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이 만난 외길인생] 9년간 탈북자 706명 구해낸 천기원
"날 구속시킨 中 공안검사가 한국에 유학… 내 딸과 연애를 하겠다는 거야"
▲ 목사 천기원, 하지만 탈북자 문제만 나오면 그는 맹렬 활동가로 변신한다.
중국에서 그를 구속시켰던 중국 공안검사가 지금 그의 사위가 됐다.
1. 2001년 12월 29일,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
'공안(公安)을 조심하라! 서로 알은체하지 마라! 죽더라도 혼자 죽자!' 그는 중국에서 활동 중인 동료들에게 수시로 휴대전화 번호를 바꿔가며 지시를 내린다. 가끔 모스크바 안가(安家)에 연락해 중년 사내들을 제3국으로 끌어낼 음모도 꾸민다. 음습한 스파이처럼 움직이는 남자 천기원(千璂元·52). 그는 목사다. 그는 2001년 12월 29일 탈북자 12명을 이끌고 중국-몽골 국경을 넘다 체포됐다. 죄목은 비법월경자(非法越境者) 방조죄. 당시 그를 구속한 공안검사 자전(賈禎)은 "중화인민공화국 법령에 따르면 당신에게 사형까지 구형할 수 있다"고 했다. 천기원은 이후 8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있다가 2002년 8월 21일 한국으로 추방됐다.
2. 2006년 9월 30일, 대한민국 부천
부천송내중앙감리교회에서 청춘 남녀 한 쌍이 결혼식을 올렸다. 베이징대학교 유학생인 신부 이름은 천한나(28). 목사 천기원의 맏딸이다. 신랑은 고려대 대학원 외교통상학과를 졸업한 중국인 유학생. 이름은 자전(賈禎·32). 천기원을 구속하고 중국에서 추방시킨 그 공안검사! 중화인민공화국 형법에 따라 사형을 구형하려 했던 그 검사가, 사형당할 뻔했던 한국인 죄수의 사위가 되다니 도대체 무슨 인연인가.
3. 사업가 천기원, 목사 되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벨보이로 시작한 인생이었다. 그러다 작은 호텔도 경영하며 그럭저럭 성공하던 사내였다. 1995년 12월, 또 다른 사업거리를 찾으러 중국에 갔다. 인생, 엉망진창이 된다.
" 베이징(北京)을 거쳐서 두만강변에 있는 투먼(圖們)에 갔어요. 두만강을 보니까 감회가 남다르데요. 그래서 강변에 내려가 사진을 찍으려는데," 얼어붙은 강물에 신발 한 켤레가 보이더라는 것이다. "이상도 해라, 얼음낚시 하는데 신은 왜 벗었나, 하고 보니까 시체였어요." 너무 놀라 가이드에게 물으니 "늘상 떠내려오는 게 조선사람 시체"라고 했다. 가다보면 더 있다고도 했다. 두만강 푸른 물을 감상하려던 천기원의 가슴에 큰 멍이 들었다.
투먼에 이어 들른 훈춘(琿春)에서 천기원에게 거지 소년들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한 다섯 살 된 애들이었는데, 동전을 주니까 막 뛰어가요. 그런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중국 경찰인 공안(公安)이,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애 귀가 찢어질 때까지' 곤봉으로 구타를 해대더라고 했다. 꽃제비, 굶주림을 피해 국경을 넘어온 북한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 구경 나간 시내에서 비명을 지르며 사내들에 의해 끌려가는 처녀를 목격했다. 가이드는 "저 처자도 조선 여잔데, 잡아가면 그 사람이 임자"라고 했다. 그날 밤, 천기원은 "두 번 다시 중국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무작정 기도했다고 한다(기도는 먹히지 않았다). 이듬해, "우리 집에 제발 목사 하나 있었으면" 하는 노부모 청에 못 이겨 신학교에 들어갔다. 어릴 때부터 귀 닳도록 들은 청이었지만, 40년을 거부하다 받아들였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신기하다"고 했다. 사업가 천기원, 그렇게 인생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4. 두번째 訪中, 그리고 데자부
처음 가본 낯선 장소에서 갑자기 자기가 와본 곳인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데자부,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한다. 1999년 7월 목사가 된 천기원이 중국을 다시 찾았다. 신학교 답사 여행이었다. "옌지(延吉) 공항에 내리자마자 꽃제비들이 몰려왔죠, 걔들을 공안들이 두드려 패죠, 투먼 기차역에 갔더니 또 비명소리에 처녀 하나가 납치되고 있지요, 저녁에 강가에 바람 쐬러 갔더니 다리 밑에 탈북자 시체 두 구가 둥둥 떠가고 있지요…."
4년 전과 어찌 그리 똑같은지. 기시감 정도가 아니라 똑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천기원은 그해 12월, 무엇엔가 홀린 듯 두리하나선교회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선교는 둘째고, 탈북자 지원이 기본 목적인 단체였다. 천기원은 2001년 12월, 탈북자 12명을 데리고 중국을 탈출하다가 공안에 붙잡혔다. 거기에서 미래의 사위를 만났고.
5. 혹한 속 철창생활 8개월
고문은 없었지만, 12월 몽골 추위는 지독했다. "영하 50도가 기본이었어요. 난방은 하루 1시간씩 네 번 틀어줬고요. 밥은 밀가루로 만든 만두 두 개가 다였고." 감옥 생활 8개월 동안 한국 정부에서는 단 한 명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대신 미국에 있던 친구가 면회 와서 미국 의회에 청원했다. 상하원이 천기원 석방 결의안을 채택했다. 2002년 5월이다. 바깥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미래의 장인 천기원과 미래의 사위 자전은 매주 취조실에서 인연을 이어갔다.
검사:"시킨 자가 누군가."
죄수:"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내 민족이 마음 아파 돕는 것이다. 당신이 서울에서 대만 거지를 봤다고 하자. 그냥 지나치나? 도우면 죄가 되나?"
검사: "비법월경자 납치죄, 3국 도피 방조죄, 불법종교활동죄! 장난하지 마라. 돕겠다는 마음? 믿지 않는다. 교사(敎唆)한 자가 누군가." 그래서 천기원이 대답했다. "하나님이 교사했다."
그가 말했다. "꼬박 6개월 동안 매주 같은 질문을 하는 거예요. 대답도 똑같았고요." 그러던 어느 날, 검사 세 명이 서류를 들고 들어와 손도장을 찍어갔다. 두 사람이 먼저 나가고, 담당검사가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이제 털어놔라. 진짜 누가 시켰나." "진짜다. 하나님이다." "어떻게 시켰나?" "성경책에 적혀있다. 고아, 과부, 나그네를 도우라고 돼있다. 탈북자들이 다 고아고 과부고 나그네다." "나도 그 책 읽어볼 수 있나?" 순간 천기원은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이 검사가 불법종교활동 함정 수사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한참 고민하다가 그러라고 했어요." 다행히 함정은 아니었다. 검사는 그에게 "You, good man"이라며 악수를 청하곤 헤어졌다. 죄수는 검사에게 명함 한 장을 인사치레로 건넸고, 보름 후 천기원은 수갑 차고 한국으로 추방됐다.
6. "나, 중국 검사입니다"
2002년 12월, 전화가 걸려왔다. "그 검사가 내 명함 가지고 있다가 전화를 한 겁니다. 한국에 올 예정이라고요. 그래서 냉큼 우리 집에 와서 자라고 했죠." 일주일 뒤 검사가 왔다. 재워주고 구경시켜주고 일주일 잘 놀고 갔다. 그리고 2003년 4월 또 연락이 왔다. " 뉴질랜드에 유학하려 하니, 도움을 달라"는 내용. "뭐 하러 멀리 가냐, 한국 와라, 더 좋은 공부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권유를 받아들이고 한국에 왔어요." 그해 6월 검사는 고려대 외교통상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2년 내내 천기원의 집에 하숙했다. 검사는 천기원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8월에 유학 갔던 한나가 방학이라고 돌아왔어요. 어린 애들끼리 말이 통하니까, 20일 동안 둘이서 엄청 돌아다니더라고요." 천기원의 목소리가 조금 커진다. "딸이 돌아가고, 며칠 있다가 검사가 묻는 거예요. 한나랑 친구 하면 안 되겠냐고. 그래서 그러라고 하니까 이 친구, 굉장히 어색해하며 말을 못합디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너, 연애하고 싶은 거냐'고 했더니, 그렇다는 겁니다, 세상에." "둘이 서로 좋아하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사귀는 건 상관없지만, 목사가 아니면 절대 시집 안 보낸다"고 우겼더니 "아버지, 그러면 목사 되겠다"고 검사가 대답했다. 2006년 9월 30일 죄수의 딸과 검사가 결혼했다.
7. "누군가가 해야죠… 인권 문제잖아요"
검사 사위를 얻고 난 후에도 탈북자 지원은 계속됐다. 1999년 12월부터 2008년 3월까지 두리하나를 통해 중국과 러시아를 빠져나온 탈북자가 706명이다. 중국 입국이 불허된 천기원은 전화로 중국 내 활동가들과 작전을 짜고 사람들을 빼낸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의 식량난으로 촉발된 대량 탈북 사태로 중국 내에 4만 명(추산)에 이르는 탈북자들이 숨어 살고 있다. "누군가가 해야죠. 이건 인권 문제잖아요." 2012년 입국금지가 풀리면 또 중국에 들어가겠다고 하니, 공안검사가 배후를 캐물을 만도 한 고집이다.
탈북 지원은 성공적으로 진행 중. 하지만 사위에 관한 한 "내가 사기당했다"고 그가 말했다. "목사 되겠다던 사위가 기업에 취직했어요. 검사 때려치우고. 이럽디다. '아버지, 돈 벌어서 아버지 사업 도와드릴게요'라고, 허, 참." 사위는 한 대기업 베이징지사에 근무 중이다. 그가 말했다. "탈북자 돕다가 사위도 만났으니, 수지맞는 사업 아닌가요?" 그를 영웅으로 만들자는 의도는 없으나, 이런 기연(奇緣)은 누군가가 기억할 만한 일이기에 여기 기록한다.
▲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 형무소에 갇혀 있던 천기원 / 두리하나 제공
www.chosun. 박종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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