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_교회_主_성광

필리핀(Philippines) 선교 철저 준비 (2)_역사,종교,사회,문화

전동키호테 2007. 9. 25. 22:11

 

필리핀(Philippines) 선교

 

■필리핀 개관


1.면 적 - 300,000 KM2 북쪽의 루손 섬과 남쪽의 민다나오 섬을 중심으로 7,250여개의 섬으 로 이루어졌다.이중 700여 섬에만 사람이 살고 있다.
2. 인 구 - 6,800만명
3. 인 종 - 말레이-인도네시아인,필리핀인 95% 부족들 2.8%,중국인 1% 그외 1%
4. 교육율 - 88%
5. 공용어 - 필리핀어(따갈로그어),영어 (언어수 151개)
6. 성경번역 - 성경 전체 9개 언어,신약 26개 언어,쪽복음 55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7. 수 도 - 마닐라(1,000만명)
8. 경 제 - 농업과 산업이 혼합된 경제 체제이다.석유 파동,수출의 감소,부정 부패,사회 정치적 불안정,일련의 자연 재해등으로 인해서 심각한 경제 위기가 초래되었다. 1983년 이후 필리핀 장래에 대한 신뢰가 국제 사회에서 상실되어 경제는 더욱 궁지에 몰려 있다. 빈곤이 만연하며 50%의 인플레이션과 실업율이 증가하는 실정이다 (국민소득 760달러).
9. 정 치 - 1565년부터 1898년까지 스페인의 식민지었다. 대다수가 카톨릭 신 자이며 스페인풍의 관습이 많이 남아 있다. 그후 1946년 독립할 때까지 미국의 통치를 받았다. 1971년 계엄령이 통과되고 사실상 단일당의 공화국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권모술수와 실책,시민 자유의 오용 등으로 인해서 정부를 반대하는 소리가 높아져 결국 마르코스 정부는 1986년 몰락하였다. 이로 인하여 농촌 지방에서는 회교도들이 분리파전쟁을 진행중이다. 1986년 3월에 들어선 새 정부는 경험이 없고 사태를 대처할 만한 능력도 없어서 정국은 불안한 실정이다.
10. 종 교 -  종교의 자유가 있다. * 무종교/무신론자 1.5%
                               * 정령숭배 1% * 회교 8.4%
                               * 기독교 89.2% (복음화율/전인구의 6.4%)중에서
                                  1)카톨릭 71.6%, 2)이단종파 6.8%, 3)개신교 10.7%
             주재외국선교사/120단체에서 2,300명
             자국파송선교사/670명(자국내파송포함)


■ 필리핀 선교상황 이해를 위하여


1. 필리핀 개관
필리핀은 남한의 3배 크기인 300,000k㎡의 땅에 무인도를 포함하여 7,250개의 섬으로 이룩된 섬나라이다. 전국이 14개의 지역(Region), 73개의 도(province), 60개의 City, 1,532개의 군크기의 Municipality, 5만개의 동 크기의 barangay로 나뉘고 이는 모두 지방자치에 의해 움직여 진다. 전국을 크게 구분하면 북부 루손, 중부 비사야스, 남부 민다나오 세 큰 섬으로 나눌 수 있다. 매년 2.5%의 인구증가를 보여 91년 10월 현재 62,465,646명이 살고 있다. Malayo-Indonesian Filipino가 95%, 부족민 2.5%, 중국인 1%, 기타 1%로 되어 있다.


10세기부터 중국상인들과 접하면서 화약사용법, 도자기 만드는 법, 야금술, 금광술 드을 배웠다. 인도 자바 문화와도 접하여 필리핀 용 어중에 산스크리트의 영향을 입은 말들이 있고 미신사상 등이 나타 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라비안 문화에서 무어인 양식과 기술을 배워 화기를 사용하는가 하면 아랍말이 섞여 있기도 하다. 서기 1200년에 이미 인도에 있었던 이슬람 세력이 아랍인 선생 막둠이 1380년에 남 부 필리핀에 정착함으로 전해졌다. 이후 1450년 아부 바아크라는 사 람이 술루섬에 제착하면서 이슬람은 크게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고 스페인과 미국이 지배하는 과정속에서도 결코 변하기 않는 강직성을 지금껏 보이고 있다. 1521년 3월 16일 마젤란이 시부섬을 발견한 후 40년 후에 1565년 식민통치를 위한 기구가 생기고부터 스페인의 통 치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피의 댓가와 노력이 있었고 홍콩에 주둔하던 미해국이 1898년 5월 1일에 마닐라 만에 상륙하게 되고 1898년 6월 12일 스페인이 미국과의 싸움에서 패함으로 스페인 의 377년간의 통치는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미국의 지배가 계 속되었으며 일본의 지배를 잠깐 받긴 했으나 이는 1956년 7월 4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남으로 독립하게 되고 자주정부를 세우게 될 때 까지 계속되었다. 스페인은 가톨릭 신앙을, 미국은 교육을 통한 서구 문명을 전해주었지만 오랜 동안 지배받던 민족은 독립후 지금까지도 미국과 일본의 영향하에 있으며 자주권을 행사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공식언어는 필리피노(타갈록)와 영어이고 전체사 용되는 언어가 164개이다. 국민 1인당 GNP는 670불 정도이며 농업과 공업이 혼합된 경제구조를 갖고 있고 오일쇼크, 수출부진, 보편화된 부패, 정치적 혼란, 그리고 천재에 의한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이 상 존한다. 근래 미군부대의 철수와 선거열기 등으로 경제는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스페인, 미국, 일본 등의 식민통치 영향으로 동서양이 교체되는 복 합문화형태를 띄고 있으며 천주교가 국교로 되어 있으나, 종교의 자 유가 보장되어 있다. 천주교 신자가 63.6%이나 다수가 전통무속종교 와 혼합되어 있으며 미신적인 신자들이다. 개신교는 전체 인구의 10%정도이며 그중 5.2%가 열심히 있는 신자이다.


2. 필리핀 교회현황
Philippine Crusade Inc. 에 의하면 1991년 8월 현재 전국에 22,1888개의 교회가 있으며 전체 인구에 비하면 한 교회가 2,815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실제 교회참석 인원은 평균 58명으로 나타났다. 이 들은 개신교인의 비율을 5.2%로 집계하여 선교의 가능성을 증명해 주었다. 또한 이들이 벌리고 있는 K.A.W.N. 2000 운동은 2000년 까 지 전국 5만개의 동네에 적어도 한 교회를 세우자는 것인데 앞으로 도 23,752개의 교회가 더 필요한 상태이다.


1899년 최초의 개신교 미국 선교사가 들어온 후 지급까지 필리핀 은 어느 나라보다 예배하며 활동하기에 자유롭다. 2,000여명의 선교 사들이 방방곡곡에서 일하고 있으며 300며 개의 교단이 등록되어 있 고 드 결과 이미 굴직한 교회들이 여럿 생겨났다. 도표에서 보듯이 그러한 급성장은 80-90년 사이에 된 것을 알 수 있다. 즉 70년까지만 해도 4,300여 교회이던 것이 80년에 13,600 교회 로 90년에 27,000교회로 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장한 교회들 도 주로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들로 집계되고 있다.
필리핀은 아시아 지역에서는 드물게 볼 수 있는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이다. 자국내로 혹은 외국으로 선교사로 이미 선교사를 내보내고 있다. D.A.W.N. 2000의 통계로는 Africa 3, Austria, 1, Bolivia 1, Canada 2, Kenmark, England 1, Hongkong 6, Indonesia 7, Ireland 1, Japan 5, Korea 1, Malysia 4, Micronesia 2, Newguinea 5, New Zealand 2, Pakistan 1, Palau 1, Parayguay 2, Philippines 500, Saipan 3, Saudi Arabia 1, Singapor4 2, Swaziland 4, Taiwan 4, Thailand 5, UA Emirates 3, USA10, Zambia 2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1988-1990 Filipino Missionary Directory).


164개의 언어족 중에 134가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고, 31개는 신 약만 50개가 쪽복음만 번역되 상태이다. 교육에도 열심이어서 1974년 통계로 신학교 74개이던 것이 91년통계로 210개의 교회 혹은 기관이 신학교 혹은 교육기관으로 등록되었다. 신학교육도 주로 서양의 시상 을 번역하여 가르치는 단계에 있으며 많은 학교들이 지역여건을 고 려하여 신학연장교육(TEE)을 많이 실시하고 있다. 문서전도기관도 63군데나 등록되어 있고 이들이 도서를 펴내고 전도지를 개발하며 교육자료, 성경공부안, 기타 신앙지를 만들고 있다. 기독교방송과 텔 레비젼 방송국이 있어 방송을 통한 전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 카톨릭 선교
동남 아시아 지역에서 주후 1500년에서 1700년 사이에 원주민들 가운데 대다수가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인이 된 섬은 필리핀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운시상태에 있었으며 종교적으로 고등 신앙(higher faiths)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단지 이슬람교만이 아 시아 대륙에서 종교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이 세워진 곳에서 기독교는 많은 진척을 보이지 않 았다. 필리핀에서 회교가 기독교보다 앞섰다. 스페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보르네오로부터 모슬램 상인들이 먼저 화서 그들의 신앙을 가 르치고 있었다. 이슬람이 1세기 또는 2세기를 앞질렀기 때분에 필리 핀 섬들이 기독교화되기보다 이슬람화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스페인 선교사들이 때에 맞게 도착했다. 물론 남쪽에 많은 모슬렘 교도들이 있었다. 스페인 정복이 시작된 몇년 후인 1573년에 큰 북쪽 섬인 루손섬의 운주민들 중 얼마는 (특히 해안쪽) 모슬렘교도였다. 남쪽에 흩어진 모슬렘교도들이 부분적으로 민다나오의 통치자와 교 전이 있은 후 부분적으로 이슬람의 전도가 금지되었고, 이슬람교도 들의 집이 파괴되었으며 기독교의 가르침만이 허락되었다. 북쪽에서 는 기독교가 이슬람이 발판을 만드는데 방해가 되었다.


필리핀이 기독교화되었던 요인은 구미와의 접촉 때문이었다. 뚜렷 한 영향을 준 나라는 영향을 준 나라는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18세 기까지 유럽국가들 가운데에서 가장 공격적이며 포르투칼과 네덜란 드보다 어 힘이 강한 나라였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필리핀은 거 의가 스페인의 소유가 되었다. 스페인의 선교사가 동남아시아에서 다 른 지역보다 필리핀에서 더 큰 부분을 차지했다. 서구인들의 주요 목 적은 상업이 었고 기독교 신앙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에서 상업보다 선교가 더 꾸렷했고 정치적 정복보다 기독교 전파가 앞섰다. 필리핀은 아시아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선교사들 은 더 맣은 기독교인들을 얻었으며 선교사들이 동인도와 인도 차이 나, 중국, 대만, 일본 등으로 갔다. 실제로 필리핀은 스페인의 정치적 종교적 정복을 위한 전략지로 생각되었다.


마젤란(Ferdinand Magellan, 포루투칼 탐험가)은 챨스 5세 활제의 명령으로 지구의 정반대로 항해하여 유럽인들 일행과 함께 1521년 필리핀 막탄선(Mactan)에 도착하였으며 약 한달 후인 5월에 라푸라 루라는 추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529년에 포르투칼인의 경계선 확장을 필리핀에 두었으나 스페인 사람들이 섬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1542년에 빌라로보스 (Villalo-bos)의 원정이 실패했으나 1565년에 레가스피(Lopez de Legaspi)의 영도 아래 섬들의 정복이 시작되었다. 필리핀을 정복한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스페인의 정복의 확장이었다. 스페인 사람 들이 필리핀 회심자들을 얻은 것은 놀라울 만한 것이었다. 마젤란과 빌라로보스에 의한 필리핀 회심자들이 생겨나긴 했으나 정치적 정복 처럼 영구적인 기독교를 심은 것은 레가스피에 의해서였다. 레가스피 의 지시에 의하면, 모든 탐험가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행동해야 하 며, 주님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공경해야 하며, 원주민들을 잘 대 우해야 하며, 종을 사고 파는 일에 종사하지 말아야 했다.


레가스피와 함께 5명의 어거스틴 수도승들이 왔으나 그 중에 3명 만이 필리핀 섬에 남았다. 어거스틴 교단에 이어서 1577년에 프란시 스교단이 도착했으며, 1578년에 도미니크 교단이 교황의 명령으로 마 닐라에 주교구 성당을 세우기 위해 들어왔으며, 이러서 제수잇 교단 이 들어왔다. 이들은 점유한 후 1세기 동안 종교적 열정과 군사적 정 복의 결합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필리핀 회심자들을 얻는 데 성공 케 했다. 기독교는 필리핀 사회에 많은 일을 했으며 오늘날 필리핀 사람들의 72%가 아시아에서 단지 명목상 그리스도인 국가로 만든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스페인의 필립 2세에 의해 식민정책의 주요목적으로 신앙을 전파 하게 하여 교회, 병원, 학교들을 세웠으며 원주민 성직자들을 훈련시 켰다. 처음 필리핀 감독 조르게 바르린(Jorge Barlin)이 생겨난 후로 1905년까지 주교감독이 생기지 않았다. 이슬람이 인도네시아로 부터 북쪽으로 퍼질 때 가톨릭이 이슬람의 전진을 막는 역할을 했다.


비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수년 동안 산속으로 쫓겨난 일백만 정도 의 부족들과 이방인들이 있다. 또한 민다나오(Mindanao) 남쪽섬에 주로 모여 사는 모로스(Moros)라 불리는 2백만의 모슬렘교도들이 있 다. 마닐라에 30만의 중국인들이 있으며 주요 도시들 가운데 주로 종 교적으로 불교인, 문화적으로 유교인들이 있다. 필리핀 독립교회(Philippine Independent Church)가 아글리파안 교 회(Aglipayan Church)교회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그 지도자 그레고리 오 아글리피아(Gregorio Aglipay)가 로마에 반대하여 독립 국가적인 가톨릭 교회를 설립했는데 1902년에 형성되었다. 수년간 필리핀 독립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자유진영과 보수진영 사이의 불화로 인해 교회에서의 분열을 가져왔다. 1948년 이래로 필리핀 독립 교회 의 세 감독들이 미국인 대주교의 손에 성별식을 받았을 때 두 교파 가 협력하여 일했다. 케손시에 있는 성 안드루 신학교(St.Andrew''''s Theological Seminary)가 지금 연합기구이며 두 교파 간치 성직자들 을 훈련시키고 있다. 1961년 이후로 그들 사이에 친밀한 교섭이 있었 다. 필리핀 독립 교회는 150만 이상의 회원들을 가지고 있으며, 수십 개의 교구안에 약 40명의 감독들을 가지고 있다.



2)개신교 선교
미국으로부터 개신교 선교협회들이 쇄도하여 들어왔다. 그 첫번째 가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였다. 장로교 개 척선교사는 1899년 4월에 도착한 제임스 로저스 박사(Dr. James B.Rodgers)였다. 두마케티시에 있는 유명한 실리만 대학교(Silliman University in Cumaguete city)는 1901년에 장로교인에 의해 창설되 었다. 처음부터 장로교회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조장했다. 1907년에 그들은 마닐라에 연합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를 세우 기 위해 감리교인들과 손을 잡았다. 1992년에 그들은 연합복음주의교 회(United Evangelical Church)를 형성하기 위해 회중교인들과 연합 형제회들과 통합했다. 1947년에 교회와 선교가 통합했으며 그 후 선 교사들은 형제의 일꾼들로서 교회에서 봉사했다. 1948년 이후는 장로 교인들의 일이 필리핀 연합교회를(United Church of Chirst in the Philippines)를 구성하는 부분이 되어왔다. 지난 10년 동안 우호적인 일꾼들의 수가 감소했다. 대략 1/3이 교회일에 머물렀고 나머지는 의 료와 교육과 행정 일에 머물렀다.


필리핀에 들어간 두번째 선교회는 감리교 성공회(Methodist Episcopal Church)였다. 감독 제임스 써번(Bishop James M. Thoburn)은 1899년에 마닐라를 방문하여 필리핀 섬들에서 사역을 의 논했다. 처음 선교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초기의 회심자인 니콜라스 자모라 목사가 일을 수행한다. 처음 선교사들은 1900년 2월에 마닐라에 도착 한 WFMS에 소속한 5명의 여자들이었다. 한 달 후 토마스 마틴 목사가 도착했고 이어서 후에 감독이 된 호머 스텐츠(Dr.Homer C.Stuntz)박사가 일을 수행했다. 여성들을 위한 첫 성경학교가 위니 프 레드스폴딩 양(Miss Winifred Spaulding)에 의해 열렸다. 첫선교 회의는 1905년에 조직되었고 1908년에 정기회의를 가졌다. 감리교 성 공회는 세 번(1905, 1909, 1933년)이나 갈라졌다. 첫 필리핀 감독이 1944년에 임명되었다. 오늘날 감리교회는 5개 연회로 조직되었고 모 든 주요 직위들은 필리핀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미국 선교사들은 협 력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952년까지 필리핀 연합교회의 문제로 감리교회의 사역이 북루손섬에 한정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교회와 선교 일이 민다나오까지 확대되었다.


미국 침례교(American Baptists)는 1900년에 현지에 도착하여 파나 니(Panay)와 네그로스(Negros)섬들에 노력을 집중했다. 에릭 룬트박 사(Dr.Eric Lund), 스위스 침례교 선교사는 미국 침례교 외국인선교 사협회의 처음 대표자였다. 그와 그의 동료 브라우리오 마니칸 (Braulio Manican)은 1912년 파나이어와 비사얀어 성경번역을 마쳤 다. 첫 선교 병원이 안드루 홀 박사(Dr. Andrew Hall)에 의해일루일 루(Iloilo)에서 열렸다. 1905년 미스 안나 쟌슨(Miss Anna Johnson)은 침례교 선교사 훈련학교를 세웠다. 필리핀 침례교회 협의회는 1935년 에 형성되었는데 세례 교인 3만을 가진 교회로 300여 교회가 있다. 다음은 1901년에 생긴 그리스도의 제자교회(The Disciples of Christ)가 있다. 그들은 마닐라를 피하여 북 루손으로 갔으며 라오악 (Laoag)에 본부를 세웠다. 1901년과 1954년 사이에 이 선교회의 70명 의 선교사들이 이 섬에서 사역했다. 1943년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복 음주의교회를 형성하기 위해 연합형제회(United Brethren)와 통합했 다. 이들은 후에 필리핀 연합교회가 1948년에 조직될 때 가장 큰 연 합회원이 된 교회이기도 하다.
1902년에 외국선교를 위한 미국인 이사회는 일치에 의해 민다나오 남쪽섬으로 할당되었다. 그 당시 50%가 명목상 가톨릭교도였고 30% 가 모슬렘교도였으며 나머지는 이방인이었다.


개척 선교사인 블랙 목사 부부(Rev.and Mrs.R.F.Black)는 다바오 (Davao)에 위치했다. 회중교회는 연합복음주의교회를 형성하기 위해 1929년에 장로교회와 연합형제교회와 통합했다. 1948년에 새로 형성 된 필리핀 연합교회의 일부가 되었다.
미국성공회(Protestant Episcopal Mission)는 1902년에 일을 시작했 다. 이들은 항상 마닐라에 있는 영미 사회에 중요한 사역을 계속해 왔다. 또한 루손 산간지역의 이고롯쪽(Igorots)과 남쪽 민다나오의 원 주민들을 중심으로 선교를 펼쳤다. 성 안드루 신학교와 트리니티 대 학이 필리핀 독립교회와 지금 손을 잡고 일하고 있다. 필리핀 성공회 는 거의 6만명에 이르는 세례교인들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선교연맹(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은 1902년에 민 다나오 남부섬에서 일했으며 여러 달 후에 선교사가 콜레라로 죽자 일을 보류하기도 했다. 수년 후인 1908년에 일을 시작하여 2커플을 얻었고 1941년에는 30명의 사역자를 얻었고 1947년에는 필리핀 기독 교선교연맹이 독립하게 되었다. 1969년에는 558명의 회원들을 얻었 다. 세례교인은 2만을 확보했다. 여러 수준에서 기독교인 훈련을 하 는 4개의 성경학교를 운영했으며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시켰다. 2백 만장 이상의 복문서를 정기적으로 찍어내는 연합출판사를 만들었다. 또한 라디오 방송도 민다나오에서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사역중 하 나이다. 1958년에 시작된 좋은 소식시간(Good News Time)은 22주간 방송으로 확대되었고 그 중에 4개의 상업방송과 하나의 교회와 관계 된 방송을 가지고 있다.


제칠일 재림교(Seventh Day Adventists)는 1910년에 필리핀에서 선교를 시작하였고 여러 곳에 강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 174개의 국 민학교, 20개의 고등학교, 2개 대학과 6개의 병원을 가지고 있다. 교 회 개척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125,000명의 회 원을 모았고 1,165개 정도의 교회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ies of God)는 미국에서 회심하여 미 국 성경학교에서 훈련받았던 필리핀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강한 열정을 가지고 1930년에 필 리핀에 돌아와 하나님의 성회 교회를 세웠다. 오늘날 이들 중 몇몇은 훌륭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에서처럼 하나님의 성회는 복음 전도와 교회개척에 열심이다. 오늘까지 각 지역에 6개의 성경학교를 세웠고 1964년에 극동신학교(Far East School of Theology)를 마닐 라에 세웠다. 성경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연장교육을 시키려는 목 적이었다. 현재 425교회에 5만의 세례교인을 확보했으며 700명의 자 국인 사역자들과 45명의 선교사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연합그리스도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 in the Philippines : UCCP)는 1948년에 연합교회를 형성하기 위해 세 개의 교파가 통합 을 했다. 이 교파들은 연합복음주의교회(장로교회와 회중교회 : United Evangelical Church)복음주의교회(연합형제교회와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 Evangelical Church), 필리핀 감리교회(독립교회 : Philippine Methodist Church)였다. 다섯 개의 미국인 교파들이 연합 교회와 협력했다(그리스도의 제자교회, 연합장로교회, 연합감리교회, 개혁교회, 연합그리스도교회). 이들 교회에서 연합교회에 70여명의 선 교 사역자들을 할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선교부는 교육, 의료, 행 정사역에도 해마다 협력을 해왔다. 해마다 4-5%의 성장률을 가지고 도 엽합교회는 1,400명의 모든 전도자들에게 신학교 훈련사역을 후원 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400명만이 목사로 임명되었다. 연합그리스도 교회는 160.000명의 세례교인을 가진 분명히 필리핀에서 가장 큰 개 신교회가 되었다. 연합교회는 성경학교, 학원, 중소 대학, 간호학교, 두 신학교와 실리만 대학 등 20개 이상의 학교를 세웠다.


선교현장에서 그렇게 내놓고 자랑할 만한 기독교 대학이 별로 없 다. 1907년에 장로교인에 의해 세워진 두마케티시(Dumaguete)에 있 는 실리만 대학(Silliman University)교는 필리핀에서 내놓을 만한 대 학이다. 207명의 교수진과 3,500명의 등록학생들을 가지고 있다. 실리 만 대학은 현재 연합그리스도교회와 관계를 갖고 있는 에큐메니칼에 속한 대학교이다. 필리핀중앙대학(Centeral Philippine University)은 미국 침례교회와 관계가 있는데 1905년에 일루일루(Iloilo)에서 시작 되었다. 1953년에 정부로부터 정식 인가받은 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으 로 10개의 중소 대학교로 구성되었으며 한 개의 신학교를 가지고 있 다.
2차 세계대전 후에 많은 선교 단체들이 일어났다. 이 선교단체들은 미개한 부족들에게 더 많은 선교를 집중하고 있는 선교단체들이다. 남침례교선교회는 1948년에 마닐라에 있는 전중국선교사들로 말미암 아 시작되었다. 빠르게 성장하여 북쪽에 루손섬과 남쪽에 민다나오섬 과 중앙에 시부섬에 현재 1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이미 145 개의 교회를 개척했고 그중 130개의 교회가 자립하고 있다. 세례교인 이 13,000명에 이르고 있다.


해외선교사협의회(Over Missionary Fellowship)는 1952년에 민도 로섬(Mindoro)에서 선교를 시작했으며 그 당시까지 거주하는 개신교 선교사가 하나도 었었다. 오늘날 선교사의 정반이 부족들이 사는 산 간지역에 교회를 개척했다. 그 중에 약 30,000명에 이르는 망얀 (Mangyan)지역에 사는 원시생활을 하고 있는 6개의 주요 부족들에 게 선교를 하고 있다. 문서선교를 통하여 필리핀 교회들에게 큰 공헌 을 하고 있는 선교 단체이다.


위클리프 성경번역(Wycliffe Bible Translators)선교회는 피트만 박 사(Dr. Richard Pittman)의 인솔로 22명의 성경번역자들이 1953년에 필리핀에서 도착함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150명의 선교사들이 42부족들 가운데서 일했다. 성경의 부분들이 23개의 언어로 번역 되 었다. 이방인 부족들도 관심을 가졌으며 모슬렘족에게까지 사역이 확 대되었다. 번역자들은 직접전도를 하지 않았으나 현재 36부족 가운데 신앙인들이 생겼다.


또한 필리핀의 원시 부족들 가운데 일하고 있는 새부족선교회( New Tribes Mission)는 현재 6부족에 5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3) 오늘의 민속신앙
1521년 마젤란이 와서 로마 가톨릭을 전파하지 전 필리핀에 존재 했던 종교는 전령숭배신앙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필 리핀의 역사는 거의 알 길이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오기 전 그들의 종교는 영적 세계에 관심을 가졌다. 1521년 마젤란이 시부에 도착한 일주일 후 시부의 왕과 여왕과 그 백성 전체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은 필리핀 사람의 전통과 민속을 로마 가톨릭과 대치되지 않는다고 믿어 그대로 받아들였다. 스페인 신부들은 세례를 베풀 때 일부일처의 결혼과 과거의 죄로부터 회개, 세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신앙을 조건으로 했으며, 이 외에도 아베마리아, 십계명, 주기도문 등의 제도를 덧붙였다. 교회는 로마 가톨릭 종교를 필리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곳이 되었고 반면에 가정은 엥 정령숭배의 종 료를 가르치는 곳이 되었다. 정령신앙은 실제적인 매일의 생활 즉 농사, 사냥 등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로마 가톨릭은 궁극적 관심 즉 신에 더욱 관 심을 가지고 있었다. 필리핀 사람들의 식민지화는 성공했으나 로마가 톨릭 신부들은 현재의 종교가 실제의 로마 가톨릭이 아닌 혼합된 종 교 즉 민속 가톨릭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민속 가톨릭은 로마 가톨릭 의 모습을 가진 정령신앙일 뿐이다. 민속종교는 같은 사람 안에 일치하지 않는 두 개의 종교를 가진 종교이다. 로마 가톨릭 은 궁극적 관심을 다루고 정령신앙은 매일의 생활의 관심을 다루고 있어 이 둘은 서로 다른 삶의 영역을 가진 생 각과 행동이 분리된 결과를 가져왔다. 가톨릭은 구원을 위해 세계를 가프쳤고 필리핀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세례를 받는 명목상의 신자가 되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중심에 정령신앙이 남아 있다.


그러나 관심의 분야에 있어 차이점이 있으나 로마 가톨릭과 정령 신앙이 겹치는 분야가 잇다-예배와 축복을 위해 종교적인 우상이나 물건들을 사용, 성수 사용과 성인들에게 기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에 정령신앙의 부적과 같은 능력을 부여, 종려주일에 축복이 부여된 십자가 형상으로 만든 종려 잎사귀들이 집 문위에 놓여질 때 악령들 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지푸니와 버 스, 택시 등에 그들의 여행을 지켜준다는 신앙을 가진 동정녀 마리아 나 싼토 니뇨(Santo Nino)의 형상의 제단을 가지고 있다. 시부의 뀌 아포의 검은 나사렛사람(The Black Nazarene of Quiapo)과 싼토니뇨 (Santo Nino)는 병든 자를 고치고 악한 영들에게서 지킬 수 있는 능 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종교적 상들이다. 싼토 니뇨의 집인 시부시 에서 싼토 니뇨의 호의와 관심을 얻기 위해 늙은 여인들이 피트 쎄 뇨(Pit Senor)라는 춤을 춘다. 이 여인들은 고객들이 사준 초들을 가 지고 교회 앞에서 춤을 춘다. 이 초들은 싼토 니뇨의 관심을 받았기 때문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해마다 1월에 전국에서 모인 수천명 의 사람들이 시부의 싼토 니뇨를 기념하여 춤을 춘다. 겹치는 또 한 가지는 연옥설로서 사람의 영혼이 죽은 후에 계속해 서 나타난다는 정령신앙과 일치한다. 그 예로 위령의 날(All Soul''''s Day)에 죽은 자의 무덤에 음식을 놓아두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무 덤에서 죽은 조상들과 함께 하루종일 또는 온 밤을 지내기도 한다.


3. 필리핀 선교의 어제


1) 개 론
필리핀은 대소 7,000여개에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국가로서 이름이 붙은 섬만해도 2,700여개를 헤아린다. 국토의 면적은 남한의 3배 크 기의 국가이다. 북부의 루손섬이 가장 크고 남부의 민다나오섬이 그 다음으로 크다. 필리핀은 전체적으로 화산구이며 현재 활동하고 있는 화산만 해도 50개가 넘는다. 또한 동서 지각의 접점이 단층을 이루는 불안정한 지반 때문에 해마다 크고 작은 지진이 수 없이 일어나고 있다. 1990년 7월에 박이오에서 일어난 진도 8.3의 지진은 1,000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1991년 6월의 피나투보 화산 폭발은 600여명이 화 산 불덩어리에 타죽고 그 후에 400여명의 많은 어린이가 굶어 죽었 다. 그리고 그해 11월 4일에 있었던 홍수로 7,000여명의 사람들이 죽 는 큰 수해가 있었다.


필리핀에는 원주민 네그리토족의 문화와 스페인 식민통치 시대의 유럽문화가 혼합되어서 독특한 필리핀 문화를 꽃피우고 있 다.(Malayo-Polynesian). 또한 현대의 최첨단 문화와 석기시대의 원 시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 형태를 형성하고 있다. 필리핀 의 관광시즌은 12월-5월이 적기로 평균 27℃로 기온차가 작고 여름 옷 차림으로 와야하며 선그라스와 수영복도 준비할 필요가 있다. 비 행기 삼은 400달러가 조금 더든다. 시차는 한국보다 한 시간이 늦으 며, 축제일은 설날(1/1), 성고난주간(3-4월), 근로의 날(5/1), 용사의 날(5/6), 독립기념일(6/12), 모든 성자의 날(11/1), 국민영웅의 날 (11/20), 성탄(12/25), 리잘 기념일(12/30)이 있고 이 밖에 지방마다 종교적인 축제일이 많다. 화폐단위는 페소(Peso)이며, 한화로 1페소는 약 30원으로 계산하면 된다. 팁은 P10-20이면 적당하다. 광광지로는 필리핀 전통과 역사를 볼 수 있는 나용필리피노, 카톨릭문화를 볼 수 있는 성어거스틴교회, 스페인 당시으 산티에고 요새, 리잘공원 그리 고 우리나라의 청와대 같은 말라카낭궁의 신발 3,000켤레와 옷들, 팍 상한 폭포는 배가 꺼꾸로 올라가는 스릴도 있고 경치도 볼 만한 곳 이다.


현재 인구는 66,659,000명이며(세계 16위), 기후는 열대성 기후이며, 건기와 우기로 나뉘며 연간 30여회의 태풍이 발생하고 지나간다. 부 족은 100여 종족이며, 87개의 언러를 갖고 있다. 그리고 영어는 하나 의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중국인들이 60만명 정도 있는데 이들이 경 제의 80%을 장악하고 있다. 필리핀에 있는 중국인에게 선교하는 길 이 열릴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시길 바란다. 그들과 함께 중국 본토 를 선교하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소득은 600달러이며, 주 로 1차 생산품을 수출하고, 2차 생산품을 수입하는 전형적인 빈국의 형상을 보이고 있다. 국민으 90%가 그리스도인인데 이중 80%는 가 톨릭교도이며, 10%는 개신교이다. 민다나오와 슬루섬은 대부분 이슬 람교인이며 이들은 무장하여 독립투쟁을 벌리고 있다.


2) 필리핀의 약사
필리핀은 마젤란의 세계일주 동안에 발견되어 사마르도에 상륙한 것을 계기로 필리핀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마젤란이 시 부에 상륙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식민지를 시작하였다. 필리핀이라는 국명은 마젤란 당시의 스페인 국왕이었던 필립 2세를 기념하기 위하 여 붙여졌다. 필리핀의 역사는 전 스페인 시대, 스페인 식민지 시대, 미국식민지 시대 그리고 현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1) 전 스페인 통치 시대(Pre-Spanish Period)
스페인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지기 전의 필리핀은 섬나라의 지역 적인 특성 때문에 선사시대에 해당한다. 거의 어업과 사냥에 의한 생활이 이루어졌다. 농경은 루죵섬에서 벼종사가 지어졌고, 그 외 의 지역들은 거의 산족들로 씨족사회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부족 사회의 형태를 유지하였다.


(2) 스페인 식민지 시대(The Spanish Period)
1521년 3월 16일에 마젤란 함대에 의하여 발견된 필리핀 섬은 1521년 3월 31일에 마젤란이 시부섬에 상륙하면서 필리핀의 근대 사는 시작된다. 1565년 스페인은 마젤란 함대를 통하여 시부에 수 도를 설정하고 1571년에 루존섬을 발견하게 되어 스레인의 통치를 받다가 1898년 미군에 의해 독립을 이룰 때까지 스페인은 333년간 을 필리핀을 통치한다. 19세기 말부터 필리핀의 대스페인 저항운동 이 시작되었으며, 특히 1897년 아귀날로 장군의 독립선언은 대표적 이다. 1898년 미, 스페인의 전쟁시 아귀날도 장군은 미국의 협조를 얻어서 홍콩으로부터 필리핀에 상륙하여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하 였으나 동년 12월 미 스페인의 강화조약으로 스페인은 2,000만불을 대가로 받고 필리핀을 미국에 할양하였으며 이로부터 미국의 통치 가 시작되었다.


(3) 미국 식민지 시대(The Period of U.S. Influence)
미국은 필리핀의 궁극적인 독립을 목표로 하고, 점진적인 자치활 동을 허용하였으며, 1916년 양원제를 확립, 참정의 문화를 개방하 고, 1934년 11월 15일 퀴죤 대통령, 오스메나 부통령의 연방정부가 성립됨에 따라 미국의 통치는 총독제로부터 고등변무관제로 바뀌 었다. 미국은 필리핀의 겨어제를 크게 활성화시켰고 특히 수출입 분야에서 필리핀은 서서히 구거제적인 두각을 나타내였다. 최근 20 년 전까지만 해도 필리핀의 경제는 국제사회에서 손꼽히는 부를 축적했었다. 특히 근대사에 막사이사이는 위대한 지도자로서 필리 핀을 크게 발전시킨 대통령이었다. 미국은 그들의 통치 기간에도 필리핀의 자치를 인정하여 필리핀은 미국령이면서도 독자적인 정 부의 형태를 이루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공격으로 점령되었 으며 1946년까지 일본은 필리핀을 지배하였다.


(4) 근대와 현대
제2차 세계대전중 1943년 10월 호세 피 라우엘을 수반으로 하는 괴뢰정부가 들어섰으나 종전과 함께 소멸되고 1946년 7월 4일 미 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독립을 하였다. 독립후 초대 로하스정권 (1946.7-50.1)과 2대 퀴리노 정권(1950-54.1)은 미국으로부터 원조 에 힘입어 2차 대전의 전화회복에 힘썼으며, 미국과의 관계도 공고 히 하였다. 53년 3대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영도하에 정치근대화에 큰 성과를 보였으며, 54년 9월에 SEATO에 가입하였다. 57년 3월 비행기 충돌로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급서함으로 가시아가 4대 대 통령에 취임하였다. 61년 12월에 출범한 마카파칼 5대 대통령은 여 야의 백중으로 의안처리가 지연되고 겨어제발전이 크게 저해됨으 로 많은 어려움이 대내외적으로 있었다. 1965년 12월 6대 마르코스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66년 2월 말레지아와 북교하였고 동년 6월에 월남 파병을 하였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근 20여년을 장기통치하였 다. 그는 근세사의 법률과 민주화의 대업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높 이 평가를 받으면서도, 개인 장기집권으로 오는 부정부패 부조리로 인하여 필리핀에 악영향을 끼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CPP 및 NPA - 필리핀 공산당(CPP : Communist Party of the Phil-ippines) 및 그 산하 군사조직체인 신인민군(New People''''s Army)은 69년 초에 결성되었다. NPA는 10,000명 정도이며, 루존 섬 중부 및 북부지방 사말섬, 시부섬, 레이테섬, 일로일로섬 및 민 다나오섬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들어 움직이기 시작 하는 필리핀의 공산주의 운동은 필리핀을 외세로부터 완전독립시 키겠다는 그들의 주장에 따라 상당수의 지식인과 국민의 호응을 얻고 있으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쿠테타는 필리핀을 더욱 약하게 만들고 있다.


3) 필리핀 성결교회의 역사
기독교한성결교회는 1986년에 전부터 필리핀에 유학차 와서 있다 가 선교사로 일하고 있던 김상원 목사를 교단 선교사로 영입하여 파 송함으로 그 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는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3 시간 가량 떨어진 우르다네타 지역의 독립교회 15개를 모아 Phil-Kor Evangelical Church Inc.를 만들었으나 후에 얼마되지 않아 부족한 후원을 이유로 모두 흩어지고 그 단체도 유명무실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마닐라 동쪽 외곽에 쿠팡교회를 개척하였 는데 청주서문교회의 후원으로 89년에 건축을 완료했다. 1988년 11월에는 김광수, 송평구 두 선교사 가족이 다시 파송되어 마닐라에 정착하면서 단체의 이름을 Philippine Evangelical Holi-ness Church로 개칭했으며 1991년 1월에 필리핀 정부의 정식인 가를 얻게 되었다. 이 나라의 법에 따라 이사진이 구성되었는데 그 중에는 은행장인 비올리쿠르즈 자매와 농부의 아내이면서 신학생을 40여명이나 후원하는 마티스어거스틴 자매 그리고 대학교수인 사무 엘 나티비다드 형제가 포함되어 있다. 그 동안 이 단체의 이름으로 쿠바오 교회, 람발란 교회, 루팡팔이코 교회, 파식 교회 등을 개척했 다. 이들 중에 람발란 교회는 91년 12월에 교회 건축을 완료했으며 92년 2월에 헌당식을 하였다. 현재 선교부내에 함께 일하는 현지인 전도사가 5명, 교인이 모두 450명이 있으며 케스트룸과 루팡팡아코 교회의 무료급식소가 운영되고 있다. 1991년 10월에는 이창용 선교사 가족이 중부 시부섬에 파송되었고 평신도 의료선교 단체인 필립선교회와 협력하여 일하게 되었다. 그리 고 같은 해 12월에는 양한갑 선교사 가족이 북쪽 산간지역 선교를 위하여 파송되어 사역을 준비하는 중에 있다. 그는 앞으로 Mou-ntain Christian Center를 운영하며 제자훈련, 도서관 운영, 농 장 운영, 음악교육, 교회개척 등의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4) 가톨릭과 개신교의 선교
(1) 가톨릭
1521년 3월 16일 마젤란 함대에 의하여 필리핀은 발견되었다. 다 섯 척의 배에는 270명의 선원이 있었다. 그리고 마젤란 함대의 선 원들은 1521년 3월31일에 첫미사를 시부에서 드렸다. 그후 어거스 킨 구룹의 신부들이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후 프란시스 그룹은 1578년 6월 24일에 마닐라에 도착하였고, 1581년 9월 17일에 제수 잇교단이 들어왔으며, 그 후 1587년 6월 21일에 도미니칸들이 들어 와서 필리핀은 유일하게 동양에서 가톨릭국가가 되었다. 가톨릭 단 체로는 AMRSP(Association of Major Religious Superiors of the Philli-ppines)가 있는데 2,500명의 신부와 7,000명의 수녀로 구성되 어 있다. 82년 1월 교황 바오로 2세가 필리핀을 방문하였으며, 82 년 후반기부터 제임스 신 추기경을 중심으로 정부의 부정부패, 근 대의 권력남용, 인권침해 등을 들어 공격함으로 정부와 관계가 원 만치 못하다.


(2) 개신교
1989년 2월 15일 미국전함이 하바나 항구에 들어오고, 1898년 5 월 1일에 마닐라만에서 스에인과의 싸움에서 미국이 승리함으로 스페인의 필리핀에 대한 333년간의 식민지통치 시대는 끝나게 되 었다. 1899년 4월 21일에개신교 장로교단 선교사 제임스 비. 로저 스가 필리핀에 선교를 시작하였고, 감리교는 1900년에 그리고 북침 례교단도 같은 해에 선교를 시작하였다. 지금의 개신교는 각처에서 급성장을 하고 있으며, 필리핀의 개신교 신자는 150만명 정도로 추 산된다. 자장 큰 교파는 장로교이며 회중교회, 연합형제회, 그리스 도 제자회, 감리교 등이 있다.


(3) 이글레시아 교회
필리핀에서 처음에 눈에 들어오는 녹색 지붕의 큰 교회당이 큰 도시마다 있음을 볼 수 있다.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이 단체는 예 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본부에서 작성된 설교가 각곳으로 배부되 어 동시에 같은 내용의 메세지가 전달되고 있다. 필리핀에는 약 50 만명의 신자가 있으며, 거의 저소득층이다. 직장과 연결되어서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철저한 11조를 바친다. 이 단체 는 1914년 펠릭스 마날로(Felix Manalo)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 는 삼위일체론을 따르지 않으며 자신은 철저히 성경적이고 마닐로 자신에게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이 교는 대단 히 민족적이며, 반가톨릭적이고, 회원들을 거의 군사적으로 통제하 고 있다. 또다른 이교집단은 그리스도의 성교회 십자군(The crusaders of the Divine Church) 으로 지난 15년간 10만명의 개정 자를 얻었다. 필리핀에서 가장 큰 교회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이름의 교회인데(Jesus is Lord), 100,000명이 모이고, 두번째 큰 교회는 <생명의 빵>(Bread of Life)이라는 교회로서 50.000명이 모이며 60 개의 지교회를 세웠으며, 이 교회는 극장에서 예배를 드린다. 세번 째 큰 교회는 <세계를 위한 말씀> 교회로서(Word for World) 신 자는 30,000명이 모인다. 이직 성경이 번역되지 않은 부족의 언어 가 94개 있으며 65만명 정도의 중국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4. 어떻게 선교에 동참하나?
필리핀은 추수기에 있는 나라이다. 한국은 10명에게 전도하면 3명 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일본은 100명에게 전도하면 1명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필리핀은 10명에게 전도하면 7명이 주 예수님을 그들의 구 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성령님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나라가 세계에 어디 또 있나? 집중적으로 기도하여 주십시오! 집중적으로 물질로 헌금하여 주십시오! 한국 돈 100원이면 굶주린 어린이 한 명에게 무료급식을 한끼 할 수 있으며, 10만원이면 전도사 한 명을 전임 사역자로 후원할 수 있으며, 3천만원이면 교회부지를 장만하고 건축을 할 수 있다. 자녀들을 단기 선교사로(일주일)나 장기 선교사로 내보내 선교에 동참토록 합시다.


 


5.오늘의 활동상황


1) <남발란> 교회
언어 훈련을 하면서 만난 사무엘 나티비다드는 김광수 목사에게 필리핀 언어인 따갈록을 가프쳐 주었다. 수업 도중 소개한 복음을 그 는 자신의 주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였고, 계속 교제와 양육을 통하여 그는 신앙이 자랐으며, 고난주간에 십자가에 실제로 못박히고 달려있는 행사가 필리핀에서는 유명한데 사무엘의 인도로 가족과 함 께 보러 갔다. 그곳에 갔을 때, 자기 집이 가깝다고 하면서 잠시 들 리자고 하여 그의 집에 갔더니 그의 부모가 환영을 하여 주었다. 그 의 어머니는 이렇게 요청하였다. "선교사님! 저의 소원은 제가 죽기 전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라고 물었다. "그 전에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였었지요. 그리고 저희가 땅 을 하나님께 헌납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누가 땅을 팔아먹어서 교인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작년 4월부터 매주 금요일에 가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1990년 6월 22일에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고 그때 22명이 모였는데 이제는 170명이 모이고 있다. 신광성결교회의(김창배 목사) 1,500만원의 헌금과, 문화촌성결교회 의(정옥현 목사) 1,000만원의 헌금 그리고 천호동성결교회의(안창건목 사) 500만원과 남서울 중앙교회의 500만원의 헌금이 모아져서 3,500 만원을 갖고 55평 정도의 크기의 교회당을 건축중에 있는데 약 80% 가 건축이 되었다. 1992년 2월 둘째 주에 헌당예배를 드릴 것이다. 그들은 건축비의 30%를 담당할 것이다.


2) <파야다스> 교회
파야다스 교회는 마닐라에 있는 퀴죤시의 전용 쓰레기 하차장으로 그곳에서 사역을 준비하고 있던 장로교 여자 선교사가 말라리아에 걸려서 본국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의사의 충고에 의하여 떠나게 되 었다. 그 선교사는 부탁하길 "하나님과 현지인들에게 선교원을 세우 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김 목사님이 제대신 약속을 지켜 주세요" 그 래서 같이 그곳에 가보니 그곳은 우리나라의 난지도와 같은 쓰레기 하차장에서 폐품을 줏어서 먹고 살고 있었다. 갈 때마다 마음에 연민 의 정이 일어났고 기도 중에 이곳에 교회를개척하기로 결정했다. 오 전에는 쿠바오 교회에서 예배 인도를 하여야 했기 때문에 오후에 와 서 전도된 몇명의 신자와 같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개척예배일 :1990년 7월 29일). 신자 중의 한 명이 부탁하기를 "목사님! 이곳의 아이들이 하루에 한끼나 두끼 정도의 식사를 하는데 어려우시드라도 어린이를 위한 급식소를 열어 주세요." "우리 기도하여 봅시다." 김선 교사의 대답은 예 대신 단순한 응답이었다. 그때 기도하면서 갈등을 하였다. 김선교사는 두가지의 어려움이 있었다. 한 가지는 "선교사로 왔지 사회사업가로 온 것이 아니잖아"와 실제로 급식소를 운영하려 면 자금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결정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 때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이 어린이를 사랑하시는 모습의 성경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난했던 어린시절이 생각이 났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여 자신은 굶으시면서 자식에게 먹여주시던 모습, 그리고 그때의 소원은 밥좀 실컨 먹어 보 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코쟁이 선교사들이 유치원을 통하여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던 일, 죠시 뮬러가 고아원을 할 때 하나님이 공급하시던 강증문을 읽었을 때 감동받았던 일들이 결국 급식소를 열게 하였다.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시라 면 필요한 장비 살 돈과 쌀 살 돈을 주세요"라고 기도하였다. 그 때 하나님은 바로 응답을 주셨다. 이천성결교회의 이유덕 전도사가 그 해 전도왕으로 상을 받아서 해외여행을 하시게 되었는데 친분이 있 기 때문에 그에게로 오셨다. 이 전도사님은 오실 때 장비를 사고도 남을 헌금을 하여 주셔서 무료 어린이 급식소를 열였다. 50여명으로 시작한 급식소는 이제 300여명이 급식을 받고 있으며 이중 100여명 이 예배에 참석한다. 이 모든 경비는 우리 주님이 친히 귀한 신앙의 동역자들을 통하여 공급하신다.


3) <쿠바오> 교회
쿠바오 주택가에 사무실겸 손님 접대용으로 쓰일 방과 예배드릴 수 있는 홀이 있는 주택을 얻게 되었다. 그 홀에서 김광수 선교사 가 족과 필리핀인 형제들이 성경공부와 기도회로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에 의하여 1990년 7월 6일에 교회가 개 척되어 잘 성장하고 있다. 이제는 장년이 70여명으로 주일학교 어린 이가 100여명으로 늘었다. 이곳에서 제자훈련을 토요일 두 팀 주일에 두 팀을 시키고 있는데, 기간은 6개월이다. 그 후에는 이들이 한명을 제자를 삼아 제자훈련을 시킬 것이다. 재미있는 일은 그중의 한명이 독립 가톨릭 교회의 신부의 아들인데 주님의 크신 은혜에 감격하여 신학교에 들어갔고 신부인 아버지가 그의 학비를 대주고 계시다. 한 자매는 직장에서 장학금을 받아서 태국에 가서 대학원 코스를 마칠 수 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제자훈련 도중 깨달은 주님의 크신 사랑 에 감격하여 신학대학에 가기로 하였다. 이 교회는 전도, 새신장아육 (격주로 새신자 양육 서신을 보내고 있음)그리고 제자훈련을 통하여 성장시키고 있다. 성경읽기 운동과 금요철야기도회를(10:00-4:00) 통 하여 이들의 신앙은 매우 뜨겁다.


4) <쿠팡서문> 성결교회
쿠팡성결교회는 김상원 목사가 개척한 교회로서 서문성결교회(여진 헌 목사)의 지원을 받아 건물이 지어졌고, 잎금 사역하고 있는 바고 전도사가 성실히 일하고 있어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이 교회는 송 평구 선교사의 치리를 받고 있으며 성찬식과 세례식을 인도 하였다. 이 교회는 지붕과 바닥을 조금 수리할 필요가 있으며, 교인 모두가 하나가 되어 전도하는 일에 힘쓰고 있어서 어찌나 감사한지 주님께 영광만 돌린다.


5) <파식> 성결교회
송평구 목사가 개척한 파식성결교회(1990년 8월 26일)는 중산층의 사람들로 전도하기가 매우 어려운 대상들이지만 꾸준히 전도하여 잘 성장하고 있다. 교회 뒤에 있는 시티랜드 주거지는 380여 세대가 살 고있는 황금어장 아파트 단지이고 교회 앞에는 울트라 실내체육관이 있어서 파식 교회 신자들은 노방전도를 가끔 한다. 이 교회는 사모의 김치선교로 이웃이 사귀어지면 개인전도하는 방법으로 하나 둘 모아 진 신자들이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서 집집마다 매일 집어 넣 는다. 유명한 농구선수가 주님을 영접하고 생활이 변화되고 교회 봉 사도 많이 하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농구부를 만들어 어린이 사역을 그는 돕고 있다. 학생들을 위하여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기독교 비데오 필림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곳의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제자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하나님 모든 영광은 주님만이 받으소서.


6) 게스트 하우스
게스트 하우스를 열게 되었다. 선교여행 오시는 목사님들과 집사님 들이 나에게는 너무나 귀하신 분들이요 선교의 동역자들이시기 때문 에 게스트 하우스를 열었다. 호텔에 계시면 경비가 많이 나가고 김치 와 고추장이 없기 때문에 불편을 느끼시기 때문이다. 이곳은 감사헌 금으로 운영하기로 하였다.



■한국선교사들의 필리핀에서의 선교협력(박기호)


I. 일반개요
본 글에 있어 교회와 선교단체를 일반조직체의 하나로써 (Moberg 1984,16-22) 다룸을 여러 동료선교사에게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선교의 내용은 복음이다. 그러나 그 수행 과정은 경영에 속한 문제이다. Dale 이 말한 대로 ''''경영은 일을 맡은 자가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주어진 여건을 활용하는 기술과 그 과정 (1975,4)''''을 말한다. 그런데 영적인 일을 주업무로 하는 대부분의 선교사는 경영 기술을 배우지 못했거나 아니면 미숙하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이는 영적 문제와 경영 의 문제 둘 사이에 대한 갈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독실하다 고 하는 대부분의 교회지도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과학적인1) 경영방법보 다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러한 자세가 서구 합리론에 기초한 경 영론의 약점을 간파하는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러한 자세가 소극적인 면에서 오는 것도 사실이다. 영적인 일을 경영학적 인 방법으로 행함으로 따를 수 있는 영적 손실, 전통의 파괴, 목회자의 권 위 상실 및 제한 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계획과 조직이 없이 일을 시작하다 보니 일의 방향 상실, 지휘계통의 획일화 내지는 난무,그리고 이에 따르는 협력 체계의 불확실성이라는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평가체계 도 제대로 가출 수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행졍체계2)가 없었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서서 많은 선교사들과 단체들이 나름대로의 행정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사들과 단체들은 현지인과 행정체 제를 이루어나감에 있어 정해진 법과 규율을 제대로 지키기가 힘들다는 사 실을 경험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선교 경영의 제한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종교단체는 그 조직에 있어 들어오는 문과 나가는 문이 넓게 자유롭 게 열려있는 유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정해진 법과 규율을 강요하기 어렵다. 둘째, 선교사 자신이 이 필리핀 사회에서 결국은 조력자이고, 소수이고 아 웃사이더라는 사실 때문에 주도권을 잡고 일하기가 힘들다. 셋째, 이러한 샅왕에서 설상가상으로 자체 안에서는 (1) 선교사들이 단합 이 되지 못하고 (2) 개 선교사들의 분업화가 아닌 무제한적 활동범위, (3) 모든 선교사의 대등한 위치로서 지도 내지 지휘체제 빈곤,(4) 비전의 다양 성에 기인한 방향성 상살, (5) 각 선교사의 일에 대한 보상의 차이점 등 이 미 기존한 문제들이 있다.


더 나아가 선교사가 지니는 문제들은 이것들 뿐만 아니다. 곧 타문화 속의 경영에 관한 문제이다.선교사들이 마지막 극복하여야할 문제인 것이다. 한국선교사들은 상기 기록한 여러가지 문제 가운데서도 자기 형정적 정 립을 위하여 자신들이 세운 것일짜라도 그 행정체계를 열심히 자신부터 지 켜 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 행정체제가 타문화권 가운데 효율적으로 운 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때로는 자신의 성실성을 의심하여 보기 도 하고, 자신의 헌신도와 희생도 까지 살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 정체제에서 무엇인가 겉도는 것이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 Mary Parker Follett는 어떠한 행정체계든지 그 죄직체의 사 회심리를 고려치 않고 효율성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하였다 (kast & et al.1974,60). 곧 함께 일하는 현지인의 사회심리를 고려치 못한 행정체제는 비효율적이란 말이다. 즉, 윗사람의 권위에 대한 인정, 협력체제의 효율성, 멤버들의 단결성, 보다 낳은 행정체제를 위한 원리등은 그 조직체의 인간관 계(Nature of Human Relationship)와 조직체 속의 행동양식(Organizational Behaviour)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직장사회 속에 서 윗사람과 아랫사람과의 관계는 필리핀 직장사회에서의 그것과 다르다.따 라서 윗사람의 권위에 대한 하급직원의 인식과 인정도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이론에 따르면 경영자로서의 선교사의 임무는 자기가 만든 법을 지키는 단순한 법관처럼 고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고 그 차원에서 이끌어가는 지도라나느 것이다. 따라서 그의 경영자로서의 선교사 는 그의 임무를 수행키 위하여 같이 일하는 자들의 필요, 염원,심리상태, 인간관계 등을 이해하고 동기부여하는 임무가 있는 것이다. 이는 주어진 일 의 선교사(경영인)가 아니라 현지인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Franco ed 1988.52). 경영학에서는 이러한 上記의 경영론을 인간행동학파(human Behavior School)이라고 부른다 3). 또한 이러한 연구는 사회심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회심리학의 일부분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따라서 연구대상은 개인의 행동에 연구 촛점이 맞춰진다. 이 학파는 더 나아가 인간 개인행동 에 대한 연구 뿐만 아니라 그룹행동양태까지 연구할 수 있는 면으로 까지 발전하였다(같은 책 52). 이러한 연유에서 조직행동(Organizational behavior)연구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연구방법의 성격은 타 문화권에서 선교사나 선교단체의 경영을 연구하는 좋은 모델이 되어진다.


1) 이러한 생각은 Frederick W,Taylor (1856-1915)의 ''''과학적인 경영''''에서 볼 수 있다. 일을 맡은 개인은 (전체의 한 부품으로써) 그 일에 적절한 사 람이어야 하는데(Seclect the right man for the job), 그 일을 행함에 있 어 오직 최선의 방법은 하나 밖에 존재치 않는다. 최선의 힘을 발휘 시키기 위하여 적절한 사간, 기구, 적절한 보상 스케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 다(Kelly 1974,11 ).


2) 이러한 필요를 Henri Fayol은 1916년에 유럽에서 발표하면서 14가지 원 리가 있다고 하였다. 일의 전문성에 따른 분업화, 권한과 책임, 책벌, 상하 구조의 확립(일에 대한 지휘는 반드시 윗사람에게만), 일의 목표의 통일성, 개인의 이익에 대한 단체이익의 우선권, 보상의 일치성, 기구의 전문성, 지 휘체계의 통일성, 각 개인의 위치의 명확화, 공평성(평등성과 공의가 다스 려지는), 직무에 대한 임기, 자발성, 팀윅 정신 등이다.


3) 이러한 학파를 이루는데는 Maye and Roethlisberger(1933)을 선두로 하 여 Whyte (1956),MacGregor(1960),그리고 Likert (1961)등이 크게 공헌하였 다.



II. 필리핀 문화속의 경영


A. 경영과 문화
경영은 주어진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주어진 여건 속에서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다. 이전에는 여건을 시간,물질, 작업환경을 주로 생각하여 왔다. 그 러나 중국 여건을 활용하는 것은 일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인간을 어떻게 다루는가가 경영학의 주안점이 된 것이다. 만일 "사람"이 강조되어지지 않 는 기구는 Bennis의 "사람없는 機構"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 서 최근 경영 이론에서 가장 관심 있게 다루는 분야는 "문화로의/속의 경 영"(Management by Culture:MBC)이다. 여기에서 "문화"라고 할때,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무엇이 문화이고 무엇이 문화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문화는 한 개인 혹은 소수의 특이성이 나 미성숙성 혹은 과오를 문화라고 하지 않는다. 문화는 살아가는 방법론의 보편성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상성도 동반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그 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문화라고 하지 않고, 그 행동이 그 그룹의 사람들 이 염원하는 이상적인 가치, 규범, 행동양식에 기초하여야만 한다는 것이 다. 그려하여야 하는 또 다른 하나는 "경영"이라고 할 때 경영은 인간을 교육 시키는 것(educating)이 주 목적이 아니라 있는 인간을 이끌어 가는 것 (leading)임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따라서 선교사는 일을 문화 가운데 수 행함에 있어 그 문화 속에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다. 현지 사역자는 동시 에 자신의 미숙함, 취향, 그리고 과실을 자신의 문화라고 전가시킴으로 자 신의 행동을 합리화시켜서도 아니된다.



B. 필리핀 문화 속의 한국선교사의 경영
타문화권에서의 경영의 현장은 두문화 혹은 그 이상의 문화가 만나 문화변 혁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현지인은 현지인 대로 그들의 자라면서 축적되 어진 모든 경험과 가치관을 가지고 경영의 현장으로 들어온다. 선교사 역시 또한 선교지로 올 때 지금까지 배워온 일을 처리하는 방법과 판단 기준을 가지고 선교지에 들어와 적용하려는 장소인 것이다. 그러나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같은 농경문화를 지닌 아시아인으로, 혹은 서구 교육을 받은 자들로서 때로는 공통된 견해나 일의 방법론을 채택하기도 한다. 그러 나 이러한 공통점은 빙산의 일각이다. 잠겨져 있는 그들의 세계를 이루는 기축은 전혀 상이한 기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이러한 차이점 가운데서 선교사는 자신의 세계를 보다 낳은 경영방법, 행정체제라고 강조하기 쉽다. 물론 현지인도 그들의 경험과 세계를 강조한다. 그런데 문제는 선교사의 방식은 그것이 우주적이지 않는 한 손님의 것이라 는 현지인의 것은 이 땅의 주인의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똑 같이 어떠한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현지인의 것을 채택하여야만 한다.혹 그 이루는 속도가 느릴찌라도 그러할 것이다. 때로는 합리적이 아니라 느껴 져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선교사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한가?



1. 엘리트로서의 선교사의 경영
한국선교사는 일반적으로 고등교육을 받고 부임한 자들이다.따라서 그들의 교육적 배경을 살펴보면 상당히 합리적, 경험적, 그리고 개인의 능력을 강 조하는 타입이다. 그런데 필리핀에서 함계 사역하는 필리핀들은 주로 직관 적이고 감각적이며, 서로 의존적인 삶을 살아오고 그룹연대 의식이 강한 자 들이다. 이 둘 사이에서 선교사는 대부분 경영인의 자세를 취하게 되고 필 리핀 사역자들이나 교인들은 단순 노동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특히 서 구교육을 많이 받거나 서구 사회에 많이 적응되어진 선교사들 가운데 이러 한 현상을 자주 보게 된다. 이 둘 사이의 갈등은 한 선교단체나 교회의 지 향하는 목표에 대한 인식차이(perceptions), 기대차이(expectations), 판단 차이(Judgements)에서 다르게 나타나게 되고, 일을 수행하는 윤리적인 면에 서는 자세(attitudes), 감각(sentiments),그리고 행동양식(behavior) 에서 차이가 난다. 이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                 +---------+                                   +----+
| 선  |--인식----> | 선교단체|   <-------인식---------| 현 |
|      |                  |    혹은   |                                   | 지 |
| 교  +--기대----> |  교회의  |   <-------기대---------| 사 |
|      |                  |    목표   |                                   | 역 |
| 사  |--자세----> |             |   <-------자세---------| 자 |
+----+                 +---------+                                   +----+
2.경영주로서의 파송단체와 선교사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는 대부분 경영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주된 동기는 목표 지향적이기(objective)쉽고,현지인들과 만나지 않기 때문 에 자연히 비인간적인 관계(Impersonal)속에서 생각하기 쉬우며, 소속된 개 인의 감정보다 기구의 효과적인 사용(Organizational)을 강조하게 되는 것 이다. 따라서 그들의 충성심은 사람에게 있는 것 보다 기구(선교단체 내지 조직화된 교회)에 있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파송단체를 배경으로 일하는 선교사는 현지 사역자 혹은 교인들의 주관적이고(Subjective),인간적이고 (Personal) 가족적인(Familial)행동자세와 상충작용을 갖게 된다. 심지어 상당히 오래된 선교사임에도 한국 파송단체의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기가 쉽 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3. 두 문화 틀에 긴 필리핀 사역자의 고민
필리핀 사역자의 고민은 두 가지 면에서 볼 수 있다. 첫째, 그 자신이 엘 리트 선교사나 경영주 같은 파송단체의 문화와 다른 배경에서 성장했기에 목표 위주의 선교르리 하는 선교사와 이에 따라 가는 자신을 볼 때 비성경 적인 행동같이 여겨지며 혹은 자신의 인간성을 팔아먹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두번째로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전통적인 필리 핀 가치관 속에 살아가고 있는 대중의 문화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필리핀 사역자가 목사 혹은 전도사로 일할 때 선교사와 교인 사이에 샌드위 치가 되어진다는 사실이다. 물론 때로는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를 도와 하나 가 되려는 노력보다 이러한 것을 은근히 이용하여 교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이끌어 가고 선교사를 격리시키는 경우도 있다.



4. 두 문화의 갈등의 표면화
이러한 갈등은 세가지 차원에서 드러난다. 첫번째 차원은 가치관, 규범, 신앙아, 이데오르기, 지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이러한 영역은 서 로 깊이 대화를 나누기 전에는 서로의 이해가 불가능 한고로 대부분 가리운 체로 남아있게 된다. 두 번째 차원은 공간관, 시간관의 다른 이해, 대화의 방법,그리고 아이디어와 행동 혹은 목적에 대한 의미를 달리한다. 세번째 차원은 언어 행동양식, 그리고 조직체의 인식되어진 목표를 달리한다.


+---------------------------------+
|가치관, 규범, 신앙, 이데오르기, 지식| 대부분의 선교사에게 들어나지 않은 부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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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공간관, 시간관                   | 약간의 선교사가 차이점을 인식하고 있음.
+-------------+------------------+ 
                     |
+-------------+------------------+
|     언어,행동양식,조직체의 목표     | 많은 선교사가 겉으로 들어난 부분을 인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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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선교 단체 문화변혁의 제단계
한국 선교단체는 선교사의 문화가 주도하는 단계, 선교사와 현지인의 문화 가 공존하는 단계, 그리고 현지인의 문화가 기초가 되어진 단계로 나뉘어 생각할 수 있다. 첫번째 단계에 있는 선교단체는 ''''어쩔 수 없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둘째 단계에 있는 선교단체는 "골치가 아프다" 고 한다. 세 번째 단계는 "허"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이 한국문화이고 경영방식이고 무엇이 필리핀 문화이고 그 경영방시인지 구분하여야 할 필요 가 있다. 이는 이 모든 단계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자신의 미완숙, 자기 취 향 및 이권, 그리고 과실을 자신의 문화라는 면으로 변명 내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D. 한국 문화와 경영
한국인들의 현대 사회는 급격히 변화하여 이제는 한국 선교사 가운데에서 도 전통적인 한국문화속에 살지 않았던 자들이 있음도 사실이다. 필리핀에 서의 한국선교사의 모임에는 아직도 그 문화가 존재하는 편이지만 필리핀인 들과 일함에 있어 한국문화를 적용하기보다 서구문화를 적용하는 편이 훨씬 용이한 자들이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은 소수이고 또한 한국 사회가 변화하는 과정 중에 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가치를 무시 할 수 없 는 것이 보편적인지라 한국인의 전통적 문화를 다룸을 한국선교사들의 경영 방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첫째, 한국 문화와 경영을 논할 때 유교적 가치를 벗어나 생각할 수 없다. 유교의 근본 원리는 우주는 일정한 위치가 있고, 각 위치는 일정한 관계양 식을 가지며, 그 관계는 예로서 표현된다고 하였다(금장태(1987,19) 따라서 관계는 단일적인 양식을 가지며 직선저이고 다면적인 성격이 아니다. 일어 한 기초에서는 가족의 구조가 가부장적인 사회가 되어진다. 외가를 배제한 상태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직선적이고 기능적이거나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성격으로 분석되어질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은 아 버지와 아들로서의 혈연적 관계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 속에 자란 인간이 운영하는 회사의 상사와 부하의 관 계도 직선적이고 단일적이다. 부하가 더 많이 알고 능력이 있다하여 그 관 계가 변화되어지거나 퇴색되어질 수 없다. 이러한 사회의 조직체 속에서 살 아가는 규범으로는 충성, 신의,명분,분수,자리,서열,체면,체통,보은 등이 다. 이러한 가치가 일반 사회뿐만 아니라 일하는 직장 속에서 통용된다는 점에 있어 한국문화를 벗어난 경영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어느 한 국 사회의 어떤 단체이든 프린트화 되어진 규칙보다 내적으로 작용하는 규 범이 훨씬 실질적인 운영체제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문화에 익숙한 한국선교사들은 선교단체와 교회에서 은연 중 서열 을 중요시하게 되고 자리를 기능과 혼동하기도 하며 실질적 운영 보다 모양 시라는 말로 명분을 찾기도 한다. 현지인들에게 순수한 도움 보다 오히려 충성을 요구하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신의가 없다고 생각도 한다. 필리핀 사역자가 자기 뜻 보다 더 큰 뜻을 보이면 분수를 모른다고도 하며, 일의 량보다 훨씬 큰 자리와 타이틀을 차지하고 만족하기도 한다. 한국명함에 전 총회장의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이리라.


둘째, 유교적 문화권에 기초한 한국 사회구조는 영역불침권이다. 특히 대 등한 관계와 아래위치가 위의 위치의 일과 결정에 대하여 어떠한 형태로든 부자유친이라는 말 등이 가장 핵심적으로 말하는 점은 둘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하는 신하로서 일하면 될 뿐이지 결코 왕의 입장이 되어 서는 아니된다는 말이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남편은 안살 림에 대하여, 부인은 바깥 일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면 그 관계의 도리를 벗 어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회사에서 각 부서와의 관계 그리고 상급기관이나 상급자에 대한 하급 위치에 속한 기관 과 사람의 취할 태도이다.


셋째, 한국사회에는 안 사회와 바깥 사회 사이에 분명한 틀이 있다. 그리 고 그 관계는 바깥사회는 안 사회에 우선한다. 이 관계는 가정과 직장의 나라 없이는 가정도 없다는 논리 하에 왕의 우선권, 곧 바깥 사회의 위치를 안 사회 보다 우선적으로 놓고 있다.이러함으로 인하여 바깥 사회는 실제적 인 면에서 안 사회의 희생을 많이 강요하여 왔다. 곧 바깥 사회의 안 사회 의 침투이다. 전술한 유교적 규범이 바깥 사회의 조직에 따라 적용되어지고 그것이 가정에까지 물고 들어온다. 따라서 남편의 사회적 위치가 아내의 위 치를 강요하기도 한다. 그리고 남편의 일을 위하여 가정이 희생되는 것은 보편적 가치로 안다.


넷째, 유교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놀이 보다 일을 강조하는 사회가 되었다. 원래의 유교의 가르침은 이 둘 사이의 조화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재 적 삶에 있어서는 한국의 근대화 정신과 함께 일을 강조하는 가치를 갖게 되었다. 물론 관료적 유교 정신이 약한 농경사회에서는 놀이와 일이 적절히 조화되거나 하나로 융화되어있음을 본다. 이러한 3교를 포함하는 한국인의 풍류 도에 잘 나타난다. 이러한 이러한 정신이 형태로 드러남은 "감""짓" "꼴" 등에서도 볼 수 있다(김상일,1983,83) . 그러나 조선 사회 후기에 형 식적인 유교논리가 팽배하면서 인간의 놀이에 대한 가치가 근면이라는 가치 에 눌려 근대화 과정 속에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불교의 가르침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사회를 바라봄에 있 어 유희적인 성격을 상실한 인생관을 진지한 생의 자세를 갖게 하였다.



E. 필리핀 문화와 경영
필리핀 사회에서의 경영을 논할 때 그들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자 세한 것은 필리핀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관한 책을 참조하기 바라낟. 더 나 아가 필리핀 사회는 북쪽 산지족 남쪽 평지족 그리고 모슬렘의 사회등 세 가지 혹은 더이상 많은 지역별로 나누어 고찰하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는 이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각기 고유의 틀에 기초하여 있기에 그 문화 가 같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한점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로손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문화를 필리핀 문화라고 정의하고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필리핀 사회는 조상 중심에 기초한 가족이라기 보다 가족 구성원 각 개인에 기초한 가족이다(Kihuchi 1982,10).따라서 이러한 가족구조는 폭넓 은 가족사회, 친족사회 그리고 권위가 아니라 공동체의 관계성에서 오는 권 위이다.


둘째, 필리핀 공동체의 체제는 단일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친가와 모가 의 양가에 기초한 가족사회, 친족사회를 형성케 하고 더 나아가 연장된 가 족(대부,대모 등으로) 및 친구(balgada) 그룹으로 이루어져 더 다면적인 성 겨을 보이고 있다.따라서 이러한 다면적 공동체 사회에서는 그 구성체 관게 에서 일직선적인 상하관계로 나타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깊고 낮은 정도에 따라 그 사람의 위치가 달라진다(Jocano 1983,51).


셋째, 이러한 형태의 사회 속에서는 살아가는 자세는 민감함(Sensitivity) 상호성(Recipriocity) 그리고 집단성(Collectivity) 이다. 부언하면 민감함 상호성을 가지고 집단의 일원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이 필리핀 사회에서 일 하고 살아가기 힘들다는 말이다.


넷째, 이러한 관계 중심 사회에서 갖는 사회적 의무는 인간적 관계 (Personalized relationship). 친지에 대한 의무(Kinship Obligation)그리 고 인간적 충성심(personal Loyality)이다. 따라서 인간적 유대관계의 맥이 단절되면 그 그룹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난다. 따라서 어떠한 조직체에서든지 그 맴버쉽에 대한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단일성(가 부장적) 문화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이다(Kikuchi 1983.13).


다섯째, 인간관계는 단체의 정해진 법이나 규율을 대치하며, 친지에 대한 의무는 자신이 그 기구에 대한 의무 보다 우선이 되어지고 충성심은 개인이 나 일하는 기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과의 관계에 있다. 곧 가족사회, 혈연사회 그리고 발가다(동료)사회에 대한 집단에 대한 충성이거나 아니면 이러한 집단의 구성원의 관계의 핵을 이루는 사람에게 충성심을 둔다.


여섯째, 따라서 필리핀 사회 속의 조직체는 온정주의(Pateralism)가족주의 (Familism)인격주의(Personalism)로 상호관계 속에 움직여진다. 윗 상관은 아버지와 같이 직장 동료는 가족구성원과 같이 그리고 그 관게는 자신이 중 심으로 한 인격적 인간관계의 형태이다.


일곱째, 이렇게 움직이는 조직체 속에서 갖는 규범은(1) Hiya(수치), Amor Porpio(자긍심), Delicadeza(민감함),Awa(불쌍히 여김)라는 것으로 한마디 로 이야기하면 객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다. 이는 필리핀인은 세계를 인식할 때 느낌(Damdamin)으로 하기 때문이다. (2) 필리핀인이 갖는 명예와 불명예는 자신이 책임(Bahala), 존경(galang), 그리고 속으로 진 빚(Utang-na-loob)에 대한 보은을 잘했는가 하지 못했는 가로 정해진다. 그리고 동료와의 관계 속에 일하는 자세는 함께 (pakikisama),적응성 혹은 겸손 (pakikitungo) 연민(pakikiramay)인데 그 기초는 같은 운명을 지고 가는 사람은 모두 동료(Kapwa)라는 가치체게에서 기인한다.


여덟째, 필리핀 사람은 가정과 일터의 명확한 구분을 두지 않는다. 직장에 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직장의 인간관계를 모두 가족화 시켜 놓는다. 그들이 호칭을 보라.서로 모두 형, 누나,동생,아줌마,아저씨,아빠,딸 등으로 다 변 화시켜 놓는다.


아홉째 일과 놀이의 구분이 명확히 없다. 일터가 돈을 수입의 근원이라는 사실만으로는 필리핀 일꾼들은 만족치 않는다. 동료관계를 통하여 반절은 일하고 반절은 인간관계를 즐기는 터전인 것이다.


열 번째, 일의 진지함은 필리핀에게는 긴장으로 받아드려지게 된다. 이를 깨뜨리기 위하여 농담을 즐기는데 이는 일의 신실성이나 진지함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일의 탄력이 너무 경직화되는 것을 완화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열한 번째, 필리핀인들은 그들의 세계관인 신적세계관에 그들의 삶이 기초 하여 있기에 인간사에 신적 개입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 다. 따라서 그들의 최종 경영은 신의 축복에 (Swerte) 있다.



F. 경영에 있어 한국문화와 필리핀 문화의 비교
지금까지 경영을 위한 한국과 필리핀 전반을 비교하건데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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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      목     |       한   국   문   화      |             필 리 핀 문 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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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구조      | 일직선의사회,위치강조  |      공동체사회,관계성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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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에대한자세 |   직장과 가정의분리      |       가정의 연장으로 직장      |
|                       |         직장우선             |                가정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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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과놀이의관계 |  엄격한 분리, 일에 대한 |   혼합, 긴장해소로서의 농담   |
|                       |         진지함 요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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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의 목표      |      출세지향>행복도     |         행복도>출세지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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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범         |   신의,명분,체면,사리    | Hiya,Amor Propio Delicadeza|
|                       |     순리,본분,보은         | Awa,Bahala,Galang,Utang na|
|                       |                                  | loo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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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동료관계   |   서열,체통,분수,절대    | Pakikisama,pakikitungo        |
|                       |   복종                         | Pakikiram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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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체제       |       합리성 感              | Damdam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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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성           |   조직체에 대한 충성     | 인간관계에 대한 충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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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임감         |   변명조건 없는 성취     | 환경에 의한 고려 요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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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의 수행방법  |   자신의 일은 자신이     | 상담,상담을 통한 협력요구     |
|                       |   책임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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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의 결과      |   상사의 책임과 명예     |    당사자와 주변인의 책임과   |
|                       |                                  |    명예분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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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필리핀의 사회구조,가치관,규범,직장에 대한 자세 등 이러한 것들 대문에 일의 능률이 저하되는가? 일은 반드시 소위 말하는 사무적으로 정해 진 규율과 법이 엄격히 지켜질 때만 가장 효율적으로 이뤄지는가? 혹자 말 하듯 필리핀의 안면문화(Hiya culture)와 인간관계에 기초된 사회운영 (Personalized Office Work)때문에 혹은 운명론적 자세(Bahala na) 때문에 일이 신속히 정확히 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모든 문화는 중립적인 존재로, 필리핀 문화를 잘 사용하면 오히려 같이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더 깊은 충성심과 열성을 이끌어 낼 수 있고 잘못하면 오히려 회사나 단체의 법은 지키되 형식적이거나 피상적인 차원에사만 그러할 뿐이 며, 안으로는 자기 문화 속에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가족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자신이 일하는 곳을 이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문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동안 한국의 유교적 관료적 풍토때문에 서 구와 같은 일의 효율성을 달성할 수 없다고 한국문화를 비판한 자들이 있었 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신바람’ ‘흥’ ‘신명 들려야’등의 한국적 세게에 대한 자세를 들어 한국경제의 발전이 더 가속화되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문제는 정도의 문제이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실 이 러한 것은 서구의 경영론이 적게 영향을 미친 한국의 예술가 집단이나 농어 민집단에서는 고대로 부터 사용되어지고 입증되어진 것이다.


G. 경영문화의 선택 폭과 방법
그러면 이와같은 두 문화 속에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떠한 것이 있는 가?
(1) 완전 한국적 경영 (2) 서구방법을 보편적 경영론으로 사용하는 방법 (3) 한국, 필리핀, 서구 것을 공용하는 방법 (4) 한국과 필리핀문화를 같이 공유하는 방법 (5) 필리핀 문화를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다섯가지 방법은 (1) 한국인과 필리핀인과의 필리 핀의 문화적 배경 (3) 외부작업환경의 문화와의 관꼐에 의하여 결정된다. 예를 들면 선교사들이 만나고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기간이 장기간이 고 선교사나 현지인의 문화적 배경이 서구적인 경영론에 영향이 적은 쪽이 고 더 나아가 외부 연결문화가 필리핀사람이라는 개방체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를 들면 국제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폐쇄체지로서 필리핀 사람 의 문화를 의식할 필요가 적다. 단기 선교를 위한 사람이 필리핀 문화에 적 응하여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장기적 사역을 생각하는 사람은 필리핀 문화를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필리핀인의 문화적인 배경도 살펴보아야 한 다.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이거나 외부문화에 경험이 많은 자와 적은 자에 따라 사용할 문화를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섯가지의 형태로 문화를 선택할 수 있지만 문화가 다양하 면 다양할수록 일의 양상은 복잡하여지고 대화의 형태가 명확하지 않으며, 일의 진행이 고정적 흐름을 갖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필자는 이러 한 5가지 방법을 놓고 각자의 현재 경영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 기를 권하는 바이다.



F. 필리핀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은 경영에 있어 필수적이다. 물론 선교사가 이러한 기 술을 습득케 위해서 자기와 함께 일하고 있는 필리핀 사람의 세계관과 가치 관을 살펴보야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말만 잘한다고 하여 커뮤니케이션을 잘한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의 행동언어, 심리언어까지 읽을줄 알아야 한다. 본고에서는 지면상 경영에 꼭 필요한 한가지만 살펴보자. 필리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은 3단계에 의하여 이루는 편이 좋다(Jocano 1990,42). 첫 단계는 먼저 힌트를 주는 것(pahiwatig)이다. 직접적으로 이 야기하지 않는 필리핀에게는 먼저 한국말로 표현하자면 "운을 띤다"는 것은 중요하다. 운을 띄우는 좋은 방법으로는 "숲속에서 헤매는 것''''과 같이 하면 된다. 그러면 필리핀인은 이미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설령 서로의 의견 이 다를지라도 무마되어질 수 있는 상당한 여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단계는 서로의 동의의 단계에 이르는 것(pabatid)이다. 세번째 단계 로는 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것이다(pahayag). 예를 들자, 상사가 직원에 게 잘못을 지적하거나, 남의 집 정원에서 장미꽃 한 송이를 얻기 위하거나, 총각이 처녀에게 사랑을 구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필리핀인의 바디랭귀지와 싸인랭귀지를 읽을 줄 알 아야 한다(see Andres,Philippine Values Digest.Vol.VII) 이에 대한 자세 한 것은 차후에 생각해 보도록 하고 여기에 중요한 것은 필피핀 사람이 입 을 다물고 있다고 하여서 그것이 일에 대한 관심이 없다거나 아니면 무조건 동의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필리핀에서 일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의하는 것이다. 상의하고 협력을 구하고 아니면 졸라서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의 동의를 얻은 후에 일을 시작하여야 선교사가 먼저 일을 계획하여 놓고 통보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 다.


G. 기타 경영의 관한 방법들
1. 필리핀인을 혼낼 때 대중 앞에서 하지 말고, 먼저 일의 규칙이나 업무 에 대한 책임을 상기시키라. 다음은 조언을 하고 다음은 꾸짖고 (둘 사이에 서만),다음은 종이에 써서 경고하고 그래도 듣지 않을 경우에는... 2.포상을 할 때도 단지 서류 상으로 그치지 말고 가족 혹은 친지와 나눌 수 있거나 자랑할 수 있는 것으로 상을 주어라. 그리하면 필리핀 일꾼의 내 적 충성심이 더 고무되며 그 단체에서 빚진 기분으로 일할 것이다. 가령 쌀, 설탕,건강식품 자녀를 위한 학용품 등... 3. 일의 업무분담이 좀 넓고 두루뭉실한 편이 때로는 유익하다. 동기유발 만 되면 여러 가지 면에서 더 자발적인고 효율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III. 마치는 말
필리핀 문화 속에 경영을 논함은 그 끝을 다할 수 없다. 이는 필리핀 문화 는 연구 대상마다 다르고(church 1986.19-26)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역 동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같은 책) 이런 면에서 현대사회의 변화는 전통문 화를 연구하는 자를 당황하게 한다. 따라서 이에 관한 것은 다음 연구자의 주어진 사명이다. 또한 경영은 그 규모의 크기와 목적, 그리고 구조에 따라 연구의 주제를 달리하게 만든다. 이점도 여기에서 다루지 못하였다. 필리핀 사회의 문화로 그 신적 세계관에 경영에 끼치는 관계도 또한 다루지 못하였 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다만 문화에 대한 필요와 기초적 자료만을 공급 하고 마친다는 기분을 벗어나기 어렵다. 각자 사역 터에서 이에 대한 관심 이 더 커지길 바란다. 논고의 요점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문화에 의한 경영이란 같은 문화의 물 속에서 경여자와 일꾼이 함게 물줄기를 따라 자연스럽게 수영하는 것이다. 수용할 때 물살을 거슬리면 더 많은 힘이 소비된다. 많은 동료들과 함께 숭 영함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낙이다. 경영하는 자들이 갖는 기쁨은 바로 이와 같은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