총장이 정말 친한 친구예요. 그런데 상을 당해 바로 온 거예요. 사실 연말 보내기에 파리가 참 좋은데….”

 

유 교수는 왜 자신이 기자들을 피하는지, 무엇이 답답한지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인터뷰 전엔 “할 말이 없다”고 했지만 실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정말 불편합니다. 일을 별로 많이 안 한 사람이 많이 한 것처럼 되면 미안하고 불편한 것 아니겠어요. 학생이 입학했다가 졸업하듯이 교수가 소신에 맞는 합당한 일을 한 뒤 그 역할이 끝나면 돌아가는 것이죠.”

 

선거 때엔 이명박 후보를 열심히 도우셨던 걸로 압니다. “선거의 싱크탱크 장을 맡았고 정책, 연설문, 상담 역할을 하며 후보를 도왔죠.”

공식 석상에 서시기도 했나요. “선거운동이라기보다는 강연회에 나가서 대운하 같은 정책 얘기를 했죠. 선거는 이제 끝났고, 이젠 또 다른 시기가 시작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정상적이고 보통의 일이 주위에 반향을 불러일으키니까….”

대통령 후보를 도운 뒤 학교로 가는 걸 두고 하시는 말씀이지요. “네, 그렇게 떠들 일이 아니에요. 나는 호들갑스러운 것은 싫어요. 그래서 황 기자가 만나자고 했을 때도, 만나는 것 자체가 또 한번 호들갑을 떠는 것으로 보도될까봐 염려됐고요.”

 

유 교수는 “작은 일이지만 내 진의가 있지 않겠느냐”며 “그게 각색되고 포장되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 진의가 무엇인가요. “글쎄요. 세상엔 능력있고 훌륭한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나와 이명박 후보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서 의기투합해서 함께 일을 도모했어요. 그래서 그 일이 이뤄졌어요. 그런데 이제 대통령이 되셨기 때문에 사적인 인연을 뛰어넘어 넓은 세상에서 훌륭한 인재를 구해서 쓰셔야 해요. 선거 기간 동안 치열한 활동을 통해 가까워진 그 위치는 비켜서 주는 게 도리고요. 그게 대통령이 된 분에 대한 도리라는 말이죠.”


 

유 교수는 ‘넓은 세상’과 ‘새로운 인재’라는 단어를 여러 번 반복했다.

“(당선인이) 국회의원이나 시장 후보일 땐 나의 후보, My favorite candidate(내가 제일 좋아하는 후보자)였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제 대통령이 되셨으니 온 국민의, 나라의 대통령이죠. 그분을 도울 분도 넓은 세상에서 많이 나와야 해요. 과거의 사적인 인연으로 인해 내가 막아서고 있으면-막아서려고 해서가 아니지만-안 된다는 그런 뜻이 조금 담겨있어요. 굳이 의미를 찾는다면 말이죠. 그런데 이게 무슨 폼이나 재고 멋 부리는 것처럼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언론 보도에 많이 언짢아하시는데요. “내가 마치 영웅이나 된 것처럼, 굉장한 일을 한 학자인 것처럼 보도되는 건 사실과 다르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아요.”

(이튿날 통화에서 그는 기자들이 자꾸 거짓말로 지어 쓰고, 자신을 어릿광대로 만든다며 심한 불편함을 표현했다.)

▲ 지난해 4월 당시 이명박 후보(오른쪽)와 영산강 운하 탐방에 나서 보트를 타고 있는 유우익 교수(가운데). photo 김영근 조선일보 기자

나는 이명박을 떠난 게 아니다
내가 아니라도 잘 할 사람이 많으니 나서지 않은 것
사회가 학자의 지적 능력 요구할 때 외면하는 것도 도리 아니다

유 교수는 자신이 왜 불편한 심정인지를 조목조목 말하면서도 “내가 떠나고, 안 떠나고에 대한 얘기는 가급적 안 써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럴수록 불편한 마음, 진실을 밝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쏟아지는 외부 시선과 관심이 부담스럽다 못해 정말 괴롭다”고 했다. (인터뷰 이튿날 이후 대통령 취임사를 그가 쓴다는 소식에 언론들은 “떠났다가 일시 컴백” “권력과의 이별인가”라고 보도했다.)

언론에서 교수님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본업에 좀더 충실하려고 하는 걸 마치 대통령을 버리고 떠나가는 것처럼 보는데 그건 아니에요. 그런 게 남들에게 재미있을지 몰라도 진실이 아닙니다.”
그는 ‘본업(本業)’ 얘기를 꺼냈다. “국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곁에 정치인, 행정가 분들이 있어야죠. 그분들은 본업이 그거니까요. 내 본업은 정치, 행정이 아니라 선생이에요. 선생을 하다가도 대통령이든, 누구든 내가 생각하기에 합당한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 해야지요.”

당선인과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제가 말씀 드렸고, 그분도 부탁하셨지만 언제든지 꼭 내가 필요하고 꼭 있어야 할 일이 있으면 부르시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판단되면 도와드린다고 했어요. 저는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을 그대로 갖고 있는데, 어느날 아침에 ‘바이바이’ 하면서 떠나는 사람처럼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는 서울대에서 호암교수회관 운영을 맡았던 일화를 꺼냈다.

“서울대에 컨벤션센터와 숙박시설을 갖춘 호암교수회관이라고 있는데 학교에서 저더러 그걸 운영하라고 한 적이 있어요. 내 전공으로 봐선 아니었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결국 2년간 봉사했어요.”  개인적으로 원치 않아도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신 겁니까. “교수는 학생 가르치고 학문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하지만 자신이 속한 학문의 사회, 국가 같은 공동체가 그의 지적 능력을 요구할 때 끝까지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봐요. 이런 생각으로 이번 일을 도와드렸고 이제 내 할 일이 끝났으니 가는 거예요.”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일해 달라는 제의를 받으셨지요. “네.”

그때 고사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할 사람이 많고,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많으니까요.” 대통령 당선인이 섭섭해 하진 않던가요. “같이 해줄 것으로 기대하셨지만…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과 꼭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식별해야지요.”
본인이 정말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보셨습니까. “내가 설령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을 잘할 사람이 많은데 내가 거기 가서 비키라고 하겠나요.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데, 내 일을 제쳐놓고 인수위에 가서 이전 정부가 잘했네, 못했네 하는 건 아니지요. 독일 속담에 있듯이, 그건 내(가 마실) 맥주가 아닌 거지요. 그런 심정인 거죠.”  (영어에도 ‘이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는 뜻의 ‘It’s not my cup of tea’란 표현이 있다.)

 

나, 지리학자 유우익
국내외 곳곳 누비며 답사… 1997년 대운하 구상때 MB와 가까워져
동양권 학자로는 처음으로 세계지리학회 사무총장 맡아

그를 아는 학계 인사들은 유 교수를 “지리학계의 거장이면서 마음이 따뜻하고 털털한, 천상 학자”라고 말한다. 그가 쓴 ‘장소의 의미’라는 답사기를 읽다 보면 거창하지 않고 소박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묻어난다. “자연이 수려한 나라가 아름다운 나라다. 그러나 진정 아름다운 나라는 그런 자연과 인간의 심성이 어우러진 나라다. 내가 구하는 아름다운 나라는 그 위에 이치가 통하고 도리가 바로 서서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지고 이어지는 나라이다.”

배지를 다셨네요. “아, 이거요? 세계지리학회 배지예요.”

그는 서구 학자를 제외하곤 처음으로 세계지리학회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지리학을 전공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살면서 가슴에 묻어놓고 있어야 할 것도 있는 거요.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거요?”

유 교수는 국내외적으로 내로라하는 지리학계의 거장이다.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뒤 독일 키일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의 전공은 국토론, 사회지리학, 지역정책 등이다. 미국 버클리대, 파리 소르본대학에 객원교수로 있었고 대통령자문 21세기위원회 위원과 정책기획위원회 간사위원으로 10년간 봉사했다. 교육부, 건교부, 행자부, 서울시 등 정부 여러 부처에서 정책자문을 했다.

그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대 중반쯤이다. 이어 1997년 당시 이명박 의원이 대정부 질문에서 경부 대운하 건설이라는 구상을 제시할 때 가까워졌다. 서울시장에 뜻이 있었던 이 의원은 유 교수를 찾아가 지역정책 관련 자문을 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선 핵심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는 독일에서 공부한 유 교수의 전공 분야다. 

유 교수는 2004년 이명박 시장 시절에 ‘수도이전 반대 국민연합’을 주도하기도 했다. 2006년 가을부턴 이 당선인이 설립한 동아시아 연구원이 개편된 국제정책연구원(GSI)의 원장직을 맡았다.

선거 치를 때 많이 바쁘셨겠습니다. “후보를 도우면서도 강의는 다 했어요. 내가 지도한 학생 세 명이 1년 동안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논문 지도와 심사도 다 했고, 세계지리학회 일도 다 했어요. 개인적으로 고달팠죠. 늦게 끝나면 학교 가서 일했고 밤새워 일하기도 했어요.”

그는 “그 동안 솔직히 내 전공 공부를 소홀히 한 면이 있다”며 “그 동안 못다한 국내외 답사도 더 하고 공부도 더 하려고 한다”고 했다.

 

내가 본 이명박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고 성취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다
당선 후 같이한 첫 식사가 자장면… 그런 서민적 모습에 끌렸던 것

그에게 대통령 후보 가까이에서 선거를 치른 소회를 물어봤다.

무대 한가운데에서 선거를 치르셨는데요. “무대 위에 나는 안 올라갔죠. (웃음) 한나라당 선대위 멤버도 아니고요. 나는 이명박 후보의 조언자, 어드바이저로 도와드린 것이죠. ”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뒤 어떤 심정이었나요. “내가 한 가지 에피소드를 말할게요. 12월 20일 최종 당선 발표가 있은 후 당선인이 21일 가족들과 선영에 다녀온 뒤 저를 안국동 사무실로 불렀어요.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저녁이나 먹읍시다’ 하시더군요. 잠시 후 저더러 ‘뭐, 자장면이나 먹지’ 그러는 겁니다. 제가 ‘아니, 대통령으로 당선되어서 좋은 것을 사주실 줄 알았다’고 했더니 웃으면서 ‘그냥 갑시다’ 하시대요.”
그래서 간 곳이 사무실 골목 옆의 조그만 중국집이었다. 가족과 수행원이 모인 가운데 이 당선인이 “다 들어오라고 그래” 하자 운전사들도 들어왔고, 모두 30여명쯤 됐단다.

그래서 탕수육 같은 것 드셨나요. “아니, 무슨 소리예요. 그런 요리집이 아니라 정말 너무 허름한 집이었어요. 4000원, 5000원짜리 자장면과 우동 먹었어요. 음식이 어찌나 맛이 없던지. 요리사 말이 ‘혼이 빠져서 무슨 양념을 넣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하대요. 갑자기 기관총을 찬 경호원들이 주방에 들이닥치니 그럴 만도 하지요.”

 

유 교수는 그날의 얘기를 한 뒤 “그러니까 내가 다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분이 연설문을 통해 한 얘기는, 그의 진짜 생각이고 진심이지 무슨 요란한 레토릭이 아니란 말이에요. 한번 잘 떠올려보세요. ‘나는 서민의 아들입니다’‘나는 말은 잘 못하지만 일은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통령이 되지 못할 만한 그런 짓은 안 했습니다’ 안 그런가요? ”

이 대목에서 유 교수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가난으로 끼니를 잇기 어려웠던 바닷가 어촌의 소년이 많은 도전과 성취를 통해 대통령이 된 거예요. 어려운 사람을 위해 내가 무얼 해야 한다는 일관된 생각이 재산 헌납 같은 것으로 이어진 것이죠.”

그런 당선인의 뜻이 국민에게 그대로 전해진다고 보십니까. “사람들은 시장경제주의자인 새 대통령이 앞으로 정글 같은 약육강식의 세계를 그려나갈 것으로 우려하지만 이명박이라는 사람의 그 깊은 곳에 흐르는 생각은 그게 아니에요. ”

유 교수는 호흡을 쉬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현란한 말솜씨와 제스처가 아니라 정말 서민의 아들로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취해온 거예요. 이런 삶의 여정을 통해 그 밑에 흐르는 것은, 자기는 어려움을 딛고 성공했는데 그걸 국가가 제도로써 가능하게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것이 이명박 대통령의 성공이지만 대한민국이 보여줄 또 다른 성공일 것이라고 봐요. 민주화나 산업화에 이어 시장경제·고도성장을 택하면서도 이런 걸 이뤄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안도하고, 그래서 내가 (그를) 지지할 수 있는 겁니다.”

 

평소 이 당선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구름 위에서 노는 상류층 사람이 아니에요. 길 가다가 풀빵 사 먹고, 군고구마를 사 갖고 와서 나눠 먹는 분입니다.”

교수님 말씀이 정치인들보다 더 설득력이 있네요. “아니, 나를 포장할 필요도 없고 당선인을 포장할 필요도 없어요. 진실로 그렇다는 거지.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의 풀 앙가주망(full engagement·전폭적 지지)을 얻어내는 것이죠. 사실 나는 아쉬울 것 없어요. 지리학계의 수장이고 국제학술기구의 사무총장으로 어디 가도 VIP 대접 받아요. 먹고살 것도 있고 아이들도 다 키웠어요.”(웃음)

그래서 선거 후 심정이 어땠습니까. “내가 참 오래 그분을 겪어봤고 이미 잘 아는 바이지만, 그날 ‘내가 맞았어, 잘했어, 훌륭한 대통령을 뽑았어’ 그렇게 자부했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니까 나처럼 험블한 학자의 지지를 받고, 이런 학자에게 기대기도 하고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해요.”

처음 대통령 당선인을 지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인간적으로 건강하고, 늘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서 개척하고 이뤄내는 게 놀랍지 않나요? 샐러리맨이 이사가 되고 사장이 되면 ‘이제 좀 편히 잘살자’ 할 만한데 회장이 되고, 다시 만족하지 않고 국회의원, 시장에 도전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것, 그건 욕심이 아니에요. 그런 정신이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봤거든요. 이명박이면 정권교체하고 대한민국 선진화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은 것이지요.”

 

그런데 선거 치를 때 두 분 의견이 엇갈린 때는 없었나요. “있죠, 왜 없나요. 모든 게 물 흐르듯이 가나요. 많았죠.”(웃음)

왜 그의 연설문을 써왔나
대통령 연설은 에세이가 아닌 나라 운명 걸린 일
꿈·생각·이데아 담아 분출해내는 작업, 끝없이 재충전해야 가능

인터뷰하는 동안 유 교수에게 “대통령 취임사를 쓰느냐”는 확인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 취임사도 쓰시는군요. “해오던 일이니까요. 지난번 파리에 갈 때 당선자께서 ‘취임사는 도와주셔야죠’ 하기에 ‘뭐 하던 일인데 그래야지요’ 한 거예요. 취임사준비위원장 같은 직제는 없어요.”
당선인의 수많은 연설문을 써오셨습니다. “시장 시절부터 인쇄된 연설문은 거의 내 손을 거쳤어요. 최근 신년사까지. 물론 나 혼자 하는 일은 아니고요.”

얼마 전 대구매일신문에 ‘이 당선자가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특별기고가 실렸다. 글쓴 이는 바로 유우익 교수였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십시오” “국민에게 꿈을 주십시오” “대통령은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행여 하지 마십시오” 같은 내용이 조목조목 담겨 있었다. 기고문은 “위대한 국민입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십니다. 다만 ‘이명박다움’을 잃지 마십시오”라고 끝맺었다. 유 교수의 짧은 문체를 이 당선인이 특히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단문이지만 글이 강하네요. “그거야 뭐….”

연설문을 쓰는 건 어떤 건가요. “생각과 꿈, 전략, 이데아 이런 걸 자기 내면으로부터 분출해내는 과정이에요. 글재주로 쓰는 게 아닙니다. 그건 충전 없이 계속 안 되지요. 충전이 안 되면 나중엔 껍데기만 남아요. 내가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요.”

다른 글쓰기와는 어떻게 다릅니까. “단순히 에세이를 쓰는 게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걸고 쓰는 겁니다. 아주 심각하게 말하면 목숨 걸고 써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자꾸 풀어쓰기만 하면 안 되지. 지식인이 말 많이 하면 속에 든 게 없어지는 것이고….”

유 교수는 저녁 약속이 있다면서 베레모를 쓰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에게 “파리에 산 적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잘 알겠네요. 사람을 세상에서 하나의 자로 잴 수 없다는 걸 말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차에 오르면서도 한사코 사진 촬영만큼은 않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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