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_감동_生_인물

한국 지질학의 선구자 이상만 명예교수_이문세장인

전동키호테 2012. 8. 12. 14:26

오늘도 난 뭔가에 미친다… 팔팔 청춘
"이문세의 장인? 무용가 육완순의 남편? 나는 나‐ 아직도 최고의 날을 위해 뛴다"
나는 지질학자다…/ 난 나이 먹는 게 좋다…/달에서 가져온 月塵연구…
지질학의 매력은 답사여행…/젊은이여, 아프리카 가 보라…/사위 이문세?…

가수 이문세의 장모가 한국 현대무용을 개척한 육완순(79)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인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장인이 한국의 지질학 선구자인 이상만(86) 서울대 명예교수인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950년 서울대 지질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과 캐나다에서 석·박사를 받고 귀국해 64년부터 91년까지 27년간 서울대 교수로 일하면서 한국 고기(古期) 기반암 연구에 평생을 바친 이가 이 교수다. 그는 1964년 제주도 화산암을 최초로 연구했으며 식수를 용천수에 의지하던 제주에서 1970년 지하수를 개발한 인물이기도 하다. 아폴로 11호가 달에서 가져온 월진(月塵)을 한국 최초로 연구했는가 하면, 유네스코 산하 위원장으로 12년에 걸쳐 아시아 지질도를 편찬한 학자다.

올해 미수(米壽)를 맞는 이상만 명예교수는 서울 홍대 앞 와우산공원 근처 언덕에 30여년째 살고 있다. 한국 지질학의 선구자인 그는 은퇴 이후 시·그림·서예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가고 있다. 자신의 나이를‘121세’라고 하는 그는“시 세계를 더 꿰뚫어볼까. 추상화의 경지에 도전해볼까, 하고 싶은 게 많다”고 했다./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65세에 정년 퇴임한 뒤로 그는 더욱 부지런해져서 시인과 수필가로 등단했으며 동양화가와 서예가로도 인정받고 있다. 그는 오는 31일 옛 서울역사(驛舍)를 개조한 '문화역서울 284'에서 미수(米壽) 기념 서화 전시회와 자서전 출판 기념회를 열 예정이다.

지난 6일 서울 창전동 자택에서 만난 그는 "이문세보다 내가 훨씬 더 유명한 사람"이라며 "유명하다는 건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얼마나 보람있게 살았느냐로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육완순 무용원이 있는 4층짜리 건물에서 딸 부부와 함께 사는 그의 집 세간은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거실엔 '아남' 25인치 브라운관 TV가 있고, 깨끗하게 관리한 가구들에는 꽤 오랜 세월의 흔적이 있었다.

―1926년생이면 미수는 아직 1년 더 남았습니다만.

"내 생일이 음력으로 1925년 12월 29일이에요. 그렇게 세면 올해가 미수죠. 나는 나이 먹는 걸 좋아해요. 그게 내 자랑이거든. 우리 사위가 나더러 '5관왕'이라고 해요. 지질학 박사, 시인, 화가, 서예가, 수필가라고. 그런데 그런 5관왕은 자랑이 아니야. 값진 경험의 총화가 나이예요. 나이를 왜 '먹는다'고 하겠어요. 모든 먹는 것을 잘 먹으면 에너지가 돼서 얼굴이 밝고 화색이 돌아요. 그런데 나이를 잘못 먹으면 허약하고 망나니가 될 수 있어요. 우리 옛말에 술도 '먹는다' 그랬어요. 송강 정철이 '장진주사(將進酒辭)'에서 '한잔 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했잖아요. 나이나 술이나 잘 먹어야 몸에 이롭고 사람 됨됨이가 되는 법이에요."

―요즘은 주로 강원도 평창에 머무신다고 들었습니다.

"평창에 작업실 겸 기거하는 데가 있어요. 내 평생 자연과학을 해왔으니 퇴임한 뒤로는 '자연이 나에게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자' 하면서 자연을 파고들었어요. 인간은 자연의 인자(因子)이기 때문에 나이 들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해요. 자연 속에서 글 쓰고 그림 그리고 하다 보면 자연과 친구가 돼요. 그러면서 자연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거죠."

그의 호(號)는 도암(���\岩)이다. '말 오고갈 도'와 '바위 암', 돌과 대화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한학자였던 그의 친구가 '바위처럼 생겼고 바위를 공부했으며 바위와 대화한다니까' 1980년에 지어준 것이다.

―돌과 대화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돌마다 제각기 모양도 색깔도 구성물질도 달라요. 돌을 오랫동안 연구하다 보면 돌을 보기만 해도 짐작이 가요. 돌을 손에 쥐었을 때 그 돌에 대한 내 지식을 전부 퍼부으면 돌이 여과장치가 돼서 필요없는 말은 다 흘러내리고 필요한 말은 튕겨 나와요. 그게 돌과의 대화예요. 나는 답사 다닐 때 학생들이 돌을 막 두들기면 '야 이놈들아, 그렇게 막 두들기는 게 아니야. 돌아, 미안하다. 내가 좀 공부하기 위해서 너를 두들겨야겠다, 이렇게 말하고 두들겨라'고 가르쳤어요. 지리산 바위 하나에도 21억년짜리 돌과 17억년짜리 돌, 7억년짜리 돌이 섞여 있어요. 그런 걸 알아야 돌과 대화가 되는 거죠. 그런 대화를 하다 보면 돌 하나가 소우주(小宇宙)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더 나아가서 돌이 우주 그 자체라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강변의 흔한 자갈과도 대화가 됩니까.

"그런 자갈은 다 마모가 된 상태예요. 한 번 보면 어디서 굴러왔는지 바로 알 수 있죠. 지리산 골짜기에 가 봐요. 계곡 상류가 각지고 큰 바위로 시작해서 각진 놈과 둥근 놈이 섞이고, 그다음엔 둥근 놈들 그리고 하류엔 자갈만 있어요. 그 경로가 훤히 다 보이죠. 어디서 얼마만큼 굴러왔구나 하는 걸 짐작할 수 있어요."

―월진(月塵) 연구는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아폴로 11호가 달에서 광물을 캐왔는데 그걸 꼭 내 손으로 연구해보고 싶어서 과학기술처에 의뢰했더니 1970년에 나사(NASA)를 통해 5g이 왔어요. 그때 공항에서 월진을 실은 차를 경찰차가 미국 대사관까지 호위하고 난리가 났지요. 혹시나 누가 훔쳐갈까 봐 언론에다가는 ‘서울대 연구실에 보관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사실은 우리 집에서 연구했죠. 연구가 끝난 뒤엔 충북 청주의 ‘홍산박물관’에 기증했어요.”

―그런 학문이 재미있습니까.

“재미있어요. 지질학은 상상력이에요. 물리학은 숫자가 딱 들어맞아야 하는데 지질학은 상상력으로 하는 공부예요. 빅뱅이라는 게 아무것도 없다가 어느 순간 쾅하고 터져서 수많은 별이 생겨난 거잖아요. 그렇게 은하수가 되고 태양계가 되고 지구가 태어난 것이죠. 사람은 물론 동물과 식물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죠. 그러니까 돌멩이를 무생물이라고 말하는 건 뭘 잘 모르는 거예요. 현미경으로 암석을 관찰해보면 호화찬란해요. 빛깔이 광물마다 다 다르잖아요. 굴절률도 다 다르고. 다이아몬드가 뭐예요? 탄소 결정체잖아요. 탄소 결정도 어떤 놈은 숯이 되고 어떤 놈은 다이아몬드가 되는 거죠.”

―평생 돌을 연구하다 보면 경외심도 생깁니까.

“동해안에 가면 시대가 다른 해안 단층을 볼 수 있어요. 어마어마하게 오래된 지구의 역사가 그 단층에 새겨져 있지요. 지구 역사가 46억년이라고 하고 인류 역사는 원인류부터 시작해도 100만년이에요. 지구 역사를 1년으로 치면 인류 역사는 3초도 안 돼요. 그럼 나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대자연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시인·화가·서예가이면서도 자서전 서문은 ‘나는 지질학자다’로 시작하던데요.

“지질학을 했기 때문에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린 거죠. 어릴 때부터 자연을 사랑했기 때문에 지질학을 공부하게 됐고, 지질학을 공부하니까 세계 유명 산천을 다 돌아다닐 수 있었어요. 그 덕분에 자연을 더욱더 사랑하게 됐지요. 그러니까 내 시, 그림, 글씨의 뿌리는 지질학이에요. 나는 어디 가서 화가라고 해본 적이 없어요.”

―어려서부터 자연을 좋아한 계기가 있습니까.

“내가 경북 김천 황악산 밑에서 태어났는데 감천 냇가에서 씨름하고 놀던 때가 아직도 생각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몸이 안 좋아 전북 정읍에 있는 병원까지 혼자 기차여행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역전에 앉아 있는데 빗줄기가 무척 쏟아졌거든요. 그걸 보고 전율을 느낄 만큼 좋았어요. 그때부터 여행을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했어요.”

―6·25 직후에 미국 유학을 떠났는데 당시로써는 매우 드문 일이었겠죠.

“전쟁에서 국군이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후퇴할 때였어요. 군대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공군 기술장교 후보생 모집하는 걸 보고 지원했지요. 보병으로 가는 것보다는 기술장교가 돼서 내가 배운 것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었죠. 공군사관학교에서 독도법과 군사지형학을 가르쳤지요. 전쟁 끝난 뒤까지 3년 6개월을 복무했어요. 의무 복무연한이 7년이었는데, 어느 날 ‘진짜 공부를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미국 콜로라도대학원에 지원했고 입학 허가를 받았죠. 이 허가증을 들고 사관학교 인사국장을 찾아가 ‘군에 있는 것보다 조국을 위해 10배 이상 좋은 일을 하겠다’고 설득했지요. 결국 남은 3년 6개월을 감면받아 전역하고 미국으로 갈 수 있었어요. 1954년 8월이었지요.”

―미국 유학 시절 심한 고학(苦學)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집에 돈이 있어도 달러를 바꿀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미군들이 쓰는 ‘군표(軍票)’ 100달러와 어머니가 빼주신 금가락지 하나 들고 미국으로 갔어요. 군표는 미국 본토에서 쓸 수가 없었고 금가락지도 당장 현금으로 바꿀 수가 없었죠. 가자마자 그릇 닦기부터 시작해 페인트칠, 가게 허드렛일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그때는 볼링장에서 쓰러진 핀을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세웠는데, 그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1시간에 45센트 주는 일이었지요. 손이 느리다고 ‘갓댐(Goddamn)’ 소리도 많이 들었죠. 볼링장 일을 마치고 허겁지겁 강의실에 뛰어오면 온몸이 땀에 범벅이 되고….”

―그때 ‘익명의 후원자’도 만났다면서요.

“하루는 학교의 외국인 학생 상담사가 찾아서 갔더니 ‘어떤 익명의 기부자가 착실하고 가난한 학생에게 주라고 했다’면서 100달러를 주는 거예요. 아무리 가난해도 ‘까닭 없이 돈 받는 건 거지다’라는 생각에 ‘이름을 알아야 받겠다’고 고집했더니 미네소타에 사는 줄리아 마셜이라는 할머니라고 해요. 100달러면 그 당시에 굉장히 큰돈이었어요. 그 돈으로 책과 운동화를 비롯해서 필요한 물건들을 산 뒤에 목록을 죽 적고 감사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주신 돈으로 이런 물건을 샀습니다. 훗날 반드시 갚겠습니다’라고요. 그랬더니 고맙다는 편지가 오고 하면서 교류를 시작했죠. 캐나다 맥길대에서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 5~6년간 몇천달러는 받았을 거예요. 나중에 캐나다 자원조사국 지질조사관으로 일하면서 한 달에 2000~3000달러씩 벌게 됐어요. 그래서 그 할머니를 찾아가 그간 받은 돈을 내밀었죠.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그 돈은 너를 위해서 준 게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준 것이다’면서 사양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감탄했겠어요. 그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 마을 신문사에 찾아가 이런 사연을 얘기했고, 그 신문에 할머니 이야기가 대서특필되었지요.”

이 교수는 훗날 부인 육 여사와 함께 마셜 할머니를 다시 찾았고, 육 여사는 그 할머니의 기부로 그 마을에 지어진 ‘마셜 홀’에서 무용 공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 할머니는 100세를 넘겨 영면했다.

지난 2000년 중국 윈난성 쿤밍의 소수민족 마을에 답사 갔을 때 찍은 사진. 그는 중국의 대자연에 매료돼 나이 여든에 중국어를 배워 중국 자유여행에 나섰다./이상만 교수 제공
―유학생이 거의 없던 시절에 그렇게 무모하다시피한 유학을 결정한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경상도 사투리로 ‘무대까리’예요. 막무가내란 뜻이지요. 하고 싶은 걸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부모님이 유학을 권하셨던 것도 아니었어요. 반면 하지 않겠다는 건 또 절대로 안 해요. 내가 이 나이 되도록 커피를 절대 안 마시는 것도 그때 결심 때문이에요. 유학 시절 커피 한 잔에 25센트였고 우유도 25센트였어요. 같은 돈이라면 몸에 이로운 우유를 마시자 해서 안 마신 커피를 지금까지 한 잔도 안 마셨어요.”

―그만큼 열심히 공부했겠군요.

“머리도 안 깎고 수염도 안 깎고 죽어라고 공부만 했지요. 그래서 내가 연구한 것이 미국 대학 지질학 교재에도 실렸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나이 많다고 할 일을 찾아서 하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예요. 파고다공원에 가서 시간이나 보내고 하는 건 죽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김소월과 예수 모두 30대 초반에 죽었지만 그 업적 때문에 지금까지 살고 있잖아요. 석가모니가 해탈한 것도 30대 초의 일이었지요. 그렇다면 뭘 위해서 살 것인가? 그건 자기 자신이 찾아내야 해요. 하여튼 빈둥빈둥 놀면서 사는 건 죽은 삶이다 이거예요.”

―중국 여행을 위해 중국어도 배웠다면서요.

“여든살쯤부터 배웠지요. 중국 장가계(張家界)에 다녀온 뒤로 중국 자연에 푹 빠졌는데, 가이드 따라다니는 여행과 답사가 답답해서 배웠어요. 하이난도(海南島) 사범대에 화산학회 초청을 받아 갔다가 그곳 어학연수원에서 배우기 시작했어요.”

―보통 그 연세에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생각하기에 달렸어요. 뭔가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용감해야 해요. 거미가 줄을 어떻게 치는지 알아요? 방사형으로 아름답게 거미집을 만들잖아요. 나는 봤어요. 거미가 나무에서 덜렁덜렁 매달려 있다가 꼬리에서 실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눈을 딱 감고 떨어지는 거예요. 잘못 떨어지면 뇌진탕으로 죽을 수도 있어요. 그렇게 떨어지다가 나무에 걸리거든. 그러면 다시 올라가는 거예요. 거미도 그렇게 집을 짓는다고요.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중국어 배울 때도 그렇고 시나 그림을 배울 때도 그랬어요. 뭐 한 가지에 미쳐야만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거예요. 공자 말씀도 ‘지(知)는 불여호(不如好)요, 호(好)는 불여락(不如樂)이라’고 했어요. 뭔가 이루기 위해서는 일단 알아야 하고, 알면 좋아지는 거고, 그다음엔 미쳐야 돼. 그게 바로 지호락(知好樂)의 순서예요.”

―전 세계 지질 답사를 하면서 안 가본 대륙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천막 속에서 빅토리아 폭포의 신음을 들었지요. 히말라야에 올라 지구가 회전하는 것을 보았어요. 또 이집트나 옛 소련에 갔다가 북한에 납치될 뻔한 순간도 여러 번 겪었습니다. 그런 곳에 다녀오면 또다시 자연의 품에 안기고픈 사무친 그리움 때문에 또다시 떠나게 되었어요. 그런 그리움과 외로움에서 시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젊은 세대에게 꼭 권하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어디입니까.

“아프리카를 권하고 싶어요. 돈도 많이 들고 가기도 어렵지만 말이에요. 아프리카에 가면 기원전의 삶을 볼 수가 있어요. 2000년 전 사람들의 삶 속에 내가 들어가는 거예요. 맹수가 약자를 잡아먹고, 또 하이에나가 그 찌꺼기를 먹는 그 와일드한 세계! 그것을 봐야 해요. 내가 88세니까 그곳에 다녀오면 2000살을 더 먹어 2088세가 돼서 돌아오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큰 소득이에요.”

그는 사생활에 대해서는 말을 잘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의 거실에는 딸 부부, 손자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여러 장 걸려 있었지만 “가족사진은 신문에 빌려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나를 인터뷰하러 왔으면 내 얘기를 해야지 집사람이나 사위 얘기를 하려고 하느냐”고도 했다. 그래서 가족에 대한 질문은 매우 적었다.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유학하고 귀국해서 소개로 만났어요. 그 사람(육완순 여사)은 이화대학에 강사로 나갈 때였는데, 무교동 다방에서 만났지요. 내가 먼저 가서 다른 곳에 앉아 지켜보다가 맘에 들면 같은 건물 3층에 있는 음악감상실로 가는 것을 ‘맘에 든다’는 신호로 정했어요. 그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데 아주 날씬한 여자가 새까만 옷을 입고 머리를 묶었는데, 아주 활달하더라고요. 그만하면 됐다 해서 3층에 올라갔는데 따라 올라오지 않는 거예요. 답답해서 소개하는 사람과 둘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갔더니 마침 집사람이 ‘그 사람 키가 커?’하고 상대방에게 묻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끼어들어 ‘보다시피 키가 큽니다’라고 말했지요. 그렇게 만났어요.”

―사위 이문세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서 내가 지현이(외동딸)를 이대 수학과를 보내고 얼마나 귀하게 키웠는데…. 그래서 교수 사위를 원했어요. 그런데 문세씨가 나타났잖아. 그때 나는 속으로 ‘너는 부족하다. 나는 너보다 나은 사람을 원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요. 교수 아니라 사위가 대통령이라고 해도 문세한테는 안 돼요. 그 마음씨가 곱고 진실하기 짝이 없어요. 내 딸을 박사까지 공부시켰지, 교수(서울여대)까지 만들었으니까. 지금은 문세 같은 사위는 구하려 해도 구할 수가 없어요.”

―지질학자와 무용가의 결혼과 가수와 수학자의 결혼이 다릅니까.

“누가 다르대? 그냥 그때는 그랬다는 거예요. 나 결혼할 때도 집사람한테 ‘나는 집도 없고 돈도 없다’고 하니까 육 선생이 ‘우리가 벌면 되지 무슨 걱정이냐’고 했어요. 그런 진실한 마음씨가 삶의 열쇠예요. 그런 면에서 우리 사위 이상 가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캐나다 맥길대에서 공부할 때 책상 앞에 ‘상만아, 너는 초로(草露)와 같이 사라질 것이냐. 죽음이냐, 박사냐’ 하고 써놓았다던데 지금도 그렇게 간절한 무엇이 있습니까.

“이번에 나오는 내 책 제목이 ‘아직도 최고의 날을 위해 뛴다’예요. 더 베스트 이즈 투 컴(The best is to come)! 최고의 날은 아직 안 왔어. 뭔가 깨우침이 있는 최고의 날이 올 거예요. 그걸 위해서 희망을 갖고 살고 있어요.”

이 교수는 정년퇴임 때 서울대 학보사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101세. 담담한 심정으로 물러간다”고 했었다. 그는 이어 “운동장에 100세 먹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화를 나누어보자. 나만큼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아무도 응답이 없다면 내가 그들보다 나이 많은 101살이라고 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나는 121세”라고 말했다.

“정년퇴임 하고 20년이 지났어요. 그동안 예술과 철학에 몰두해서 살았어요. 그러니까 나는 지금 121세예요. 인간은 나이 들면 다 예술과 철학으로 빠지게 돼 있어요. 인간이 뭐냐, 왜 살아야 하는가, 이런 인간 본연의 질문에 부딪히거든. 그것 없이 과학 연구만 하다가 가면 삶의 10분의 1만 살다가 가는 거예요. 나는 정말 만족스럽게 살다가 가요. 후회 없이 살았어요. 자연을 사랑하고 지질학을 공부하고 다시 자연을 맴돌다가 만족해서 살다 갔다! 그것만 남기면 돼요. 사람들이 나를 보고 ‘121세까지 살다가 간다고 자랑하더라’고 말해준다면 바랄 게 없겠어요.”

솔직히 노(老)교수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이문세의 장인’이자 ‘육완순의 남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 시간 동안 이 ‘121세 청년’과 대화를 한 뒤엔 ‘지질학자 이상만’으로 그를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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