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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朴槿惠 이야기

전동키호테 2008. 5. 19. 21:41

아무도 모르는 朴槿惠 이야기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지 아세요?,  살아오면서 내가 미치지 않은 게 비정상  

 

 

지난 5월 10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청와대에서 만났다. 108일만의 만남이었다. ‘친박 의원’들의 복당 문제를 의제로 들고 간 박 전 대표의 자세는 공격적이었다. 회동이 끝난 뒤에도 직접 기자 간담회를 열어 ‘친박 복당’을 재차 요구하며 이 대통령을 몰아붙였다. 취임 석 달이 안 된 최고 권력자를 향해 여느 여당 의원이 쉽게 취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었다.

 

무관(無冠)의 박 전 대표. 최고 권력자에 맞서 위태로운 싸움을 벌이는 그는 어떤 사람일까?

월간조선 6월호가 ‘인간 박근혜’를 심층 취재해 보도했다.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지 아세요?” 

박 전 대표는 1979년 10·26 사태로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이후 청와대를 떠났다. 그해 11월3일 9일간의 국장을 치르고 11월21일 서울 신당동 사저로 옮긴 것이 11월21일. 대통령에 취임한 아버지를 따라 청와대에 들어온지 15년 만으로, 그의 나이 27세였다.

박 전 대표는 근령, 지만 두 동생과 신당동 사저로 돌아왔을 때의 심경을 “첩첩산중에 버려진 심정이 이렇게 막막하고 외로울까 싶었다”고 했다. 더욱이 당시 새로 등장한 신군부는 그의 모든 활동을 막았다. 박 전 대표는 이때의 기억을 2007년 펴낸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청와대를 나온 이후 정권(신군부) 차원에서 아버지에 대한 매도가 계속됐다. 우리 삼남매는 부모님 기일을 포함한 어떤 공식적인 행사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결국 6년 동안 아버지 추도식을 공개적으로 치를 수 없어 집에서 조용히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인심은 더욱 허망했다. 불과 어제까지 유신정권의 녹을 먹던 사람들이 그의 곁에 오지 않았던 것. 한나라당 대표시절 박 전 대표와 인연을 맺은 한 전직 장관은 “박 전 대표가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지 아세요?’라고 말하는 경우를 봤는데 인간과 권력에 대한 불신이 짙게 배어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 박 전 대표는 1985년 6월 22일 일기에서 “마음 속에서 증오, 원망, 복수심 등의 끈질긴 집념을 수시로 지워 버리고 내쫓는 일은 그 순간순간이 기도이며 생의 원리원칙이 될 것이다”라고 썼다. 박 전 대표의 한 측근 의원은 “박 전 대표가 ‘신의’와 ‘의리’를 좌우명처럼 내세우는 것도 이 시기에 혹독한 배신을 체험한 것과 관련이 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살아오면서 내가 미치지 않은 게 비정상”이라고 박 전 대표가 종종 말했다는 것이다. 이 측근 의원은 “그 시절 믿을 것은 가족과 자신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졌을 것이고, 신군부 7년간 주변 사람들의 배신에서 도움을 준 사람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자기 확신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했다.

 

박 전 대표가 다시 공개적으로 외부에 얼굴을 비치기 시작한 것은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나서. 그는 아버지를 재평가하는 일에 매진했다. 1988년 박정희기념사업회를 발족했고 1989년엔 근화봉사단을 조직했다. 아버지를 기리는 ‘겨레의 지도자’란 책도 냈다.


◆“국가, 민족, 국민에만 감동해”

권력의 허망함을 깨달은 박 전 대표는, 그러나 ‘국가’에 대한 애정의 끊을 놓진 않았다.

박 전 대표를 가까이에서 보좌한 한 인사는 “그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눈물을 비치는 걸 세 번 봤다”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박 전 대표는 부모가 흉탄에 돌아가신 상황에서도 대중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눈물을 보인 경우를 세 번 봤습니다. 베트남 전에 파병됐던 고엽제 피해자가 ‘나는 조국을 위해 몸을 바쳤는데, 조국은 내게 무엇을 해줬느냐’고 항의할 때와 미국 하버드대를 방문했다 6·25 참전 용사 명단을 보았을 때죠. 그리고 한 번은 고 김선일씨 피살사건 때 빈소에서 만난 유가족이 박 전 대표를 붙들고 ‘대학원에 진학할 학비를 벌기 위해 사지로 갔다가 변을 당했다’고 울부짖을 때였어요. ‘이 여자는 국가, 민족, 국민 같은 개념에만 감동하는구나’ 싶어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런 박 전 대표는 전략적 셈법에 익숙지 않다. 여론조사 전문기자 출신인 김행씨는 박 전 대표의 이 같은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2002년 대선 출마를 준비하던 정몽준 의원이 박 전 대표 영입에 실패한 사례를 들었다.  “정 의원이 박 전 대표를 만나러 가는 날 정 의원 캠프는 아침부터 ‘당 대표직을 제안하면 박근혜를 영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잔뜩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박 전 대표는 ‘당 정체성이 자신과 맞지 않다’며 거부했지요. 정치적 실리보다 원칙과 명분이 충족해야 움직이는 박근혜를 몰랐던 것입니다.”


이러한 박 전 대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끝이 없다. 박 전 대표의 공보특보를 하기 전 이회창 총재를 보좌한 적이 있는 구상찬 국회의원 당선자는 “이 총재가 유세장에 가면 주변에 사람을 모으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박 전 대표는 반대로 사람을 떼놓느라 진땀을 빼야한다”고 했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는 박 전 대표의 이미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박 전 대표에 대중이 갖는 1차적 이미지는 여왕이나 공주의 이미지입니다. 이런 이미지는 대중에게 ‘존재만 해도 좋다’는 느낌과 함께 ‘그가 고통받으면 연민이 생긴다’는 이미지를 동시에 줍니다.”    월간조선 6월호 일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