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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단강마을 한희철 목사의 '작은 교회 이야기'

전동키호테 2012. 1. 13. 21:59

강원도 단강마을 한희철 목사의 '작은 교회 이야기'
새참 거르고 흙투성이 예배… 소박했던 따뜻한 일상 담겨

"광철씨가 늦게야 내려왔다. 꽃과 비닐봉지가 손에 들려 있었다. (…) '하나님, 일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농사철이 되어서 으트게 바쁜지 죄송합니다. 저는 가진 게 없어 헌금도 못내고 죄송합니다. 그래서 오늘 꽃하구 호박 가져왔습니다.'"(191호·1991년 3월 17일)

1987년 감신대를 졸업한 28세 도시 청년 한희철(53) 목사가 처음 부임한 곳은 강원도 원주군(현재 원주시) 부론면 단강마을이었다. 마을 주민은 150여명, 교회 건물은 물론 사택도 없었다. 잎담배 널어 말리던 흙집 방에서 십자가도 없이 첫 예배를 드렸다. 2001년 이 교회를 떠날 때까지 15년간 매주 손글씨 주보를 700여회 펴냈다. 이달 초 한 목사가 펴낸 책 '작은교회 이야기'(포이에마)에는 남편의 노트 필기를 부인 강은미(50)씨가 정성스레 옮겨 적은 손글씨 주보가 그대로 실렸다. 대도시 큰 교회에선 보기 어려운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글들이다.

한희철 목사가 첫 임지였던 강원도 원주 산골마을 단강교회에서 손 글씨로 만들었던 주보를 펼쳐보이고 있다. /김용국 기자 young@chosun.com

현재 담임하고 있는 경기도 부천 성지교회에서 만난 한 목사는 "여느 농촌마을처럼 단강마을에도 노인들만 남아, 남는 것도 없는 농사를 계속 짓고 있었다. 누군가와 나누는 이야기 속에 슬픔을 이길 힘이 있다고 믿고, 주보 제호를 '얘기 마을'로 지었었다"고 했다.

일요일 오전 10시 시작되는 단강교회 예배는 마을 사람들에겐 새참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새참을 거르고 흙투성이가 된 채로 뛰어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가물다가 비가 온 날, 밤늦게까지 밀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을 사람들을 본 뒤엔 매일 5시에 울리던 새벽기도 종을 치지 못하기도 했다.

한 목사는 고교를 나온 뒤 농공단지에 취직한 복순이에게 "꿈을 포기하기엔 네겐 아직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한다.(306호) 그칠 줄 모르는 장마, 빗속 수요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 이젠 비가 너무 오셔서 걱정입니다. 비 좀 고만 오시게 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고 기도하는 걸 들으며 '하나님도 지그시 웃으시겠지'라고 생각한다.(708호) 자꾸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모시고 간 김 할머니는 당근 판 돈 14만원 중에 십일조 2만원을 구별해 젊은 목사에게 건넨다. 소박하지만 깊은 농촌 마을 사람들의 일상과 믿음이 때론 웃음나고, 때론 눈물겹다.

한 목사는 단강마을에서 세 아이를 키우며 단강초등학교 학교운영위원장도 여러 해 맡았다. 전교생 24명과 교사들까지 다 함께 미국으로 수학여행갔던 일은 잊을 수 없는 '기적'이었다. "학생이 계속 줄어, 학교 문을 닫기 전에 아이들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지 보여주고 싶었지요."

여행경비 마련을 위해 아이들은 개울을 청소해 나온 고물을 팔았고, 마을 어른이 내준 밭을 온동네 사람들이 함께 갈아 보리를 길렀다. 열흘간 미국에 가서 미국 아이들과 함께 수업도 받아 보고, 태권도 시범을 했고 귀국보고회도 열었다.

한 목사는 이북 출신 아버지 묘소도 1999년 단강마을 뒷산에 모셨다. 2001년 단강마을을 떠났지만 한 목사는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단강마을 논을 빌려 성지교회 아이들 40~50명과 함께 가서 직접 볍씨를 담그고, 손으로 모를 내고, 가을이면 낫으로 수확도 한다. "멧돼지나 태풍 피해로 쌀 한두 말도 못 거둔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작년엔 다섯 말을 거뒀습니다. 성탄절 떡을 만들어 교인과 이웃들이 나눠 먹었어요."

한 목사는 "단강은 작은 마을이 아니었다. 내게 농촌 전체를 일으킬 힘은 없지만, 단강이 희망을 되찾으면 농촌 전체가 희망을 되찾는다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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