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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출산 최다둥이 김목사님 가족이야기

전동키호테 2008. 1. 6. 17:40
13번째 출산 최다둥이 가족이 사는 법

씻을 때도, 먹을 때도 무조건 나이순!  스물한 살 빛나부터 막내 온새미까지 5남8녀
용돈도 나이 따라, 고교생은 1주일 3000원·초등생 500원

방 3개에 와글 와글… 형·누나는 동생들의 독선생

 

지난 12월 7일 경북 구미시 순천향병원. 12시간에 걸친 진통 끝에 오후 6시40분 3.78㎏의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김석태(49)·엄계숙(44) 부부의 열세 번째 아이다.

1986년 4월 결혼한 김 목사 부부는 장녀 빛나(21·경북대 물리학과3)를 시작으로 차녀 다솜(19·고3), 장남 다드림(16·중3), 3녀 모아(13·중1), 차남 들(13·초6), 3남 바른(11·초4), 4남 이든(9·초3), 5남 라온(8·초1), 4녀 뜨레(7), 5녀 소다미(5), 6녀 나은(4), 7녀 가온(2)이와 이번에 나온 막내까지 1~3살 터울로 5남8녀를 두게 됐다. 이전까지는 전국적으로 세 가정이 12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지만 이번 출산으로 김 목사의 가족이 전국 최다둥이 가족이 됐다.

첫째부터 열두째까지를 모두 자연분만으로 출산한 엄씨에게 이번 출산은 고비였다. 자궁 경부가 많이 부어올라 아기의 머리가 나오는 과정에서 파열될 경우 과다출혈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의료진은 제왕절개 수술을 권했고, 김 목사 부부는 고심 끝에 이를 따랐다.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에게 김관용 경북지사는 ‘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하라’는 뜻으로 온새미란 이름을 선물했다. 엄마의 얼굴도 활짝 펴졌다.

12월 25일 성탄절, 경북 구미시 고아읍 황산리의 김 목사 집을 찾았다. 널찍한 마당에는 대문이 없었다.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의 예배당과 살림집이 아담했다. 집 앞 등나무 그늘에는 김 목사가 손수 만든 그네 의자가 하나. 손님을 맞겠다며 아이들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코흘리개 어린아이들까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컴퓨터는 딱 한 대… 한 사람당 하루 20분

김 목사 가족의 아침은 6시부터 시작한다. 욕실은 한 칸이지만 문이 좌우 양쪽에 있어 여럿이 세수하고 양치하기를 한 번에 할 수 있다. 바쁜 시간이지만 나이 순서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불평이나 다툼이 없다. 언니 오빠가 먼저 일어나 씻은 다음 바로 아래 동생들을 깨워 들여보내는 식이다.

 
나이 순 원칙은 밥상에서도 이어진다. 1995년생인 넷째 모아(1월 1일)와 다섯째 들(12월 21일)이는 나이는 같지만 누나·동생 구별을 확실히 한다. 자기가 사용한 그릇과 수저를 설거지통에 담가 놓는 것은 꼬맹이들도 따라야 하는 ‘기본’이다. 중학교 언니 오빠에 이어, 초등학생 넷이 8시쯤 등굣길에 오른다. 뜨레·소다미·나은이 셋은 9시30분쯤 어린이집을 향한다. 아이들 옷을 일일이 골라주고, 머리를 곱게 빗질해 등을 두드려 내보낸 뒤 한숨 돌린 아빠 엄마는 오전 10시가 돼야 늦은 아침 식사를 한다.

가훈(家訓)을 물었더니 부부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한 사람이 되자’라고 했다. 아이들이 많다 보니 다툼이 없지 않을까. 엄씨는 “사소한 말다툼은 그냥 넘어가지만 치고 받고 싸우는 것은 회초리로 엄히 다스렸다”면서 “어설프게 때리지 않고 정말 아프게 때렸다”고 했다.  “아이들이 서로 반말하는 것을 그냥 넘기지 않았어요. 혹시라도 욕설을 입에 담으면 가만두지 않았죠.” 요즘은 큰딸 빛나가 스스로 판단해서 아이들에게 훈계하고 벌을 세우기도 한다. 형과 누나는 동생들의 독선생 노릇을 자청한다. 집안에 있는 컴퓨터는 한 대. 서로 자판을 두드리겠다고 덤빌 법도 하지만 ‘한 사람당 하루 20분’이라는 규칙으로 간단히 정리했다. 얼마 전부터는 꼬맹이들에게 ‘컴퓨터 접근 금지’ 지시가 내려졌다.


아이들의 용돈은 나이에 따라 딱 정해져 있다. 차비를 빼고, 고등학생은 1주일에 3000원, 중학생은 2000원이다. 초등학생은 1주일에 500원짜리 동전 한 개를 받는다. 한창 군것질을 좋아할 아이들이지만 10분의 1을 떼어 꼬박꼬박 헌금으로 낸다. 방 한쪽에는 김 목사가 나무로 짜놓은 십일조 상자가 보였다. 김 목사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배려의 시작”이라고 했다.

 

아이도 낳다 보니 노하우가 생겨요


1986년 결혼하고 수원에서 첫 아이를 낳은 김 목사 부부는 1988년 이곳 황산리로 내려왔다. 목회자의 길을 소망했던 남편을 따라 아내는 허물어져가던 작은 시골 교회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부부는 좋은 길로 함께 가자며 마을의 비행 청소년과 일 안 하고 술만 먹던 ‘농띠’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재주가 있던 남편은 톱과 망치를 들고 교회 구석구석을 손봤고, 땀과 정성이 배어 있는 오늘의 작고 아담한 교회를 일궈냈다. 어떻게 아이를 열셋이나 낳을 수 있을까 물었다. 김 목사는 “사람들은 제가 ‘주장해서’ 아이를 계속 가지는 것 아니냐고 묻는데, 저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사람”이라면서 껄껄 웃었다.

“이 사람이 아이를 가지면 참 좋아합니다. 결혼 전에는 아이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랐어요. 두 딸을 끝으로 아이를 그만 낳을 생각이었죠. 피를 토할 정도로 입덧을 심하게 해서 둘째 낳고는 많이 미안했거든요. 근데 이 사람이 저한테 이러는 거예요. ‘애 둘을 키우니까 셋도 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러자고 했죠. 제가 3남2녀 중 차남이라 형제 많은 것이 좋았는데, 하나 더 낳으면 아이들이 좀더 든든하지 싶었거든요.”

 
 

남편은 “아내가 출산할 때까지 할 일을 다하면서도 전혀 힘들어하는 모습이 없었다”면서 “아이를 하나 둘 낳으면서 ‘노하우’가 생긴 것 같았다”고 했다. “‘저 사람은 서부 개척시대에 태어났으면 딱 좋았을 사람이에요.” 남편의 너스레에 아내 엄씨가 눈을 살짝 흘겼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다. 그래도 아내가 안쓰럽지 않으냐는 질문에 김 목사는 “아내가 힘들어하고 부담스러워 한다면 남편된 입장에서 어떻게 계속 ‘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저 사람은 임신만 하면 저렇게 좋을까 싶을 정도로 표정이 밝아져요. 솔직히 그래서 ‘부담 없이’ 계속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하하하.”


40대 중반에 벌써 아이 열 셋을 낳았지만 엄씨는 비슷한 연배의 여성들보다 훨씬 건강해보였다. 처녀 때 45㎏ 정도 나가던 몸무게가 조금씩 불었지만 지금도 52㎏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만삭 때는 60㎏에 육박하지만 출산 후 며칠이 지나면 부기가 쏙 빠지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 체중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복음은 안 전하고 애만 만드냐” 소리엔 웃지요


이번에는 김 목사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 동네 주민이 ‘목사님은 복음은 안 전하고 아기만 만드냐’고 하더군요. 저는 ‘애기 낳는다고 복음 전하는 일에 소홀해 본 적 한 번도 없다’고 맞받아쳤죠.”

김 목사는 “위기도 있었다”며 예비군 훈련장에 갔을 때의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 예비군 훈련장에서는 정관수술을 시술 받는 사람에 대해서는 훈련을 줄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 ‘묶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종일 기다려도 보건소 차량이 안 오는 거예요.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집에 와서 보니 이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나 싶더라고요. 돌이켜보면 그때가 최대 고비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허허.”


김 목사 부부는 한 차례 유산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여섯째를 낳고 다음 아기가 들어섰을 때였다. 임신 4개월 무렵이었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았더니 자연 유산됐다는 것. 부부는 “아이를 내 맘대로 낳을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일곱째가 들어섰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김 목사는 “절대자가 이 시대에 우리 부부를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딱 목사님의 말투였다. 출산율 1.08명(2005년)의 저출산 시대에 ‘둘만 낳아도 버겁다’는 선입견과 편견을 깨 달라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김씨 가족은 2006년 경북 김천에서 열린 전국체전의 최종 성화주자로 나서 출산 장려를 위한 홍보대사 역할도 했다. 김 목사의 다산(多産) 예찬론이 이어졌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주 한다는 이야기라고 했다. “아빠 엄마는 분명히 너희보다 일찍 하늘나라로 간다. 끝까지 너희를 보듬고 지켜줄 사람은 너희 13명의 동기간 아니겠니. 너희는 서로에게 다른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이다.”

아이 열셋을 키우면서 아찔했던 순간은 없었을까. 엄씨는 물놀이 사고로 다섯째 들이를 잃을 뻔했던 1997년 현충일을 또렷이 기억했다. 친구들과 함께 집 앞의 강가로 다슬기를 잡으러 간 18개월짜리 들이가 물에 빠져 사라진 것. 한참 만에 찾은 아이는 숨을 쉬지 못하고 새파랗게 숨이 잦아들고 있었다. 교회 청년의 필사적인 인공호흡 끝에 다시 살아난 아이를 붙잡고 임신 8개월의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2004년 전국적으로 수두가 번졌을 때는 여덟 아이의 얼굴에 한꺼번에 붉은 반점이 돋아 당황하기도 했단다.

 

열두째부터는 정부보조금 받아

아이 열셋에 부부까지 15명의 대식구가 무얼 먹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엄씨는 “열한 번째 나은이를 낳을 때까지만 해도 정부 지원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주변의 아는 분들이 후원해주고, 개척교회 후원금 조금 나오고, 남편 김 목사가 틈틈이 목수일을 하면서 받는 돈을 합쳐 80만~100만원이 매달 들어오는 돈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아껴 쓰고 나눠 쓰다보니 먹을거리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집에 있는 책꽂이와 책상, 식탁 모두 김 목사가 직접 톱질, 대패질을 해서 짜놓은 것이었다. 방마다 있는 책꽂이에는 기증받고 물려받은 책이 빼곡했다. 방은 3개. 안방에서는 부부와 아기 등 예닐곱 명이 함께 잔다. 예배당과 붙어 있는 작은 방은 모아와 뜨레가 쓴다. 건넌방에서는 남자애들 서너 명이 잔다. 마당 한쪽에 있는 낡은 그레이스 승합차는 가족들의 이동 수단. 셋째 다드림이는 “12인승 차량인데 이제 동생들이 커서 그런지 저 차도 비좁다”면서 씨익 웃었다.  

 

김 목사 가족은 3년 전부터 기초생활 수급대상자로 지정됐다. 정부지원금이 나와 형편이 조금은 나아졌다. 도움의 손길도 이어져 열두째 가온이가 태어난 2006년에는 경북도청 직원들이 1300여만원을 모금해 지원하기도 했다. 순천향병원에서는 아이 셋에 대한 출산비용을 부담했다. 이번에 막내 출생신고를 했더니 시에서 출산장려금 100만원을 준다고 한다. 아이 열 명을 키우는 선산의 정육점 아주머니는 김 목사 가족에게 일 년에 몇 차례씩 고기 선물을 보내주는 넉넉한 이웃이다. 부부는 크고 작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 시청, 읍사무소와 고아농협 관계자들, 마트 상인들 모두가 고맙다고 했다.

 

엄씨는 아이들의 옷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옷방을 보여줬다. 돈을 주고 산 옷은 별로 없고, 친척이나 이웃에게 받은 옷으로 동생들이 물려 입는다고 했다. “헌옷을 보내주시는 고마운 마음도 저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까 고민하면서 깨끗이 빨아 포장까지 해서 택배로 부쳐주는 마음, 그런 정성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거든요.”
 
건강하고 예의 바른 사회인으로 키울 것

김 목사 가족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걱정 중 하나는 ‘아이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나’ 하는 것이다. 엄씨의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갔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이들 어떻게 가르치려고 저렇게 무책임하게 낳아버리냐는 비난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저희 부부, 그동안 정부 보조 없이도 아이들 잘 키우고 가르쳤습니다. 성적으로는 우등생이 아닐지 모르지만 친구들과의 관계 좋고, 예의 바른 어린이와 청년으로 잘 자라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부부는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아이들을 닦달하기보다는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미래를 열어가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사회에 뒤처지지 않고 인정 받는 아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아이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내주신 과제는 반드시 해 가도록 하는 것, 참다운 인성교육은 그런 기본적인 데 있다는 것이 부부의 지론이다.   사교육 한 번 받지 않았지만 큰딸 빛나는 경북대 물리학과에 진학해 벌써 3학년이다. 고아농협에서 4년간 등록금을 지원해 줘서 한시름 놓았다고 엄씨는 말했다. 아빠를 닮아 그림을 잘 그리던 둘째 다솜이는 올해 수능시험을 치렀다. 성적이 예상보다 신통치 않게 나왔다며 속상해 하지만 디자인 전공으로 미대에 지원했다.

 

한때 방송에 출연한 뒤 턱없는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고 부부는 회상했다. 무책임하게 아이들을 낳기만 한다며 ‘목사가 아니라 짐승’ ‘아이들이 거지꼴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악의적 비난이 이어졌고, ‘시골 노인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덕 목사’라는 저주에 가까운 인터넷 댓글이 떠다녔다고 했다. 부부는 “우리는 아빠 엄마를 믿어요. 신경쓰지 마세요”라며 등을 두드리고 위로하는 아이들을 보며 가슴이 환해졌다고 말했다. “우리 부부가 아이들은 참 잘 키웠죠?” 답답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살짝 눈시울을 붉히던 엄씨가 아이들을 꼭 안았다.

 

부부에게 결혼 이후 지금까지 아이들이 하나 둘 늘어가는 사진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엄씨는 남편의 평소 취미가 가족들 사진 촬영이라면서 앨범 10여권과 커다란 상자 네 개를 들고 왔다. 수북이 쌓인 사진 속에는 웃고 뛰놀며 밝게 커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가득했다. “아이들 키우느라 제대로 정리를 못 했어요. 이건 첫 애를 낳고 찍은 사진이고…. 이건 매년 대구 금오산의 채미정을 찾아 같은 자리에서 찍은 거네요.” 아이들이 달라붙어 사진 찾기를 시작하자 결혼기념 사진부터 열둘을 낳고 찍은 작년 사진까지 13장이 금세 모였다.

 

어느새 해는 저물고, 예배당 주변에선 색색의 작은 전구들이 불을 밝혔다. 김 목사의 집을 나오는 길. 벽에 걸린 액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月色花色不如 吾家族和顔色(달색 꽃색깔이 비록 좋다 한들 내 집 식구 웃는 얼굴색만 하랴)’.

 

<이 기사는 weekly chosun 1988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