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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엄한 월드컵 현실 받아들이자 (by 차범근)

전동키호테 2006. 6. 26. 18:45
갑자기 허전해졌다.

두리가 새로 옮긴 팀(마인츠)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어제 떠나면서 나 혼자 남게 된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 축구대표팀이 짐을 싸 귀국해 버린 이유가 더 큰 것 같다.

독일에 들어온 뒤 대표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뛰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계방송석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을 해 왔다. 이운재.박지성.이천수.최진철 등 선수들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때로는 안쓰럽고 때로는 너무나 자랑스럽던 자식 같은 우리 선수들이 훌쩍 떠나버렸다.

오락기처럼 빈틈없이 움직인다는 아르헨티나가 기세를 올리고 있고, 나도 응원을 마다하지 않았던 홈팀 독일이 연승을 이어가면서 팬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브라질 역시 그간 막혔던 호나우두의 골이 무더기로 터지면서 '아무도 우승컵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한다. 거기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그리고 이탈리아까지 예외없이 16강에 가세하면서 독일 월드컵은 열기와 흥분을 더해가고 있다. 하지만 어제오늘 도무지 흥이 나지 않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16강,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부심이 깃발을 한참 들고 있어서 우리 선수들은 경기를 멈췄다. 우리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부심의 깃발은 순식간에 내려가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골 사인을 보내는 게 아닌가. 중계석 옆자리에 앉아있던 두리가 "저건 사기예요!" 하고 소리를 높였다. 너무 깜짝 놀라 두 눈을 부릅뜬 채 두리에게 조심하라는 사인을 보냈지만 그순간 그렇게 외치고 싶은 사람이 왜 두리 혼자뿐이겠는가. 물론 오프사이드 논란이 일어난 두 번째 골 때문에 16강행이 좌절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심의 무책임한 행동은, '잘 싸웠다'며 우리 선수들을 격려하고 상대를 축하하며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싶었던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을 흔들어 버렸다. 그게 아쉬운 거다.

이제는 받아들이자. 월드컵은 더 이상 단순한 축구경기가 아니다. 세계를 아우르는 문화다. 이미 하나로 묶여버린 세계는 희로애락은 물론 호흡까지 같이 한다. 벌써 우리의 억울함을 탓하는 듯 현지에서는 "2002년 한국에 진 이탈리아나 스페인과 비교한다면 한국의 억울함은 아무것도 아니다"며 정중히 질타한다. 당시 화면까지 곁들인다. 우리의 억울함을 덮고 상대를 인정하자. 그러면 그들도 우리를 인정할 것이다.

스위스는 많은 사람의 예상처럼 탄탄한 팀이었다. 프랑스 역시 그 이름만으로도 무시하기에 벅찬 팀이다. 우리 팀의 경기 내용이 특별히 나쁘지는 않았다. 특히 마지막 스위스와의 경기는 월드컵 세 경기 중 가장 훌륭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16강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가 다른 조에 비해 특별히 까다로운 조에 속한 것은 아니다. 모든 조가 그 정도 수준은 됐다. 그렇다면 다음 월드컵에서는 지금보다 나은 모습이라야 16강을 넘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번 독일 월드컵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냉정한 현실이다.

축구는 선수가 한다. 지금의 대표팀이 4년 후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는 선수들의 몫이다. 이제는 국가대표나 축구선수가 더 이상 춥고 배고픈 희생의 자리가 아니다. 어느 나라보다 훌륭한 보상이 충분히 뒤따르고 있다. 감사해야 할 만한 수준이다. 우리 선수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 그리고 대표팀의 경기를 보면서 참고 인내해 준 수많은 팬, 그들의 사랑 역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약속하자.

차범근 중앙일보 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