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사방팔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전북 임실군 덕치초등학교 운동장. 노희진(8·초2)양과 친구들 6~7명이 옹기종기 모여 강아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강아지 눈에 작은 돌멩이가 박혀 있었다. 아이들은 강아지가 불쌍해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잠시 후 강아지가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돌멩이가 쏙 빠졌다. “와~ 나왔다!”
희진양은 작년까지 전교생 1000명이 넘는 광주광역시의 한 초등학교를 다녔다.
▲ 올해 3월 광주광역시에서 전북 임실군 덕치초등학교로 전학 온 노희진(사진 맨 왼쪽?2학년)양이 같은 반 친구들과 학교 풀밭에서 놀고 있다. 방과 후 1~2곳 이상 학원을 다니고 집에 와서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희진양은 이곳에서 나무에도 오르고 축구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박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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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면 매일 태권도학원, 피아노학원을 다녔고 집에 돌아오면 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올해 3월 덕치초등학교로 전학 온 후 희진양은 컴퓨터를 별로 하지 않는다. “시간도 없고 재미도 없어졌다”고 했다. 대신 운동장에서 철봉을 하고, 친구들과 축구도 하고, 나무에 매달려서 논다. 한 반 친구들을 모두 합해도 12명. 이곳 아이들 사이에는 ‘왕따’도 없다. 다투다가도 금방 화해한다.
◆산골 학교로 몰려드는 아이들=도시 학생이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동안 시골학교로 전학와서 생활하는 ‘산촌(山村)유학’에 대한 학부모들의 관심이 뜨겁다. 자녀를 시골학교에 보내려고 기러기 가족을 자처하기도 한다. 덕분에 폐교 위기에 몰렸던 시골학교는 활기가 넘친다.
덕치초등학교도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몰려드는 도시 아이들 때문이다. 2년 전 전교생은 24명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두 배 가까운 47명으로 늘었다. 곧 3명이 더 전학 온다. 작년 11월 ‘섬진강 참 좋은 학교 프로젝트’라는 산촌유학을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변화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섬진강 시인’ 김용택 교사는 “도시 학부모들의 전화가 하루 종일 이어질 정도로 관심이 많아 깜짝 놀랐다”며 “머물 수 있는 농가가 없어서 포기했지만 집만 마련된다면 받을 수 있는 도시 학생이 100여명은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계절별로 상추·오이 가꾸기, 보리 베기와 모 심기, 섬진강 생태체험(다슬기, 물고기 잡기), 허수아비 만들기, 연 날리기, 스케이트 타기 같은 것을 한다. 교과 수업은 도시 학교 못지않다. 원어민이 가르치는 영어와 중국어 수업을 듣고 매일 아침 태권도도 배운다. 독서와 글쓰기는 김용택 교사가 가르친다.
◆달라진 일기 내용=안세월(8·초1)양은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살다 올 초 이곳에 왔다. 리모델링한 덕치초등학교 관사에서 엄마, 동생과 함께 산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아빠와는 주말에 만난다. 엄마는 세월양의 산촌 유학을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엄마 강연우(32)씨는 “도시에선 아파트단지, 자동차, 빌딩에 갇혀 살았지만 이곳에선 산과 물, 자연에서 뛰놀면서 아이가 당차고 씩씩해졌다”고 말했다. 세월양은 처음에는 무당벌레만 나타나도 무서워했는데, 요즘은 벌레들과 친해지고 밥도 잘 먹는다. 일기에는 학원이나 컴퓨터게임 대신 다슬기 잡기, 태권도, 나무가 등장한다.
산촌유학생을 위해 기숙센터까지 생겼다. 인천에 살던 문아정(11·초5)양은 올 3월 전북 완주군 고산면 봉동초등학교 양화분교로 전학을 했다. 숙식은 전학을 온 11명과 함께 학교 근처에 있는 ‘고산산촌유학센터’에서 해결한다. 방과 후에는 이 센터에서 원어민 영어교사 강좌, 요가와 명상, 자연체험, 한지공예 등을 배운다. 6개월 만에 팔과 종아리의 아토피가 사라졌다.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엄마 조성숙(40)씨는 “제가 직장에 다니느라 피자와 치킨 등 인스턴트 음식을 자주 먹였는데, 요즘은 딸아이가 채소를 잘 먹고 무척 건강해졌다”고 말했다. 고산산촌유학센터 조태경 대표는 “초등학교 저학년은 부모와 떨어져서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고학년만 대상으로 한다”고 말했다.
충북 단양의 가곡초등학교 대곡분교는 오는 10월부터 처음으로 10일짜리 산촌유학을 시작한다. 이곳을 위한 학생기숙센터인 한드미마을 정문찬 대표는 “도시 아이들에게는 자연 체험 기회를 주고, 폐교위기에 몰린 농촌학교에는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며 “차츰 유학기간을 늘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경북 상주의 화북초등학교와 함께 산촌유학을 운영하고 있는 귀농자 이명학씨는 “현재 2학기 산촌유학을 대비해 학생 6명이 농가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며 “주변에 학원도 없고 의식주(衣食住)를 모두 시골생활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적응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마천초등학교는 ‘햇살네 교류학습’과 함께 2주 동안의 짧은 산촌유학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부모의 분명한 교육철학이 있어야”=김용택 교사는 “혼자 노는 데만 익숙하고 자기만 알던 이기적인 도시 아이들이 몇 달만 지나면 잃어버린 감성을 되찾는 것을 자주 본다”고 말했다. ‘산촌 유학’이야말로 아이들에게 도시 교육으론 얻기 힘든 것을 채워줄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가 마땅치 않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시골생활에 대한 막연한 환상으로 섣불리 산촌 유학을 선택하는 것은 금물이다. 김 교사는 “산촌 유학을 논술이나 글쓰기를 배우는 또 다른 과외로 생각하거나 치료가 필요한 학습 부적응아를 무조건 시골에 데려오면 고쳐진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라고 말했다.
산촌 유학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목표와 교육철학을 갖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란희 기자 rhpark@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