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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_‘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전동키호테 2009. 12. 31. 09:10

개그콘서트‘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3인과 ‘술푸며’인터뷰

‘개그콘서트’ 화제 코너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의 박성광·허안나·이광섭(왼쪽부터). 물오른 취객 연기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유쾌하게 꼬집고 있다. 2009년을 이틀 남겨둔 29일 밤 서울 여의도의 한 호프집에서 올해를 돌아보는 ‘술푼 인터뷰’에 응했다. [안성식 기자]

술은 사람의 말을 술술 흐르게 한다. 취기가 슬금슬금 번지면 우리 안에 잠자던 말이 줄줄 나온다. 한 해를 갈무리하는 세밑이라면, 특히 그런 술 한 잔이 그립다. 술잔에 기대어 팍팍한 세상에 한바탕 욕을 퍼붓거나, 한 해 동안 묵혔던 말을 내지르다 보면 그렇게 또 한 해가 저문다.

술 한 잔이 그리운 세밑. 불쑥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매주 술에 취해 비틀대는 모습으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외치는 이들이다. 실감나는 취객 연기를 펼치며 “국가가 해준 게 뭔데”라는 말로 통쾌한 웃음을 날리는 개그맨들. KBS-2TV ‘개그콘서트’ 화제 코너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의 이광섭(29)·박성광(28)·허안나(25) 세 주인공 얘기다.

이 코너는 순경(이광섭)에게 끌려온 남(박성광)·여(허안나) 취객이 벌이는 해프닝을 담았다. 여느 술자리에서나 접할 수 있는 흔한 풍경이 개그로 펼쳐진다. 술 취한 남자는 각박한 세상에 분노한다. “1등만 부자 되고 1등만 땅 사는 더러운 세상, 근데 강부자씨는 뭔 강을 사서 부자가 됐대?”

여자는 아이돌 그룹의 광팬이다. 혀가 꼬일 대로 꼬인 여자가 말한다. “재범 오빠 돌아와. 오빠 없는 2PM은 한 시 오십 구분.” 이어진 남자의 대사 “아이돌만 대우받는 더러운 세상!” 킥킥 웃음이 터지지만 어쩐지 묘한 여운이 남는다.

알아챘겠지만, 코너의 제목은 서로 다른 의미를 두어 번 덧칠한 것이다. ‘술푸게’라는 말엔 ‘슬프게’라는 뜻이 겹쳐있다. ‘나를 슬프게 해서 술을 푸게 하는 세상’이란 뜻이다. 하긴 이 땅의 장삼이사치고 “더러운 세상”을 푸념하며 술을 푼 기억이 없는 이가 있을까. 그러니 개그로 꾸며진 취객의 넋두리에 우리의 익숙한 경험을 포갤 수밖에 없다. 말들의 장난이 판치는 개그 무대에서 이들의 반들반들한 풍자 개그가 돋보이는 건 그래서다.

문득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을 통쾌하게 꼬집는 이들과의 술 한잔이 궁금했다. ‘개콘’에서처럼 “더러운 세상”을 외치며 술이나 한 잔 권할 요량이었다. 더불어 세밑 개그맨들의 속내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술 한 잔 부딪히기로 했다. 이광섭·박성광·허안나 세 주인공을 29일 밤 서울 여의도의 한 호프집에서 만났다.

“셋 다 술은 꽤 하는 편이에요. 술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취객을 내세운 콩트를 떠올리게 됐죠. 술자리만큼 솔직하고 유쾌한 자리도 없잖아요.”(광섭)


예상했던 대로 세 명 모두 ‘주당’이었다. 성광은 폭탄주를 즐긴다고 했고, 안나는 소주 두 병은 거뜬하다고 했다. 광섭은 전날 새벽 5시까지 술을 푼 상태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들의 물오른 취객 연기는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죄다 본인의 경험이거나 다른 취객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인 듯했다. 특히 온 얼굴을 무너뜨리는 안나의 명품 취객 연기는 “성장기를 통해 익힌 것”이라고 했다. 가만, 사춘기에 술 취한 연기를 익혔다고?

“실은 엄마께서 술을 무지 좋아하세요. 어릴 때부터 술 취한 엄마 모습을 따라 하곤 했거든요. 혀 꼬부라진 말투나 표정은 모두 우리 엄마를 흉내 낸 거에요.”(안나)
안나의 술취한 연기는 개그맨들 사이에서도 ‘명품’으로 꼽힌다. 개그맨 시험도 취객 연기로 붙었다니 이래저래 술이 그를 먹여 살리는 셈이다. 어느새 500㏄ 생맥주가 두어 잔 돌고 있었다. 제 얼굴 반만한 안경을 걸친 성광의 볼이 발그스레해졌다.

“제 연기 모델은 아버지에요. 술만 취하면 했던 얘기를 또 하고 그러셨죠. 술의 힘을 빌어서 힘든 얘기도 털어놓고 그러면서 또 힘을 내고….”(성광)
그래, 아버지다.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에서 비틀대는 성광의 연기는 꼭 우리 시대 아버지를 닮았다. 유행어로 떠오른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국가가 해준 게 뭔데” 등도 우리네 아버지들의 입에서 몇 번쯤 나왔을 법한 말이다.

“영화 ‘바람난 가족’에 ‘1등도 기억 못하는데 5등을 어떻게 기억해’라는 대사가 있어요. 하도 인상적이어서 메모를 해뒀는데 이번 코너와 묘하게 맞아 떨어졌죠. 세태를 풍자하면서 재미도 있는 말이잖아요.”(성광)

안주를 두 접시나 비워내자 묻는 이도 답하는 이도 제법 목소리가 커졌다. 개그맨으로 사는 일에 대해 슬쩍 물어봤다. 요새 코너가 뜨면서 얼굴도 제법 알려진 터라 “재미 좀 본다”는 답을 기대했다. 그런데 웬걸?
“힘들어요. 재미 없으면 첫 회에 잘리고 몇 년씩 일이 없어지기도 하죠.”(광섭)
“못 웃기면 꼭 죄인이 된 것 같아요. 스타 배우는 몇 년씩 쉬어도 재충전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몇 주만 쉬어도 ‘이제 끝났다’며 욕을 먹죠.”(성광)
“여자 개그맨에겐 예쁘거나 볼품 없거나 두 가지 잣대만 있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있어요.”(안나)

그래도 서른 즈음의 이들, 앞서간 선배들을 따라 묵묵히 꿈을 키우고 있다. 광섭은 “유재석 선배처럼 겸손한 개그맨이 되고 싶다”고 했고, 성광은 “남희석 선배의 열정을 닮고 싶다”고 했다. 안나가 가슴에 품은 선배는 조혜련이었다. “쉬지 않고 도전하는 개그 정신” 때문이란다. 마지막 잔을 부딪히며 슬쩍 2008년 KBS 연예대상 이야기를 꺼냈다.

“유재석·강호동 선배 뒷줄에서 몰래 사진을 찍었어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만 생각하다 보면 우리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거라고 서로 토닥였던 기억이 나요. 2010년엔 그런 희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광섭)

정강현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중앙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